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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영해향교(寧海鄕校)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5+KSM-XF.1923.4777-20130630.Y135010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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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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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박재헌, 영해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예주8길 14-5
작성시기 1923
형태사항 크기: 52.4 X 86.2
판본: 고문서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

안내정보

1923년 영해향교(寧海鄕校) 통문(通文)
이 통문은 영해향교1923년 2월 19일 동학사 숙모전에서 단종 때의 충신인 오봉 권책을 추향하는 행사를 거행하니 옥산서원에서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달라고 보내온 통문이다. 권책권자홍의 세 아들 중 막내이며, 그의 당고모는 문종비 현덕왕후이고, 백부는 충장공 권자신으로 단종과는 외척의 관계이다. 그런데 권자신1455년과 1456년 사이에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일을 꾸미다 발각되어 위로 두 형까지 모두 사형을 당했으나, 권책만은 나이가 어려 영해로 유배되어 겨우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권책은 자신의 이러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단종이 승하하자 북쪽을 향해 통곡하고, 단종 복위를 도모하던 금성대군영주 순흥으로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하자 유배지인 죽령을 향해 눈물을 흘렸다. 이러한 권책의 행동은 백이숙제처럼 지조를 지켜 현세와 영합하지 않은 충신으로 만세의 귀감이 되는 생육신이나 사육신과 다름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생육신과 사육신은 모두 뭇사람의 칭찬과 보은의 제사를 받았지만, 권책에게만은 그러한 은전이 주어지지 않아 영해의 후생들은 탄식하며 여한을 품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충청도의 유생이 여러 가지로 호의를 베풀어 동학사 숙모전에서 추향하게 되었다는 내용의 통문이다.
이 통문은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영남의 유림이 선현의 향사, 그리고 현조나 스승, 또는 이름난 선현들의 문집의 간행, 사당이나 정자의 건립을 통해 자신들의 신분적 정통성을 입증하는 한편, 향촌에서의 지배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는 계기를 만들려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통문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조선후기부터 시작된 선현의 추모 사업이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지속되고 있으며, 당시의 향교가 재지사족들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집결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李樹健敎授停年紀念 韓國中世史論叢』, 權五榮, 論叢刊行委員會, 200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하창환,이수환

상세정보

1923년 2월 9일 寧海鄕校東鶴寺 肅慕殿에서 五峯 權策의 追享을 거행하니 참석해달라고 玉山書院에 보낸 通文
[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寧海鄕校에서는 1923년 2월 19일 端宗 때의 충신인 五峯 權策충청남도 공주에 있는 東鶴寺 肅慕殿에서 追享하는 행사를 거행하기로 하였다. 이에 영해향교玉山書院에 통문을 보내 본 행사에 참석해 줄 것을 당부하고 있다. 통문에 따르면 권책단종과는 외척의 관계로 忠莊公 權自愼의 조카이다. 그런데 권자신世祖가 즉위한 1455년과 그 이듬해인 1456년 사이에 단종을 복위하려는 일을 꾸미다 발각되어 권씨 일가는 멸문의 화를 입게 되었다. 하지만 권책만은 당시 나이가 어려 사형을 면하고 寧海로 유배되어 겨우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권책은 자신의 이러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단종에 대한 충성으로 분개하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세조의 엄중한 감시에도 단종이 승하하자 북쪽을 향해 통곡하고, 단종 복위를 도모하던 錦城大君榮州 順興으로 유배되었다가 죽임을 당하자 유배지인 竹嶺을 향해 눈물을 흘렸다. 권책이 분노하여 울부짖음에 천지가 노여워하고, 원통하여 눈물을 흘림에 귀신이 슬퍼할 만큼 꿋꿋하고 평생토록 품은 血誠은 한결같았다. 오직 옛 임금만이 있음을 알고 伯夷叔齊처럼 지조를 지켜 현세와 영합하지 않았다. 따라서 권책은 의로움에 목숨을 내어맡기고 절개를 지킨 신하로 만세의 귀감이 되는 生六臣이나 死六臣과 다름이 없다고 할 것이다. 그의 자취를 보면 그의 생은 생육신의 삶을 살고, 그의 마음은 사육신의 죽음을 실천하였다. 그런데 생육신과 사육신은 모두 뭇사람의 칭찬과 보은의 제사를 받았지만, 권책만은 그러한 은전이 주어지지 않아 영해의 후생들은 탄식하며 여한을 품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충청도의 유생이 여러 가지로 호의를 베풀어 동학사 숙모전에서 권책을 추향하게 되었다. 이에 옥산서원에서 참석하여 큰 행사를 빛내주었으면 좋겠다는 말로 이 통문은 끝을 맺었다.
영해향교에서 거행하는 권책의 추향은 전통적으로 향교가 가지는 두 가지 기능, 즉 선비를 양성하는 교육적 기능과 선현의 추모를 통해 성리학의 이념을 구현하는 실천적 기능 중 후자에 속한다. 그런데 향교에서 벌이는 이와 같은 선현의 추모 사업은 외형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단순한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향촌사회의 실제적 지배라는 보다 현실적인 문제가 얽혀 있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영남의 유림은 중앙정계로의 진출이 극히 제한되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말미암아 영남의 재지사족들은 그들의 마지막 보루인 향촌의 지배에 더욱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수단이 이 통문에서 보이는 것처럼 선현을 享祀하거나 顯祖나 스승, 또는 이름난 선현들의 문집을 간행하거나, 아니면 그들의 사당을 건립하고 정자를 세우는 등의 사업이었다. 이러한 일들은 그들의 신분적 정통성을 입증하는 한편, 향촌의 지배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영남의 유림에서 이러한 사업들을 경쟁적으로 벌인 가장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이 통문이 우리에게 示唆하는 바는 조선후기부터 시작된 선현의 추모 사업을 통한 재지사족의 향촌지배가 20세기에 들어와서도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통문이 발행된 1932년이 되면, 향교가 일제에 의해 그 동안 명분상으로나마 명맥을 유지해 오던 교육적 기능은 박탈당하고 단지 선현에 봉사하는 사회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만을 수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통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여전히 선현의 추모 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것은 그것이 향촌지배라는 당초의 목표를 거두고 있는지는 앞으로의 연구에 의해서 밝혀야 할 것이지만, 향교는 여전히 재지사족들이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집결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이 발행된 시기는 1932년으로 일제에 의해 향교의 위상이 크게 위축되어 있던 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교의 이름으로 선현의 추모 사업이 여전히 시행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 통문은 일제강점기에 향교의 기능이 어떠했으며, 재지사족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향교를 통해 어떤 일들을 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肅慕殿
권책의 추향이 거행된 동학사의 숙모전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계룡산의 동학사 경내에 있는 端宗과 그에 충성한 신하들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다. 1456梅月堂 金時習은 사육신의 시신을 장례 지낸 뒤 三隱, 즉 圃隱 鄭夢周, 牧隱 李穡, 冶隱 吉再를 모시는 三隱閣 옆에 단을 만들고 제사를 지냈다. 그로부터 2년 뒤 世祖동학사에 들렀다가 자기로 인해 죽은 280명을 招魂閣에 모시도록 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동학사 숙모전에서 권책의 추향을 거행한다는 것은 뒤늦게나마 그가 생육신이나 사육신과 같이 추모를 받을 만한 충신으로 인정된 것으로 간주한다는 의미가 내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곳은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65호로 지정되었다.
『李樹健敎授停年紀念 韓國中世史論叢』, 權五榮, 論叢刊行委員會, 200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하창환,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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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영해향교(寧海鄕校) 통문(通文)

通文
右通諭事伏以義理或屈於一時而公議乃定於百世鄙鄕故 莊陵遺臣五峯先生權公諱策之事可見也盖先生卽我 端廟外戚之臣而忠莊權公諱自愼
之從子也景泰乙丙之間權氏一家盡被復辟之禍而先生獨以年未滿坐謫寧海僅全性命於刀鋸湯鑊之餘而其危忠孤憤往往有掩諱不得者若王嚴之北
望痛哭爲 端廟之昇遐也竹嶺之西向流涕爲錦城之被戮也至於憤號天地怒寃泣鬼神悲之句讀之凛然亦足以想仰其平生腔血斷斷乎惟知有舊
君而不與天下宗周也於乎君臣之義天之經地之義而人之大倫也以故當日死義秉節之臣有如生死六臣諸公卓然爲萬世人臣之勸而肺腑懿親又有如
先生焉盖先生之跡乃生六之生而先生之心實死六之死也生死六臣俱膺褒獎報祀之典而先生獨不與焉 其爲齎咨抱恨豈但生等之添列鄕後生而已哉
何倖湖中章甫爲是慨然量時度義準禮稱情將以今十九日追享於東鶴 肅慕殿懿親從祀之班竊計秉彛同好之地在所樂聞而從事故謹此仰告伏
願 僉尊特賜 尊諭幷爲光臨以賁大事千萬倖甚
右通通
玉山書院
癸亥二月初九日鄕校會員 南朝演
李壽昊
朴命源
白淳憲
朴元燦
田在九
李晩基
朱永魯
南敎載
朴啓植
南孝舜
朴瑾燦
南孝河
白淳熹
田命九
朴鍾千
南孝求
鄭應奎
南孝臣
申東洛
朴建鎬
李秉鎬
南孝準
金相洛
李善敎
朴世燦
田相齊
製通 南朝馹
李裕載
白淳愚
朴載憲
寫通 李秉均
南孝仁
朱永欽
朴載昶
公事員 朴泰鍾
申秉源
南浩直
白南璹
曹司 李昌熙
朴載坤
南秉模
李炳國
白淳牧
朴永鎭
直日 南義淳
李相敎
申萬源
朴元鍾
南孝埰
直員 南孝相
齋任 朴載寅
權燦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