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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노봉서원(魯峯書院)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5+KSM-XF.1923.4777-20130630.Y1350101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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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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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이중수, 노봉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내신2길 301
작성시기 1923
형태사항 크기: 96.5 X 51
판본: 고문서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936년 노봉서원(魯峯書院) 통문(通文)
이 통문은 1936년 1월 노봉서원에서 권진을 비롯한 그 일문의 선현들을 숭봉하기 위해 계모임을 갖는데, 이를 양해해 달라며 옥산서원에 보낸 것이다. 노봉서원에서 추배하는 인물은 모두 넷이다. 먼저 권진세종 때 우의정에까지 오른 인물로 그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께서 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왕림하여 조곡을 하고, 삼일동안 조회를 보지 않았을 정도로 임금의 신임이 각별한 신하였다. 그리고 권진의 5세손인 권응시는 학행과 효행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사산감역관을 제수 받았다가 사헌부감찰, 공조좌랑, 호조좌랑, 군위현감, 양구현감 등을 거친 후 낙향하여 송학헌을 짓고 학문과 시작에 전념하여 문장과 학행으로 세상의 추앙을 받은 인물이다. 그의 사촌인 권응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집안의 종 30여 명과 재산을 내어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여러 전투에서 항상 선봉에 서서 싸웠으며, 최후의 전투에서는 중과부적에다 군수물자의 부족으로 패전에 몰리자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 없다며 세 차례나 적진에 뛰어들어 온몸이 성한 곳에 없을 정도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여 첨정에 추증되었다. 끝으로 권응성의 동생 권응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에게 “충효는 같은 것이니 형님은 의병으로 나라를 지키고 자신은 가문을 보존하겠다.”고 말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피란하였다. 피란 도중 왜적에 붙잡히자 “부모가 없는 자식은 없다. 너희에게 늙은 부모가 있어 나처럼 붙잡혔다면 어찌할 것이냐?”는 말로 왜적까지 감동시켜서 사람들로부터 ‘충효지문(忠孝之門)’이라 불렸다. 노봉서원예천에 세워진 안동권씨 문중의 서원으로 배향인물은 그 선조인 권산해이다. 이 통문은 권산해에 이어 노봉서원에서 추배할 인물들을 사림에 알리고 동의를 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인물들은 비록 도학적 연원이나 학문종사에 있어 기여한 사람들은 아니나, 공적이나 행의충절 또는 효행으로 일향의 모범이 되는 사람들이다. 이는 서원에서 배향하는 인물의 기준이 많이 완화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노봉서원이 이들을 배향하고자 하는 것은 1921년 서원을 재건한 이후 서원의 면모를 일신하고, 나아가 일족의 단결을 도모하려는 의도인 것으로 추정된다.
『향촌의 유교의례와 문화』, 권삼문·김영순, 민속원, 2003
이병훈, 영남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5
하창환,이수환

상세정보

1936년 1월, 魯峯書院에서 權軫 一門의 崇奉을 위한 修稧를 양해해 줄 것을 바라며 玉山書院에 보낸 通文
[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이 통문은 1936년 1월 魯峯書院에서 權軫를 비롯한 그 一門의 선현들을 崇奉하기 위해 계모임을 갖는데, 이를 양해해 달라며 玉山書院에 보낸 것이다. 그래서 이 통문은 이 계모임이 한쪽 士林에서 멋대로 숭봉하는 것이 아니라 道內의 여러 사람들에게 통고하여 특별히 살펴본 것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어서 노봉서원에서 받들려는 선현들이 어떤 治積이 있는가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먼저 권진世宗 때 높은 벼슬에 올라 법을 제정하는 일을 돕고, 黃喜許稠와 같은 선배들과 음악의 체계를 다듬었다. 그리고 반역의 무리들을 토벌하여 학문과 공로로 조정과 백성들로부터 큰 기대를 받았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세종께서 百官을 거느리고 친히 왕림하여 弔哭을 하고, 삼일동안 조회를 보지 않았다. 그리고 하사품을 賻儀로 내려 특별히 장례를 준비하게 하고, 장례가 끝나자 諡號를 추증하였다. 이처럼 권진에 대한 조정의 특별한 은전과 포상은 참으로 지극하였으나 사림에서 그를 받드는 도리는 지금도 서두르지 않고 있어 문제라고 통문은 지적하고 있다. 이어서 권진의 후손들은 端宗이 왕위를 양도하게 되자 南下하여 金陵에 터를 잡고 몇 세대동안 벼슬길에 나아갈 뜻이 없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零落하였으나 松鶴軒 權應時가 나와 文章과 學行으로 세상의 추앙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에는 權應聖가 의병을 일으켜 포로로 잡은 자가 많았으나 힘이 다하여 순절하니 포상과 追贈의 은전이 있었다. 그리고 그의 동생인 隱齋 權應期는 어머니를 모시고 피란을 갔다가 전쟁이 끝나 돌아와서는 자신의 거처에 ‘隱永’이라는 편액을 걸고는 은거하였다가 어머니의 상을 당해서는 시묘살이를 하였다. 이처럼 한 집안에 네 분의 先賢이 다섯 세대 사이에 나란히 아름다운 모습을 남긴 것은 참으로 성대한 것이라고 통문은 칭송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전쟁과 재앙이 연이어져 남긴 글들을 모두 잃어버려 자손들이 애통해 할 뿐만 아니라 사림 또한 원통히 여기는 바인데, 그의 후손들이 힘을 다해 약간의 재물을 마련하여 선조를 받들기를 도모하니 유생의 자리에 있는 자로서 어찌 좌시하며 남의 일처럼 구경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통문은 계모임의 마땅함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정한 날에 모여서 계모임을 갖고 선현을 숭봉할 바탕을 마련하려 하니 여러분들이 잘 헤아려 일을 도와주면 참으로 고맙겠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노봉서원예천에 세워진 안동권씨 문중의 서원으로 배향인물은 그 선조인 權山海이다. 이 통문은 권산해와 연관된 사람들로 노봉서원에서 추배할 인물들을 사림에 알리고자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먼저 권식권산해의 從祖父로 그를 가르친 스승이기도 한 사람이었다. 권식이 세상을 떠난 후에 그 일가는 금릉, 즉 지금의 김천으로 이주하였다. 그렇게 한 것은 바로 권산해의 당부 때문이었다. 권산해단종이 양위하자 세조의 부름에도 벼슬에 나아가지 않다가 단종의 복위운동이 실패로 끝나 그 주모자들이 참형되자 그 자신도 누각에 올라 투신자살하였다. 그가 투신자살하기 전에 자신에게 학문을 배운 조카 權世豪에게 시골로 내려갈 것을 권유하였다. 이 통문에서 단종이 양위하자 재앙을 피해 금릉에 자리를 잡고 벼슬길에 나아갈 뜻이 없었다는 것은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그 이후 처음으로 벼슬에 나아간 것은 권세호의 손자인 권응시이다. 그는 학행과 효행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四山監役官을 제수 받았다가 사헌부감찰, 공조좌랑, 호조좌랑, 군위현감, 양구현감 등을 거친 후 낙향하여 松鶴軒을 짓고 학문과 詩作에 전념하였다. 이 통문에서 그가 문장과 학행으로 세상의 추앙을 받았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의 사촌인 권응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집안의 종 30여 명과 재산을 내어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여러 전투에서 항상 선봉에 서서 싸웠으며, 최후의 전투에서는 중과부적에다 군수물자의 부족으로 패전에 몰리자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 없다며 세 차례나 적진에 뛰어들어 온몸이 성한 곳에 없을 정도로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이 통문에서 힘이 다하여 순절했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끝으로 그의 동생 권응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에게 “충효는 같은 것이니 형님은 의병으로 나라를 지키고 자신은 가문을 보존하겠다.”고 말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피란하였다. 피란 도중 왜적에 붙잡히자 “부모가 없는 자식은 없다. 너희에게 늙은 부모가 있어 나처럼 붙잡혔다면 어찌할 것이냐?”는 말로 왜적까지 감동시켰다. 이 통문에서 한 집안 네 분의 선현이 다섯 세대 사이에 나란히 아름다운 모습을 남겼다는 것은 이들의 행적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이 통문은 서원의 두 기능 중에 하나인 선현의 제향을 위한 것이다. 이는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儒學의 이념에서 비롯된 것으로 조상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는 의미에서 모든 행위의 근본이 된다. 이처럼 제향을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영구히 끊이지 않고 향사하는 불천위의 조상을 가졌거나 서원의 배향인물을 배출한 가문에는 커다란 영광이자 명예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아가 그러한 존재는 그 가문뿐만 아니라 후손들의 명예와도 직결되었다. 그래서 모든 가문이나 후손들이 자신의 선조가 불천위나 배향의 인물로 선택되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불천위나 배향의 인물이 사회적으로 이처럼 중요하기 때문에 아무리 자신의 조상이라고 해도 함부로 불천위나 배향의 인물로 만들 수 없었다. 그것은 반드시 사회로부터 公議를 얻어야 했다. 이 통문에서 새롭게 제향할 권진을 비롯한 세 사람의 행적을 알리고, 그들을 숭봉할 계모임을 받아들여줄 것을 당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런데 서원이 설립될 초기에는 배향인물의 기준이 아주 엄격했다. 그것은 도학적 연원, 학문종사, 공적, 충절인 등의 조건들을 두루 갖추어야 했다. 하지만 서원의 설립이 많아지면서 배향인의 첩설과 남설이 생겨나고, 그 기준 또한 과거처럼 그렇게 엄격하지 않았다. 18~9세기가 되면 功績이나 行義忠節 또는 孝行만으로도 배향인물에 선정되었다. 이 통문에서 보는 것처럼 권진, 권응시, 권응성, 권응기와 같은 인물을 노봉서원에서 제향하겠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러한 완화된 기준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노봉서원이 이들을 배향하고자 하는 것은 그 서원이 안동권씨 문중의 것이고, 바로 자기 선조의 선양이 자신들의 권위와 명예에 직결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자료적 가치
노봉서원1866년(고종 3)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이후 陶山書院, 屛山書院, 易東書院, 虎溪書院와 도내 유림이 중심이 되어 1921년 재건되었다. 이 통문은 노봉서원이 서원을 재건한 이후 안동권씨 문중의 선현을 추배함으로써 서원의 면모를 일신하고, 나아가 일족의 단결을 도모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할 수 있다.
『향촌의 유교의례와 문화』, 권삼문·김영순, 민속원, 2003
이병훈, 영남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5
하창환,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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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936년 노봉서원(魯峯書院) 통문(通文)

通文
右文爲通諭事伏以生等以文景公敬齋權先生修稧事齊會本堂不但一方士林之所擅奉告道內 僉君子特垂察焉恭惟我
先生際遇英陵位躋之躔黼黻▣猷恊贊憲章與黃翼成許文敬諸先輩 删定樂律討平不軌▣學勳業朝野猗望及卒于
京第 世廟率百官親臨弔哭掇朝三日賻錫特備葬也致祭贈諡朝家之特典襃彰極加至矣而士林崇奉之道尙今未遑吾
黨之欠事逮▣中葉適値 莊陵遜位之日以宮闈之親避禍南下奠接於金陵之壯嚴連世無意仕進子姓零替歎切誰昔天
佑古家五世而挺出松鶴軒位潛卽暑文章學行爲世推重許眉叟李歸巖兩先生弁跋遺集章章可考後當龍蛇之亂僉
隱齋兩公孝友於天忠義援萃倡起義旅虜獲甚多勢窮殉節至蒙褒贈之典其弟隱齋公奉母避亂嘗曰蜀山九
折陽孝尊忠易地之則然矣所以自請靑鳬及其妖氣廓淸還奠故里扁齋以隱永矣鞱悔之志也後及內艱廬墓終制噫忠孝學行天
地間氣數之流行而一室四賢並美於五世之間者若是其猗歟盛哉不倖運▣陽九兵燹懷襄荐連文籍蕩失無餘非但雲耳之
茹痛士林之共爲齎欝者也本孫之爲拮捩若干物以圖奉先之許與在章甫之列者豈可坐視秦瘠乎玆以指日齊會聯各修稧永爲從
後尊奉之資伏想 僉尊秉彛好德之衷亦無異同矣惟願同聲相應財擇而敦事焉千萬善甚
右文通
玉山書院
丙子正月 日 魯峯書院上有司幼學 李中洙
齋有司 柳泰榮
朴英洙
製通前主事 李炳華
幼學 李鍾洙
張大湜
權相圭
寫通幼學 鄭載厚
朴大植
前參奉 李淳學
幼學 權鍾一
會員幼學 李敎夏
張鎬文
權尙渭
鄭柱轍
朴萬鎭
權德遠
前郡守 張龍煥
幼學 李聲敎
丁奎璉
權容默
金斗演
尹柄章
宋冕求
趙世永
權泰鴈
韓九鉉
前郡守 李敦英
幼學 朴魯淳
金相鎭
權五成
權重錘
權容學
林泰鎭
權載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