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1906년 임천서당(臨川書堂)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5+KSM-XF.1906.4777-20130630.Y1350101050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김도화, 김경락, 김두병, 임천서당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호암2길 27
작성시기 1906
형태사항 크기: 83 X 51.8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906년 임천서당(臨川書堂) 통문(通文)
이 통문은 1906년 11월 1일 임천서당옥산서원에 보낸 것으로 그 내용은 하위지의 관향과 호가 잘못되었다고 무고를 당한 것이 해소되면서 사당에 제사를 지내라는 임금의 은명을 받고 이의 사실을 통고하고 참석을 당부하는 것이다. 이 통문에서 말하는 하위지의 관향과 호에 대한 시비는 1905년(고종 42) 이면주 등이 올린 상소에서 그 대략적인 내용을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이 시비는 하상기가 예식원에 하위지의 본관이 ‘단계’라며 고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상기가 그렇게 말한 근거는 장릉의 묘지문과 『홍재전서』였다. 이에 대해 (음)3월 18일 이면주 등이 상소하여 그와 같은 기록에는 하위지의 본관은 진주이고, 호는 단계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고종은 상소의 내용을 예식원에서 처리하게 하겠다는 비답을 내렸다. 그런데 예식원에서 이 사실의 조사를 마치기도 전에 박노학하상기의 주장을 옹호하는 증거들을 제시하고, 박해철 등이 연명으로 하상기를 지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해 이면주 등은 (음)5월 6일 다시 상소를 올려 이들이 주장하는 증거들이 사실이 아님을 밝혔다. 박노학이 제시한 증거는 박팽년의 현손인 박계창이 꿈을 기록한 내용, 박종우박숭고가 지은 소지(小識)의 내용, 『요해편』과 『황화집』에 기재되어 있는 詩의 내용, 진관사 에서 글을 읽을 때 지은 연구의 소서 내용, 『동국여지승람』, 낙빈서원민절서원에 봉안할 때 말한 내용, 그리고 정구의 유집 등이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이면주 등은 하나하나 반박하면서 그 증거들이 단편적이고 분명하지 않은 사적들로 주어다가 엮은 것으로 대부분 꾸며낸 것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태종과 세종 때 있었던 하위지 네 부자의 『문과방목』, 『장릉지』, 『홍재신서』, 하위지의 본향인 선산의 읍지, 하위지가 직접 기록한 장적, 김종직이 남긴 『이존록』, 장현광이 지은 묘갈명, 송시열이 지은 ‘삼인록서’ 등을 그 증거로 제시했다. 이들은 사실에 있어 박노학의 것들보다 훨씬 객관적인 자료였다. 그래서 고종은 이면주 등의 상소에 대해 즉시 사실을 조사하여 바로잡도록 하겠다는 비답을 내렸다. 그리고 본 통문에서 보는 것처럼 하위지의 본향이 진주이고, 그의 호가 단계라는 것을 명시하고, 이를 확인하는 절차로 사당에서 제사를 드리라는 은명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통문의 내용은 이면주 등이 올린 상소를 참조함으로써 그 시작과 결말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이해는 일방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참조한 이면주 등의 상소는 이 통문을 발행한 당사자와 같은 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증거들을 보면 이면주 등의 주장이 객관적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식원에서도 엄밀히 조사를 한 끝에 내린 결론일 것이기에 하위지의 관향과 호에 대한 시비는 일단락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궁금한 것은 하상기가 왜 이러한 시비를 일으켰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족보와 관련된 문제가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면주 등의 상소문 끝에 "폐하께서는 확고한 결단을 내리시어 속히 바로잡도록 명하시고 속히 징계를 시행하시어 하시철 이래의 날조된 기록과 족보, 거짓된 증거와 사적은 즉시 일일이 불속에 던져 버림으로써 끝없이 이어질 근심을 영원히 막하주소서."하고 하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門閥이 人仕나 사회적 행세에 있어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족보는 가문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하시철 역시 하위지를 족보 속에 자신의 조상으로 기재하여 자신의 문벌을 과시하려 했던 것 때문에 이 시비가 일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사학보』2, 차정섭, 조선시대사학회, 1997
『조선왕조실록』,
하창환,이수환

상세정보

1906년 11월 1일, 河緯地의 貫鄕과 號에 대한 誣告가 虛僞로 밝혀지면서 祠堂에 祭祀를 드리라는 恩宥를 내려 이의 거행을 玉山書院에 알리는 臨川書堂의 通文
[
내용 및 특징
]
이 통문은 1906년 11월 1일 臨川書堂玉山書院에 보낸 것으로 그 내용은 河緯地의 貫鄕과 號가 잘못되었다고 誣告를 당한 것이 해소되면서 祠堂에 祭祀를 지내라는 임금의 恩命을 받고 이의 사실을 통고하고 참석을 당부하는 것이다. 이 통문은 서두에 하늘의 해는 높은 곳에서 비추고, 땅 속의 우레는 이내 회복한다는 자연현상에 대한 기술을 통해 사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 통문에 따르면 忠烈公 하위지의 관향과 호가 거짓이라고 고발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눈이 녹듯이 한 점의 의심도 남기지 않고 의혹이 풀리면서 임금으로부터 사당에 제사를 지내라는 은명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 사림에 참으로 다행스러운 영광으로 우리 유림의 사람이라면 감사하고 축하하는 마음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기쁨을 표했다. 그래서 하위지의 宗宅이 있는 안동에서 머리를 모아 상의하여 좋은 날에 정성껏 봉양하기로 해서 다음달 8일, 즉 1906년 12월 8일 하위지의 묘소에서 행사를 거행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앞에서 기약한 날짜에 많이들 왕림하여 서로 도와 일이 잘되도록 교섭해서 위로는 임금의 망극한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우리 사림의 경사를 함께 나누었으면 참으로 고맙겠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에서 말하는 하위지의 관향과 호에 대한 시비는 1905년(고종 42) 李冕宙 등이 올린 상소에서 그 대략적인 내용을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이 시비는 河相驥가 禮式院에 하위지의 본관이 ‘丹溪’라며 고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상기가 그렇게 말한 근거는 莊陵의 묘지문과 『弘齋全書』였다. 이에 대해 (음)3월 18일 이면주 등이 상소하여 그와 같은 기록에는 하위지의 본관은 진주이고, 호는 단계로 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고종은 상소의 내용을 예식원에서 처리하게 하겠다는 비답을 내렸다. 그런데 예식원에서 이 사실의 조사를 마치기도 전에 朴魯學하상기의 주장을 옹호하는 증거들을 제시하고, 朴海哲 등이 연명으로 하상기를 지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해 이면주 등은 (음)5월 6일 다시 상소를 올려 이들이 주장하는 증거들이 사실이 아님을 밝혔다. 이 상소문에 따르면 박노학이 제시한 증거는 박팽년의 玄孫인 朴繼昌이 꿈을 기록한 내용, 朴宗祐朴崇古가 지은 소지(小識)의 내용, 『遼海編』과 『皇華集』에 기재되어 있는 明나라 사신을 전송하는 詩의 내용, 津寬寺에서 글을 읽을 때 지은 聯句의 小序 내용, 『東國輿地勝覽』, 洛濱書院愍節書院에 봉안할 때 말한 내용, 그리고 鄭逑의 遺集 등이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 이면주 등은 하나하나 반박하였다. 먼저 꿈은 망령된 것으로 객관적 증거가 될 수 없고, 소지(小識) 또한 꿈을 근거로 꾸며낸 이야기이기에 증거가 될 수 없으며, 『황화집』에 있는 증거는 그 속 박팽년의 시에 대한 주석에 근거한 것으로 그것은 박팽년 본인의 것이 아닌 뒷사람이 지어낸 것이고, 성삼문이 지었다고 하는 聯句詩의 소서는 序에서 빠진 것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고, 정구의 유집에는 애당초 하위지의 관향과 호에 대해서는 말하지도 않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동국여지승람』 姓氏條에 丹城縣의 명칭은 조선조에서 시작되었는데 晉州에 속해 있지 않을 때이므로 ‘河’라는 姓氏 아래에 진주라고 주를 달아서 진주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힌 것이고, 丹溪縣이란 명칭은 고려 초기에 비롯되어 당시에는 진주에 속해 있을 때이므로 河姓 아래에 주를 달지 않은 것이었다. 낙빈서원대구에 건립된 서원으로 박씨 집안에서 주관한 것이기에 그곳의 문헌은 근거가 될 수 없으며, 또한 畿內에 설립된 민절서원하위지에 대한 祭文에 ‘嵩善(善山의 옛 이름)의 향리에 晉陽(晉州의 옛 이름)에 하씨가 대대로 살고 있다.’라는 구절이 있다고 하였다.
이처럼 이면주 등은 하상기의 주장을 옹호하는 박노학의 증거들을 하나하나 반박하며 그것들이 단편적이고 분명하지 않은 사적들을 주어다가 엮은 것으로 대부분 꾸며낸 것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태종과 세종 때 있었던 하위지 네 父子의 『文科榜目』, 『莊陵誌』, 『홍재신서』, 하위지의 본향인 선산의 읍지, 하위지가 직접 기록한 帳籍, 김종직이 남긴 『彛尊錄』, 장현광이 지은 묘갈명, 송시열이 지은 ‘三仁錄序’ 등을 그 증거로 제시했다. 이것들은 위로 內閣과 지방 史庫의 문서에서부터 아래로 읍지와 장적, 그리고 선현들의 기록까지 모두 믿을 만한 것으로 모두가 하위지의 관향을 ‘晉州’로, 그리고 호를 ‘丹溪’라고 기록하고 있다며 자신들의 주장이 객관적이면서 정당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면주 등의 이 같은 상소에 대해 고종은 "상소를 보고 잘 알았다. 예식원으로 하여금 즉시 사실을 조사하여 바로잡도록 하겠다."라는 비답을 하였다. 그리고 본 통문에서 보는 것처럼 하위지의 본향이 진주이고, 그의 호가 단계라는 것을 명시하고, 이를 확인하는 절차로 사당에서 제사를 드리라는 은명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 통문의 내용은 이면주 등이 올린 상소를 참조함으로써 그 시작과 결말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이해는 일방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참조한 이면주 등의 상소는 이 통문을 발행한 당사자과 같은 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증거들을 보면 이면주 등의 주장이 객관적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예식원에서도 엄밀히 조사를 한 끝에 내린 결론일 것이기에 하위지의 관향과 호에 대한 시비는 일단락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궁금한 것은 하상기가 왜 이러한 시비를 일으켰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그가 이 시비를 일으킬 때의 고발장이나 어떤 인물인가를 안다면, 좀 더 명확히 이러한 궁금증들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단지 이것이 족보와 관련된 문제가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이면주 등의 상소문 끝에 "폐하께서는 확고한 결단을 내리시어 속히 바로잡도록 명하시고 속히 징계를 시행하시어 하시철 이래의 날조된 기록과 족보, 거짓된 증거와 사적은 즉시 일일이 불속에 던져 버림으로써 끝없이 이어질 근심을 영원히 막하주소서."라고 한 말이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門閥이 人仕나 사회적 행세에 있어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기 때문에 족보는 가문의 우월성을 과시하는 수단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하시철 역시 하위지를 족보 속에 자신의 조상으로 기재하여 자신의 문벌을 과시하려 했던 것에서 이 시비가 일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
자료적 가치
]
이 통문은 조선후기에 하위지의 관향과 호에 대한 시비가 있었고, 이의 결과가 어떠했는가를 밝혀주는 자료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비가 일어난 원인에서 보면 이 통문은 당시에 유명인을 자신의 족보에 기재하려는 무리한 시도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로 간주할 수 있다.
『조선시대사학보』2, 차정섭, 조선시대사학회, 1997
『조선왕조실록』,
하창환,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906년 임천서당(臨川書堂) 통문(通文)
通文
右通諭事伏以天日高照地雷旋復 忠烈公丹溪河先生貫號柀誣之變渙然消雪而祠廟 恩侑之命又此鄭重斯文之榮幸
吾黨之感祝容有遠邇之間哉玆自本鄕聚首相議剋期祇奉以來月初八日定行于本廟而飛文奉告于道內 僉君子伏願
僉尊前期賁臨相與周旋上以答罔極之恩下以共吾林之慶千萬幸甚
右文通
玉山書院
丙午十一月初一日臨川書堂都有司 幼學 金鎭麒
齋有司 幼學 柳淵愚
金九淵
會員 前都事 金道和
進士 金景洛
幼學 李重明
金秀洛
李鍾夏
李䝺燾
張景杓
權淵浩
進士 金悳永
幼學 柳必永
權世永
金洙煥
前參奉 李興魯
進士 金瑞洛
幼學 權景淵
柳宗欽
金獻模
朴齊規
李宜燦
金益洛
鄭翰逵
張景栻
前校理 金斗秉
幼學 金文述
金大洛
前都事 權敦淵
前參奉 金建永
金柄洛
金仁植
幼學 李一欽
前承旨 金鎭懿
幼學 李雲凡
裵淵述
柳淵楫
南極和
前參奉 金秉植
正字 金鴻洛
幼學 李羲洛
權大潑
鄭安欽
柳龜鎬
李{王+泰}
李衆羲
金應植
金鍾林
柳昌植
權相翊
金敬魯
權孟淵
金鳳周
權相鉉
金時秉
洪永銓
金聲煥
金學模
金駿鎬
金淵輝
金翰周
權用和
張元極
權大應
權秉燮
裵秉旭
進士 柳東杰
前參奉 金龍煥
幼學 張景楫
柳東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