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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선산(善山) 원회당(遠懷堂)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5+KSM-XF.1918.4713-20130630.Y135010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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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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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김제휴, 김찬주, 원회당
작성지역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 생곡리 유학길 136-21
작성시기 1918
형태사항 크기: 59.5 X 66.3
판본: 고문서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918선산 원회당에서 경주 옥산서원으로 보낸 통문
이 통문은 선산 원회당에서 수암 정선생의 위패를 다시 모시려 하니 이에 의견을 함께 해달라고 옥산서원에 보낸 것이다. 본문을 보면, 수암 정사진여헌 장현광의 문하에서 후학을 깨우쳐 인도한 빼어난 제자이기에 당시에는 경주군 죽남면 입암리입암서원에서 수암을 배향해야 한다는 것이 모두의 공론이어서 그렇게 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도중에 영천 대창면 직천리직천서원으로 옮겨가 봉안하게 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사정에 따라 그렇게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배향을 거두고 난 후 그 봉안한 곳에서 문제가 생겨서 사림에서는 지난 일을 생각하고 안타깝게 여겼다. 이에 원회당에서는 배향일에 수암을 다시 모셔오기로 계를 만들어 발의하고, 원근의 모든 선비들이 이에 동의하였으니 옥산서원에서도 이 의견에 동의해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이병훈,이수환

상세정보

1918遠懷堂에서 守庵 鄭四震의 위패를 봉안하기 위하여 玉山書院 儒生들의 동의를 구한다는 내용의 通文
[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이 통문은 善山 遠懷堂에서 守庵 鄭先生의 위패를 다시 모시려 하니 이에 의견을 함께 해달라고 玉山書院에 보낸 것이다. 내용을 보면, 守庵 鄭四震旅軒 張顯光의 문하에서 후학을 깨우쳐 인도한 빼어난 제자이기에 당시에는 경주군 죽남면 입암리立巖書院에서 守庵을 배향해야 한다는 것이 모두의 公論이어서 그렇게 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도중에 영천 대창면 직천리稷川書院으로 옮겨가 봉안하게 되었는데, 이는 당시의 사정에 따라 그렇게 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배향을 거두고 난 후 그 봉안한 곳에서 문제가 생겨서 사림에서는 지난 일을 생각하고 안타깝게 여겼다. 이에 遠懷堂에서는 배향일에 守庵을 다시 모셔오기로 修稧하고 발의하여 원근의 모든 선비들이 이에 동의하였으니 옥산서원에서도 이 의견에 동의해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서원에 배향된 인물의 위패를 옮기는 일은 斯文의 大事이기에 유림들의 동의가 필수적이었다. 특히, 옥산서원은 처음 수암을 제향하였던 입암서원의 행정소재지인 慶州수암의 고향이자 직천서원이 속한 永川을 아우르는 首院이었기에 이들의 동의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善山수암의 스승인 여헌의 고향이라는 연고 외에는 수암과의 접점을 찾기 어렵다. 18세기 초에 직천서원으로 位遷한 것은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후손들의 강력한 요청과 수암의 獨享之所라는 것이 크게 작용하였다. 현재 수암의 위패는 포항시 죽장면 입암서원경주 안강읍 대동리로 옮겨 건립한 직천서원에 제향 되어있다. 정확한 원인을 알 수는 없지만 당시 수암의 위패는 옮겨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짐작컨대 선산원회당여헌의 영정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이곳으로 옮겨올 경우 獨享이 아닌 從享位로 될 뿐만 아니라 거리상 후손들의 출입도 어려웠기 때문으로 보인다. 옥산서원의 대답 또한 알 수 없지만 연일정씨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만큼 位遷에 대한 의견을 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원사의 위패를 옮기는 일은 一鄕 사림의 公議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 이를 어겼을 때에는 儒林의 질타를 받았다. 그렇기에 일을 진행하기 전에 儒會를 통해 의견을 수렴하고, 통문을 돌려 동의를 구하였다. 그러나 타읍의 원사에 제향된 인물의 위패를 옮겨 올 때는 해당 고을 사림과 후손들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특히 名望높은 인사일 경우에는 그만큼 이해를 구해야하는 범위가 확대되었다. 이 자료는 수암 정사진의 위패를 옮기는 일에 대한 구체적인 과정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일정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
遠懷堂善山影堂의 강당명이다. 선산영당旅軒 張顯光의 影幀을 봉안하여 제사를 봉행하는 곳으로 1605년(선조 38)에 遠懷堂을 낙성한 후 1643년(인조 21)에 有儼祠를 건립하여 영정을 봉안하고 향사하였다. 이후 1866년(고종 5)에 훼철되었는데, 1933년에 영당을 중건하여 여헌의 생신일인 (음)정월 22일에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 稷川書院守菴 鄭四震(1567∼1616)을 獨享하는 곳으로, 1711년(숙종 37) 永川稷川에 건립하였다가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것을 1979년 후손들이 경주시 안강읍 대동리에 重建하였다. 立巖書院1657년(효종 8)에 張顯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13년(숙종 29)에 鄭四震을 추가배양하고. 그 뒤 權克立·鄭四象·孫宇男을 추배하였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13년에 강당이 복원되고, 1974년에 廟宇가 복원되었다. 묘우에는 장현광을 主壁으로 좌우에 권극립·정사상·손우남·정사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입암서원과 그 부속 건물로 1605년에 설립된 日躋堂, 1609년에 설립된 萬活堂 등은 ‘입암서원 일원’이라는 명칭으로 경상북도 기념물 제70호로 지정되어 있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이병훈,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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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918년 선산(善山) 원회당(遠懷堂) 통문(通文)

通文
右文爲通諭事伏以尊賢衛道士林之秉彛也尙德寓慕吾黨之先務也惟我
守庵鄭先生以 旅門高弟啓迪後學而當日巖院之配享特出遠邇之公論中年稷川之移奉寔綠事變
之權處而奧自撤享之後尙欠寓誠之所其在士林尊衛之道烏可無追徃慨恨之志乎玆於遠懷堂
享之日峻發修稧之議而遠近章甫一聲同辭則竊想 貴院衿紳亦必有同情相應之義矣伏望
僉尊另各參敦之地千萬幸甚
右文通
玉山書院僉座下
戊午正月二十二日善山遠懷堂 堂長 金濟休
有司 金瓚周
朴永鴻
會員張有遠
張珽遠
金衡遠
金濟恒
張奎煥
尹源一
金秉和
鄭圭錫
張閏鉉
洪選華
盧鎭岷
金昌奎
朴濬鎬
張志和
尹琪錫
康駿然
金時建
張道相
鄭宗旭
柳享烈
朴奎琮
鄭演學
康道然
金成模
崔必基
盧萬永
洪基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