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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사양서당(泗陽書堂)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5+KSM-XF.1923.4777-20130630.Y135010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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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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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이봉환, 이규환, 이수기, 사양서당
작성지역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동 서원길 15-10
작성시기 1923
형태사항 크기: 58 X 76.7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936년 사양서당(泗陽書堂) 통문(通文)
이 통문은 1936년 사양서당이서우의 문집의 발간을 계획하고, 이 사실을 옥산서원에 알려 호응과 협찬을 해줄 것을 당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통문에 따르면 이서우정묘년(1627)병자년(1636)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왕을 호위할 군대에 나아갈 때 그의 어머니는 채색의 실로 군복을 수놓으며 “너는 이제 나에 대한 효성을 옮겨 임금에게 충성을 다할 때이다.”하고 말하자, 그는 절을 하며 그 명을 받들고 전장에 나갔다. 그런데 군대를 이끌던 두 명의 절도사가 이서우의 계책을 쓰지 않아 쌍령에서 패퇴하여 4만의 군사가 한꺼번에 몰살하는 참화를 당했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이서우는 혼자 우뚝 서서 북쪽 하늘을 쳐다보며 맹세하기를 “대장부가 적을 토벌하는데 이기지 못하면 마땅히 나라를 위해 죽을 뿐 어찌 구차하게 살기 위해 의로움을 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혼자 활시위를 당겨 적군의 칼날을 무릅쓰고 연이어 활을 쏘아 수많은 적군을 죽였으나, 마침내 화살과 힘이 다하여 순사하였다. 이서우의 이러한 행동은 안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아버지의 의열과 충성을 다하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잇고, 밖으로는 사촌형인 석담 이윤우을 스승으로 받들며 배운 천인의 성명과 대륜, 그리고 대경에 대한 식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본 통문은 밝혔다. 이서우의 이러한 공적에 대해 위에서는 추증과 포상의 은전이 있었으나, 아래에서 그의 제사를 받들고 남긴 글을 전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후생들이 이서우에 대한 옛날의 기록들, 여러 선생들이 그에 대해 쓴 글들, 그리고 새롭게 편집한 글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후세에 전하고자 하니 옥산서원에서 협찬하여 주면 참으로 고맙겠다는 내용의 통문이다.
이 통문에 연명한 사람들을 보면 광주이씨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이서우가 광주이씨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1930년대의 칠곡에 거주하는 광주이씨들이 자신들의 선조인 이서우를 선양하기 위해 문집을 간행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영남의 재지사족이 자신들의 조상을 선양하는 사업을 시작한 것은 이미 조선후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중앙정계로의 진출이 극히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말미암아 영남의 재지사족들은 그들의 마지막 보루인 향촌의 지배에 더욱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수단이 이 통문에서 보이는 것처럼 선현의 문집을 간행하거나, 향사 또는 사당이나 정자의 건립 등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그들의 신분적 정통성을 입증하는 한편, 향촌에서의 지배를 정당성을 확보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영남의 유림에서 이러한 사업들을 경쟁적으로 벌인 가장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이 통문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조선후기부터 시작된 선현의 추모 사업을 통한 재지사족의 향촌지배가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통문이 발행된 1936년은 나라의 주권이 이미 일제에 넘어간 상태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이 시기에 있었던 선현에 대한 추모 사업은 향촌지배라는 이전의 시각과는 다른 시각에서의 접근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李樹健敎授停年紀念 韓國中世史論叢』, 權五榮, 論叢刊行委員會, 2000
『廣州李氏漆谷派世譜』, 廣州李氏漆谷派世譜編纂委員會, 1986
『漆谷郡誌』, 칠곡군, 1994
『國譯 漆谷誌』, 칠곡문화원, 2002
하창환,이수환

상세정보

1936년 9월 9일, 泗陽書堂에서 李瑞雨의 문집을 발간하니 玉山書院이 협찬해 줄 것을 당부하는 통문
[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이 통문은 1936년 泗陽書堂李瑞雨의 문집의 발간을 계획하고, 이 사실을 玉山書院에 알려 호응과 협찬을 해줄 것을 당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통문은 먼저 義를 취하여 仁을 이룩하는 것은 사람으로서 지닐 수 있는 위대한 절개로 도리라 할 수 있으며, 나라에서 충성스럽고 절개에 열렬한 사람을 포상하고 빛내는 것은 태평한 시대의 성대한 儀式으로 풍속을 권면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통문의 서두를 이렇게 시작하는 것은 그에 합당한 인물이 장차 사양서당에서 문집을 발간할 이서우이기 때문이다. 통문에 따르면 이서우정묘년(1627)병자년(1636)仁祖가 남한산성에서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왕을 호위할 군대에 나아가려 하였다. 이때 그의 어머니는 채색의 실로 군복을 수놓으며 “너는 이제 나에 대한 효성을 옮겨 임금에게 충성을 다할 때이다.”하고 말하자, 그는 절을 하며 그 명을 받들고 전장에 나갔다. 그런데 군대를 이끌던 두 명의 절도사가 이서우의 계책을 쓰지 않아 雙嶺에서 패퇴하여 4만의 군사가 한꺼번에 몰살되는 참화를 당했다. 그러한 와중에서도 이서우는 혼자 우뚝 서서 북쪽 하늘을 쳐다보며 맹세하기를 “대장부가 적을 토벌하는데 이기지 못하면 마땅히 나라를 위해 죽을 뿐 어찌 구차하게 살기 위해 義를 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혼자 활시위를 당겨 적군의 칼날을 무릅쓰고 연이어 활을 쏘아 수많은 적군을 죽였으나, 마침내 화살과 힘이 다하였다. 하지만 기개는 오히려 산처럼 우뚝하여 적을 향해 큰소리로 욕설을 퍼부으며 끝까지 저항하였다. 통문은 이서우의 이러한 영웅적 행동을 기술하고 나서, 당시의 충신과 열사 가운데 척화를 주장하며 순절한 사람이 있기는 하였으나 전장에서 이 같은 용기를 보인 사람은 없었다고 말한다. 이어서 이서우의 가계가 어떠한가를 기술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이서우는 안으로 倡義한 아버지의 義烈과 충성을 다하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잇고, 밖으로는 사촌형인 石潭 李潤雨을 스승으로 받들어 天人의 性命과 大倫, 그리고 大經에 대한 식견이 깊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장과 같은 위급한 때에도 지켜야 할 바를 바꾸지 않고 조용히 목숨을 버리고 義를 취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서우의 이러한 공적에 대해 위에서는 追贈과 褒賞의 은전이 있었으나, 아래에서 그의 제사를 받들고 남긴 글을 전하는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던 후생들이 이서우에 대한 옛날의 기록들, 여러 선생들이 그에 대해 쓴 글들, 그리고 새롭게 편집한 글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후세에 전하고자 한다. 이에 옥산서원의 여러분께서 한목소리로 협찬하여 특별히 회신을 보내주면 참으로 고맙겠다는 말로 본 통문은 끝을 맺고 있다.
사양서당에서 예정하고 있는 이서우의 문집 간행은 전통적으로 향교가 가지는 두 가지 기능, 즉 선비를 양성하는 교육적 기능과 선현의 추모를 통해 성리학의 이념을 구현하는 실천적 기능 중 후자에 속한다. 그런데 향교에서 벌이는 이와 같은 선현의 추모 사업은 외형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단순한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향촌사회의 실제적 지배라는 보다 현실적인 문제가 얽혀 있다. 이 통문에 연명한 사람들을 보면 廣州李氏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것은 이서우가 광주이씨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1930년대의 漆谷에 거주하는 광주이씨들이 자신들의 선조인 이서우를 宣揚하기 위해 문집을 간행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영남의 재지사족이 자신들의 조상을 선양하는 사업을 시작한 것은 이미 조선후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중앙정계로의 진출이 극히 제한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으로 말미암아 영남의 재지사족들은 그들의 마지막 보루인 향촌의 지배에 더욱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수단이 이 통문에서 보이는 것처럼 선현의 문집을 간행하거나, 享祀 또는 사당이나 정자의 건립 등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그들의 신분적 정통성을 입증하는 한편, 향촌에서의 지배를 정당성을 확보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영남의 유림에서 이러한 사업들을 경쟁적으로 벌인 가장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이 통문이 우리에게 示唆하는 바는 조선후기부터 시작된 선현의 추모 사업을 통한 재지사족의 향촌지배가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통문이 발행된 1936년은 나라의 주권이 이미 일제에 넘어간 상태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이 시기에 있었던 선현에 대한 추모 사업은 향촌지배라는 이전의 시각과는 다른 시각에서의 접근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자료적 가치]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문집을 간행하여 선현을 추모하려는 목적을 가진 통문으로서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이러한 통문은 이전의 향촌지배라는 목적을 가진 선현 추모 사업의 통문과는 다른 시각에서의 분석과 연구가 필요한 자료이다.
李瑞雨(1584~1637)
이서우의 자는 茂卿이며, 본관은 廣州이다. 그의 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宣武原從功臣三等에 이름을 올렸다가 병조참판에 추증된 李光復이며, 그의 사촌형은 석담 이윤우이다. 이서우는 인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용양위 병절교위, 부사과 등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오랑캐에게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영군 500명을 거느리고 겨울의 춥고 고된 행군 끝에 경기도 竹山(지금의 안성 부근) 쌍령에 도착하여 아군에 합류하였다. 그런데 아군의 지세가 전투에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진지를 옮길 것을 건의하고, 아울러 화약의 공급이 원활치 못하기에 이의 시정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37년 1월 3일 적군의 기습에 맞서 이서우는 고군분투하였으나 아군의 화약 부족으로 결국 패전과 함께 순사하였다. 그 후 이서우중훈대부 군기시 부정에 추증되었다.
『李樹健敎授停年紀念 韓國中世史論叢』, 權五榮, 論叢刊行委員會, 2000
『廣州李氏漆谷派世譜』, 廣州李氏漆谷派世譜編纂委員會, 1986
『漆谷郡誌』, 칠곡군, 1994
『國譯 漆谷誌』, 칠곡문화원, 2002
하창환,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936년 사양서당(泗陽書堂) 통문(通文)

通文
右通諭事伏以取義成仁人民之大節而可以綱常乎一國褒忠彰烈昭代之盛典而可以風勵乎百世則凡我好
尙彛天攸同豈可以古今之異而有所湮滅哉恭惟我
朝鮮節士秉節校尉副正李公粵在丙丁我 憲文王南漢之圍也奮起敵愾從勤王之師臨行母夫人以綵線繡
戰袍曰汝今移孝盡忠之秋也公拜辭謹奉命矣及二節度以不用公之籌策雙嶺四萬軍一時敗沒公獨植立不動北首誓天曰
大丈夫討賊不勝則當殉國而後已豈可偷生忘義乎乃隻手張弓冒白刃連射自若所殺甚衆及矢與力盡氣猶山聳大罵不屈而立
强手持節面如生英風凜凜嗚呼當時忠臣烈士斥和殉節者或有之裏革之志戰陣之勇則未有如此其壯也盖公以文武之才內而承先
公倡義之烈賢母盡忠之訓外而陪從兄石潭先生立雪干淵上累蒙先師之獎許而凡於天人性命大倫大經有所見得者深故不變所守於
急難之際而從容舍取如是則若公者可謂忠孝兩全而從師學問之力尤不可誙也然 上有贈褒之典輝暎史乘而下無崇奉之禮未克
俎豆且逸遺文之可傳遂使毅蹟湮鬱於數百載之下豈非後生曠慨興嗟者耶只蒐舊錄諸家巨筆及新輯僅合爲一卷將謀壽世庶
可與韓文公敍巡遠傳並美於來後歟噫今闡揚之道不越乎文字而慕義之衷則又無遠邇玆因堂會聯控 伏願 僉尊同聲恊贊特
賜回音以扶植叔季倫綱千萬吾道幸甚
右文通
丙子九月九日泗陽書堂會中
堂長 李健鎬
有司 李錫轍
尹炳弼
製通 李鳳煥
李相驊
寫通 李徽基
宋夬翼
會員 孫曾憲
李壽敬
尹炳周
李哲淵
李在榮
李相說
李元栻
金仁洛
李大榮
李相晋
李相駿
柳道昇
李重煥
李圭煥
李家鎬
李龍煥
趙性福
李榮錫
李宗煥
李元淵
李相駉
鄭之麟
韓炳勳
李康錫
李壽烈
鄭之純
李相銀
李箕煥
李周彦
李相琦
李元龜
李相百
琴錫命
李壽麒
李秉淵
尹炳斗
李相彪
李壽穆
李緯鎭
李相立
李聖鎭
李庚煥
姜信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