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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녹동재(鹿洞齋)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5+KSM-XF.1923.4777-20130630.Y1350101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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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박승동, 채헌식, 이수기, 녹동재
작성지역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 585
작성시기 1923
형태사항 크기: 69.3 X 68.5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917년 녹동재(鹿洞齋) 통문(通文)
이 통문은 1917년 9월 녹동재에서 모하당 김충선을 추모하는 사업을 계획하는데 옥산서원이 공의를 발의해 줄 것을 당부하는 내용의 것이다. 김충선가등청정의 선봉장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했다가 귀순한 왜인이다. 그는 조선의 선진 문물을 보고는 변방의 뒤떨어진 풍속을 벗어나려는 뜻에서 상륙하던 즉시 경상도 병마절도사 박진에게 강화를 청하였다. 그 후 조선 군인으로 참전하여 울산경주영천 등지에서 왜적을 무찌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정유재란 ․ 이괄의 난 ․ 정묘호란 ․ 병자호란 등 6차례나 출진하여 맹위를 떨쳤다.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1597년(선조 30)에는 자헌대부로, 그리고 1613년(광해군 5)에는 정헌대부로 승품되었다. 그는 이처럼 정경으로 추증되어 부조의 특전이 허락되고, 사우도 완성이 되어 춘추로 제향을 드렸다. 그런데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진 이후로 그를 추존하는 의식은 사라지고, 서원은 퇴락하였다. 그래서 유림에서 계를 조직하여 남긴 뜻을 추모하기로 모의를 하였으니 유림을 선도하는 옥산서원이 공의를 발의하여 일이 성사될 수 있게 해주었으면 고맙겠다는 말로 통문은 끝을 맺는다.
이 통문에서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녹동서원1868년의 서원철폐령으로 몰락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885년(고종 22)에 영남의 유림과 김씨 문중이 합심하여 서원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 통문은 바로 서원을 재건하려는 과정에서의 일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의 서원은 1971년 국고의 지원을 받아 옮겨진 것으로 입구의 향양문을 비롯해 강당인 숭의당, 위패가 모셔진 녹동사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서원 옆에는 충절관이 건립되어 김충선과 임진왜란 때 사용된 무기류가 전시되어 있고, 또한 이곳은 현재 한일문화교류의 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달성군 일반동산문화재 다량소장처 실태조사 결과보고서』, 달성군,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5
沈鳳燮, 영남대학교 환경보건대학원, 2006
하창환,이수환

상세정보

1917년 9월, 鹿洞齋에서 金忠善의 追慕事業을 위한 公議를 玉山書院가 發議해 줄 것을 당부하는 通文
[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이 통문은 1917년 9월 鹿洞齋에서 慕夏堂 金忠善를 추모하는 사업을 계획하는데 玉山書院가 公議를 발의해 줄 것을 당부하는 내용의 것이다. 이 통문에 따르면 김충선은 우리나라에 귀화한 뜻과 위급할 때 나라를 구원한 공로가 正史에도 실려 있을 뿐만 아니라, 野史에도 잘 드러나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그의 공로에 감탄하고 그를 존숭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김충선은 正卿으로 추증되어 不祧의 특전이 허락되었다. 그리고 祠宇도 완성이 되어 춘추로 祭享을 드리고, 여러 대의 임금들이 그를 숭상하고 장려하는 은전이 참으로 지극하였다. 그런데 유림에서 그를 추앙하는 도리는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진 이후로 언제나 애석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다. 녹동재는 선생이 평소에 지내던 곳으로 그의 교화와 영향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래서 유림에서 契를 조직하여 남긴 뜻을 추모하기로 모의를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지나치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통문은 반문하고 있다. 이에 녹동재에서는 유림을 선도하는 옥산서원에 이 일을 알리고, 옥산서원이 공의를 발의하여 일이 성사될 수 있게 해주었으면 고맙겠다는 말로 통문은 끝을 맺는다.
이 통문에서 김충선이 귀화한 뜻이라는 것은 그가 일본인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했다가 귀순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의 墓碣에 따르면 일본 성씨는 沙氏이며, 이름은 也可이다. 그는 1592년(선조 25) 加藤淸正의 선봉장으로 군사 3천명을 거느리고 조선에 건너왔다. 그러나 바다를 건너 조선의 선진 문물을 보고는 변방의 뒤떨어진 풍속을 벗어나려는 뜻에서 상륙하던 즉시 경상도 병마절도사 朴晉에게 강화를 청하였다. 그리고 그는 조선 군인으로 참전하여 울산경주영천 등지에서 왜적을 무찌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 뿐만 아니라 정유재란 ․ 이괄의 난 ․ 정묘호란 ․ 병자호란 등 6차례나 출진하여 맹위를 떨쳤다. 그는 귀화 이후의 생애 절반을 조선군으로 전쟁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이 통문에서 위급한 나라를 구원한 공로가 있다는 것은 이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1597년(선조 30)에는 資憲大夫로, 그리고 1613년(광해군 5)에는 正憲大夫로 승품되었다. 이는 그의 공로가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케 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귀화한 일본인의 신분에는 파격적인 조처라 아니할 수 없다. 본 통문에서 김충선이 정경에 추증되었다는 것은 이와 같은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김충선은 8년간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종결되자 진주목사 張春點의 딸과 혼인하고, 1600년(선조 33) 友鹿洞에 정착하였다. 하지만 국가가 위기상황에 처했을 때는 지체 없이 달려가 힘을 보태고, 평시에는 이곳에서 은둔처사로 살아갔다. 그는 병자호란을 끝으로 이곳에서 은거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이 우록동은 본 통문에서 김충선의 杖屢之所라고 하던 곳으로 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우록리이다. 이처럼 김충선은 귀화한 왜인이기는 하지만 나라에 대한 공헌은 누구에 뒤지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의 사회적 경향으로 볼 때 사후에 그에 대한 추모의 祭行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왜인이면서 무장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오랫동안 이러한 일이 시행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영조 말년에 처음으로 삼도의 유림들이 김충선의 충절정신을 기리자는 合疏를 올렸고, 1789년(정조 13)에 다시 유림의 公議를 모아 그를 위한 서원의 건립을 청하였다. 그리고 1794년(정조 18)에 鹿洞書院을 건립하여 그의 위패를 봉안하게 되었다. 본 통문에서 그에게 不祧의 특전이 허락되고, 여러 대의 임금들이 그를 숭상하고 장려하는 은전이 참으로 지극하였다고 하는 것은 이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녹동서원1868년에 있었던 서원철폐령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 후 1885년(고종 22)부터 영남의 유림과 김씨 문중이 합심하여 서원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 통문은 바로 서원을 재건하려는 과정에서의 일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의 서원은 1971년 국고의 지원을 받아 옮겨진 것으로 입구의 向陽門을 비롯해 강당인 崇義堂, 위패가 모셔진 鹿洞祠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서원 옆에는 忠節館이 건립되어 김충선과 임진왜란 때 사용된 무기류가 전시되어 있고, 또한 이곳은 현재 한일문화교류의 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자료적 가치]
자료적 가치
1920년대를 전후로 훼철된 많은 서원들이 복원을 시도하였다. 이 통문 또한 그 시기에 서원의 복원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 통문이 가지고 있는 형식적인 특징은 署名에 있다. 통문의 서명에 있어 관례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그리고 왼쪽 마지막 이름 아래에서 다시 오른쪽으로 써내려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통문은 이와 반대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오른쪽 마지막 이름 아래에서 다시 왼쪽으로 서명이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달성군 일반동산문화재 다량소장처 실태조사 결과보고서』, 달성군,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05
沈鳳燮, 영남대학교 환경보건대학원, 2006
하창환,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917년 녹동재(鹿洞齋) 통문(通文)

通文
右文爲通諭事伏以我慕夏堂金先生向化之義靖難之功載在國乘昭著野史凡我東人孰不欽歎而尊
尙哉贈之正卿許以不祧祠宇已成禮享春秋列 聖朝崇獎之典固至矣而在吾林尊仰之道則自戊辰邦令
之後常爲慨惜之地也遺風餘韻尙有存焉惟此本齋卽先生當日杖屢之所也肆自士林合謀修稧以寓
慕夏之遺意此世此擧孰是過也伏惟
貴院乃首善之地也玆敢齊聲仰告伏願 僉尊峻發公議俾至敦事之地千萬幸甚
右通通
玉山書院
丁巳九月 日
鹿洞齋發文 徐錫駿
徐鎭文
朴昇東
朴致奎
具達書
李尙春
蔡憲植
李柄達
全永漢
孫亮瀅
禹成東
朴永祧
李庭庠
楊在淳
金錫禹
尹棟 等再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