己亥年 10월 15일, 龜岡書院에서 請額과 관련된 鄕會에 참석을 바라며 玉山書院에 보낸 答通文
[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이 통문은 己亥年 10월 15일 龜岡書院에서 玉山書院의 通文에 대한 回答으로 보낸 것이다. 이 통문의 서두에 “보내온 가르침은 잘 알겠습니다. 진실로 이것은 斯文의 경사이고, 士林의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請額을 하는데 있어 여러 가지 절차는 미리 서로 간에 논의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한 것을 통해 옥산서원에서 구강서원으로 보낸 통문의 내용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즉 구강서원에서 옥산서원으로 請額과 관련된 모종의 사실을 전하고, 그에 대해 옥산서원에서 자신들의 의견을 구강서원에 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구강서원에서는 옥산서원의 의견을 참고하여 그 해 10월 24일에 어느 서원(此院)에서 鄕會를 열기로 정하고 이를 이웃하는 東江書院에도 통고하였다고 통문에서는 말하고 있다. 이어서 통문은 향회가 열리는 날에 많이들 회의에 참석하고, 구강서원의 의견에 대해 옥산서원에서 인근의 여러 곳에 잘 말해주었으면 참으로 고맙겠다는 말로 끝을 맺고 있다.
이 통문만을 보면 발급된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다. 다만 구강서원이 1692년(숙종 18) 李齊賢의 影堂으로 건립되었다가 1707년(숙종 33) 지금의 곳에 이건하였고, 1732년(영조 8) ‘龜岡書院’란 현판을 걸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보면 이 문서의 발급 干支인 ‘己亥’는 1779년(정조 3) 또는 1839년(헌종 5) 둘 중 하나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 둘 중에 그 가능성은 전자가 훨씬 크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구강서원이 건립된 초기에 청액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럼 구강서원이 건립 초기에 벌였던 청액운동의 대강을 통해 이 통문의 간접적 내용과 서원의 여러 가지 상황을 추측해 보기로 한다.
구강서원은 1707년 서원의 이건이 마무리되자 곧바로 청액 작업에 착수하여 1724년(경종 4) 2월에 서원의 유생이 청액을 위해 상경했다. 이 시기는 현종~숙종 연간 이후 서원이 과다하게 설립되어 그 폐단이 심각하게 노출되면서 서원의 신설과 일체의 사액을 불허한다는 국가적 차원의 통제책이 강화되던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구강서원은 중앙정계에서 이미 그 세력을 잃은 남인계 서원이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사액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강서원에서 청액을 시도한 것은 賜額 여부가 그들의 향촌 내 생존권 확보와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17세기 중반이후 서원의 사회적 폐단이 잠차 노출되면서 이에 대한 제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국가에서는 제재의 강도를 더해 신설·첩설이 금지되는 등 원사훼철의 조짐이 엿보였고 실제로 1714년(숙종 40)에는 불법으로 건립된 원사에 대한 훼철 조치가 단행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서원에 대한 국가의 공인이라 할 수 있는 사액을 받기 위한 작업은 서원의 사활이 걸린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처럼 모든 서원이 사액을 받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만큼 그에 대한 제재 또한 엄격하여 1~2번의 청액으로 성사되는 경우는 드물었고, 여러 차례에 걸쳐 청액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실패하여 미사액으로 남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예외가 있었다. 그것은 이 시기 집권세력과 연결된 서원이었다. 따라서 당시에 사액을 받기 위해서는 중앙관료에 대한 사전 청탁활동과 이들을 통한 중앙정부의 분위기 파악이 필수적이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세력을 잃은 남인계 서원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던 구강서원은 1809년(순조 9) 마침내 사액의 기회를 잡게 되었다.
그 해 2월 향사의 모임에서 청액에 대한 의논을 모으고, 3월 12일 당시 서원의 원장이었던 본손 李奎五를 京中으로 보내 분위기를 탐지하는 한편, 중앙에 고위관료로 있는 재경 본손과 연결하여 청액의 문제를 논의하였다. 분위기가 무르익어 4월에 경주 사림의 통문이 태학에 도착하고, 성균관 유생들의 공의로 답통을 얻었다. 이어서 8월에는 구강서원의 京院長으로 鰲恩君 李敬一을 추대하여 청액의 일을 주선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청액을 위한 伏閤을 거행하려 했으나 때마침 松庵 李之詩의 시호를 청하는 복합이 진행 중인데다 중궁전에 해산일이 가까워져 부득이하게 미루어졌다. 복합이 미루어지는 사이 구강서원에서는 9월에 집회를 갖고 사림의 名帖을 거두었는데 이 청액소에 경상좌도 전역에 걸친 995명이 이 청액소에 연명하였다. 이 청액소를 가지고 10월 7일 돈화문 밖에서 마침내 복합하였다. 8일에는 이경일을 비롯한 李集斗, 李厚源 등이 승정원에 소청의 뜻을 전하였다. 그러나 승정원에서의 답변은 서원을 건립하거나 청액하는 소청은 국가의 금령과 관계되기 때문에 올릴 수 없고 또 별다른 변통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이집두가 재차 편지를 보냈지만 답서는 첫 번째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10일에 승정원의 서리가 請疏한 대표자를 불러 들어가니 임금께서 하교하시기를 “위로하고 타일러 돌려보내라.”고 했다고 하였다. 이에 즉시 복합을 거두고 물러나왔다.
구강서원에서의 청액은 설립 초기인 1724년부터 시작되어 받아들여지기까지 장장 85년이나 걸렸다. 그러나 청액이 사액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것은 어쩌면 세력을 잃은 남인계 서원으로서의 한계를 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액은 사원의 존립과 관계되는 일이기에 좌시할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이 통문은 바로 이러한 과정에서 향촌 사림의 여론을 수렴하여 사액을 받기 위한 노력의 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료적 가치]
자료적 가치
구강서원은 설립 초기부터 청액을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이 통문은 바로 청액하는 과정에서 구강서원이 향촌 사림의 여론을 수렴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으며, 직접적으로 도움을 준 서원과 활발한 교류가 있었던 서원이 어느 곳이었는지를 알게 하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사학보』, 이수환, 조선시대사학회, 2005
『경주이씨 양월문중 고문서자료집성』, 한국국학진흥원, 도서출판 성심, 2009
하창환,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