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1월, 泗陽書堂에서 李瑞雨를 追配하는데 玉山書院의 協贊을 구하는 通文
[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이 통문은 1938년 1월, 泗陽書堂에서 秉節校尉를 지내고 副正에 추증된 李瑞雨를 追配하는데 玉山書院가 협조와 찬조를 해 줄 것을 당부하는 내용의 것이다. 이 통문에 따르면 이서우는 문무의 재주를 겸비하면서 학문적 연원과 맥락이 바르게 이어온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寒岡 鄭逑에게 나아가 사사하였으며, 병자호란 때는 경기도 竹山 雙嶺陣 전투에서 殉死하였다. 이서우의 이러한 행적은 중국 당나라에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睢陽에서 사력을 다해 성을 지키다 죽은 張巡과 許遠의 기풍을 느끼게 한다. 그는 살아서는 당대의 師表가 되고, 죽어서는 쇠퇴하고 문란한 풍속에 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조정에서는 褒賞과 恩典이 있었으며 높은 벼슬로써 품계를 높여주었다. 하지만 그의 향리에서는 조정의 이와 같은 추존에 미치지 못하였다. 궁벽한 시골이라 추모하는 마음도 없고, 숭봉하고자 하는 의론도 없다. 마을에서의 狀啓나 道의 監司가 올리는 글로 시간을 보낸 지가 오래되었으니 이 얼마나 큰 죄인가. 그런데 이번에 후손들이 그의 충성스럽고 절의에 열렬한 행적을 수집하고 엮어서 마을과 道에 공표하고 그를 기리는 계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그를 위한 祠宇를 세워 祭享는 공론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것은 하늘이 묵묵히 도와주는 것이고, 어둠이 다시 밝아지는 기회이니 사람과 신령이 오래도록 답답해하여 오던 마음을 펼치고, 영원히 그의 풍도를 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일이란 신중해야 하고, 또 일방적인 시각으로만 처리할 수 없다. 그래서 옥산서원의 여러분께 알리니 한목소리로 協贊을 해주고 빠른 회신을 보내주어 큰일을 잘 처리할 수 있게 해주면 고맙겠다는 말로 이 통문은 끝을 맺는다.
이 통문에 서명한 사람들의 姓氏를 보면 전체 39명 중에 李氏가 25명이다. 이는 이서우의 후손들, 즉 廣州李氏들의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이 이처럼 조상을 모시고자 하는 것은 근본을 잊지 말라는 儒學의 가르침에서 시작된 것으로 그것이 모든 행위의 근본이 되며, 곧 조상의 은혜에 보답하는 효도의 길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조상의 제향을 강조하는 까닭에 영구히 끊이지 않고 향사하는 불천위를 가졌거나 서원의 배향인물을 배출한 가문은 그 자체로 커다란 영광이자 명예였다. 그리고 그것은 향촌에서 행세할 수 있는 권위와 권력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불천위의 선조를 모시려고 하기도 하지만, 함부로 아무나 불천위로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비록 한 집안의 선조라 하더라도 불천위로 모시려고 할 때는 사회로부터 公議의 얻어야 하고, 또 공의를 얻기 위해서는 그 인물이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즉 사우에 제향되는 인물은 적어도 行義忠節이 일향의 모범이 되어야 하고, 서원에 제향되는 인물은 도학적 연원, 학문종사, 공적, 충절인 등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통문에서 이서우가 정구를 사사하여 학문의 연원과 맥락이 바르며, 병자호란 때 순사한 것을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 통문의 바람은 성사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이 된다. 泗陽書院는 1651년(효종 2) 정구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칠곡의 사수동에 창건되었다가 1664년(현종 5)에 石潭 李潤雨가 추배되었다. 그 후 1694년(숙종 20)에 지금의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리로 移建 되면서 松巖 李遠慶이 별사에 모셔졌다. 하지만 1864년(고종 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 지금의 이 통문은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난 뒤 이윤우의 사촌동생인 이서우를 추배하기 위해 유림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사양서당에 이서우의 위패가 모셔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당시 유림의 적극적인 호응이 부족했던 것이 아닌가하고 추정할 수 있다. 이는 본 통문에서도 나타난 것처럼 과거에도 이서우의 추배를 위해 향리나 도의 감사가 장계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성사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서우가 통문에서는 학문의 연원과 맥락이 바르고 충의가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 유림에서는 추배를 할 만큼의 업적을 쌓은 인물로 평가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일제치하임에도 불구하고 不遷位 享祀는 여전히 녹녹치 않은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자료적 가치
1920년을 전후로 하여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서원들이 속속 복원되거나 중건되었다. 그러면서 일족의 단합과 그 위세를 보이기 위해 새로운 불천위를 세우려는 노력들이 많았다. 이 통문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李瑞雨
李瑞雨는 본관이 廣州이고, 자는 茂卿이다. 그는 1584년(선조 17)에 태어났으며, 僉正 李光復의 둘째 아들이며, 石潭 李潤雨의 사촌동생이다. 그는 효성이 지극한 인물로 알려졌다. 11세에 아버지의 喪을 당하여 哀毁하기를 어른과 같이하였다. 인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병절교위를 지냈다. 그리고 鄭逑에게 사사하여 재주와 기량을 인정받았다. 병자호란 때는 군사 5백 명을 이끌고 상경하여 竹山 雙嶺 전투에서 힘을 다해 싸우다 殉死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中訓大夫 軍器寺 副正에 추증되었다.
『향촌의 유교의례와 문화』, 권삼문․김영순, 민속원, 2003
이병훈, 영남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6
『嶠南誌』卷之六,
하창환,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