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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0년 청송교원(靑松校院)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5+KSM-XF.1840.4777-20130630.Y135010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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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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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유치구, 남희택, 신홍운, 청송교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청송군
작성시기 1840
형태사항 크기: 97.8 X 57.2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840년 청송교원(靑松校院) 통문(通文)
이 통문은 1840년 3월 1일 청송교원이 옥산서원에 보낸 것으로 그 내용은 옥산서원의 화재에 기부금을 거두어 보내는데 적어서 미안하다는 것이다. 이 통문에서 말하는 옥산서원의 화재는 1839년(헌종 5) 1월 28일에 있었던 구인당의 화재이다. 이 화재로 10칸이나 되는 강당이 전소되어 이에 대한 책임으로 재임이 쫓겨나고, 그곳을 지키던 종 다섯은 태형을 받고 쫓겨났다. 특히 이 날의 화재로 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던 선조 때 이산해가 쓴 사액판, 숙종 때의 전교등서판, 영조 때의 비망기판, 정조 때의 어제제문판과 백록동규판, 그리고 본원원규판, 한석봉이 쓴 구인당양진재해립재라는 3개의 현판 등이 모두 소실되었다. 옥산서원영남의 으뜸가는 서원으로 소장품들 또한 상당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옥산서원의 화재가 사문의 큰 액운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본 통문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그 해 11월에 불탄 현판이 다시 사액된다는 것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화재로 소실된 건물을 중건하는 일이었다. 옥산서원에서는 화재를 당하자 곧바로 2월 1일에 중건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여 향내 교원에 통문을 내고, 2월 13일에 서악서원에서 향회를 개최하여 중건역사를 담당할 임사를 결정하고 중건역사에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은 후손들로부터 각출하거나 향중과 도내의 각 교․원․사와 문중 등의 기부로 충당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향교에는 30냥, 향청과 사마소에는 10냥 등의 기부금을 배정하였다. 본 통문은 바로 옥산서원의 기부를 부탁한 것에 대한 답변인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옥산서원에서 불탄 건물을 중건하기 위해 청송의 교원으로 기부를 부탁하는 통문을 보냈고, 이를 전해 받은 청송의 교원에서는 부탁한 만큼의 기부금을 낼 수 없어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미안하다는 내용의 통문을 보낸 것이다. 기록을 보면 1839년에 큰 홍수가 있었는데, 본 통문에서 청송의 교원이 큰 변고를 겪고 난 후부터 비바람이 두렵다고 한 것은 이때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이렇게 보면 기부금을 내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성의를 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당시 기부금을 기록한 『도내전입기』를 보면 청송교원의 10냥은 적은 돈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체면치례에 지나지 않는 적은 것이라고 미안해하는 것은 이전에 옥산서원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추측을 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청송교원에서 이런 통문을 보내온 것이나 동원된 인원이나 기부를 받은 금액을 보면 옥산서원의 강당을 중건하는 일은 향내의 관심사일 뿐만 아니라 도내의 관심사로 부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서원이 가문 중심으로 운영되던 이 시기에 도내 전체가 관심을 보였다는 것은 당시 영남에 있어서 옥산서원의 위치가 어떠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한 증거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玉山書院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3
하창환,이수환

상세정보

1840년 3월 1일, 玉山書院의 火災에 寄附金을 보내는데 금액이 적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는 靑松校院의 通文
[
내용 및 특징
]
이 통문은 1840년 3월 1일 靑松校院이 玉山書院에 보낸 것으로 그 내용은 옥산서원의 火災에 寄附金을 거두어 보내는데 적어서 미안하다는 것이다. 이 통문은 먼저 옥산서원의 화재가 우리 유림에 관계된 큰 액운이었으나, 다행히도 옥산서원 여러분이 마음과 힘을 다해 일을 처리한데 힘입어 아주 절박하고 위태로웠던 곳이 여유를 갖게 되었다고 위로와 노고의 말을 전했다. 그리고 면모를 일신한 아름다움으로 성대한 의식을 치르고, 은혜로운 賜額 또한 거듭 내린 것에 慶賀하는 마음이 다 같이 않겠느냐며 옥산서원에 복구와 함께 있은 좋은 일에 대해 축하의 말을 전했다. 그러면서 청송의 향교와 서원들도 마음을 같이하고 정성을 함께하여 만분의 일쯤 되는 적은 힘이나마 보태려했다고 자신들의 마음을 전했다. 하지만 그 넓던 향교와 서원이 줄어드는 데에 이르러서는 형세를 설명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며, 또한 도중에 松鶴書院에서 일어난 事端은 옥산서원 여러분들도 이미 들었을 것이라며 자신들의 어려운 처지를 이야기했다. 한 번 큰 변란을 겪은 이래로 향교의 문묘와 학궁의 담장은 비바람을 두려워할 정도여서 아침저녁으로 조금씩 보수하고 손질하는데 얼마 되지 않는 힘도 모두 고갈되었다며 자신들의 딱한 처지를 다시 한번 이야기 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보내는 약간의 물품은 결코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겨우 10緡銅을 거두어 보내는데, 이것은 단지 책임을 면하려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며 기부금이 적은 것을 미안해했다. 그래서 옥산서원 여러분이 너그럽게 이러한 사정을 헤아려준다면 지금 청송의 人士가 된 자로서 어찌 부끄러워하지 않겠는가라는 거듭된 사과의 말과 함께 여러분들이 정성과 힘을 더하여 옥산서원의 큰일을 안정시키기를 바란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에서 말하는 옥산서원의 화재는 1839년(헌종 5) 1월 28일에 있었던 求仁堂의 화재이다. 이 화재로 10間이나 되는 講堂이 전소되어 이에 대한 책임으로 재임이 쫓겨나고, 그곳을 지키던 종 다섯은 태형을 받고 쫓겨났다. 특히 이 날의 화재로 서원에서 소장하고 있던 宣祖 때 李山海가 쓴 賜額板, 숙종 때의 傳敎謄書板, 영조 때의 備忘記板, 정조 때의 御製祭文板과 白鹿洞規板, 그리고 本院院規板, 韓石峯이 쓴 求仁堂兩進齋偕立齋라는 3개의 현판 등이 모두 소실되었다. 옥산서원영남의 首院으로 소장품들 또한 상당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었다. 그래서 옥산서원의 화재가 사문의 큰 액운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본 통문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그 해 11월에 불탄 현판이 다시 사액된다는 것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화재로 소실된 건물을 중건하는 일이었다. 옥산서원에서는 화재를 당하자 곧바로 2월 1일에 중건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여 鄕內 校院에 통문을 내고, 2월 13일에 西岳書院에서 수백여 名이 참석한 鄕會를 개최하여 重建役事를 담당할 任司를 결정하고 중건역사에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은 후손들로부터 각출하거나 鄕中과 道內의 각 校․院․祠와 문중 등의 기부로 충당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향교에는 30兩, 향청과 사마소에는 10兩 등의 기부금을 배정하였다. 본 통문은 바로 옥산서원의 기부를 부탁한 것에 대한 답변인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옥산서원에서 불탄 건물을 중건하기 위해 청송의 校院으로 기부를 부탁하는 통문을 보냈고, 이를 전해 받은 청송의 교원에서는 부탁한 만큼의 기부금을 낼 수 없어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미안하다는 내용의 통문을 보낸 것이다. 기록을 보면 1839에 큰 홍수가 있었는데, 본 통문에서 청송의 교원이 큰 변고를 겪고 난 후부터 비바람이 두렵다고 한 것은 이때의 피해를 입은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이렇게 보면 기부금을 내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성의를 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음에도 미안함을 표하는 것은 불탄 건물을 중건하는데 막대한 인원과 자금이 소요된다는 것을 그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求仁堂重建日記』와 『鄕中錢入記』, 그리고 『道內錢入記』에 따르면 건물 중건에 동원된 役丁은 총 16,259명이며, 鄕中과 道內로부터 기부를 받은 금액은 도합 2616兩 2錢이었다.
이 통문을 보면 흔히 斯文이라고 일컬어지는 유교의 단체에서 중대한 일이 있을 때면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 관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서로 간에 상부상조하는 일은 서원의 각종 都錄, 置簿記, 重修·重建日記, 考往錄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옥산서원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도움을 받은 것을 자세히 기록하는 것은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다음에 갚기 위한 조치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기부금을 기록한 『도내전입기』를 보면 청송교원의 10냥(緡銅)은 적은 돈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체면치례에 지나지 않는 적은 것이라고 미안해하는 것은 이전에 옥산서원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고 추측을 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청송교원에서 이런 통문을 보내온 것이나 동원된 인원이나 기부를 받은 금액을 보면 옥산서원의 강당을 중건하는 일은 향내의 관심사일 뿐만 아니라 도내의 관심사로 부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서원이 가문 중심으로 운영되던 이 시기에 도내 전체가 관심을 보였다는 것은 당시 영남에 있어서 옥산서원의 위치가 어떠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한 증거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
자료적 가치
]
이 통문은 옥산서원의 화재에 청송교원이 기부금을 내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자료이다. 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기부금을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어려운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얼마 되지 않아 미안하다고 하는 것을 보면 평소 옥산서원이 다른 교원에 어떻게 했으며, 당시 교원들 사이에서 그의 위상이 어떠했는가를 이 통문을 통해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玉山書院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3
하창환,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40년 청송교원(靑松校院) 통문(通文)
通文
右文爲回諭事伏以 貴院火變係是斯文大厄會幸賴 僉君子苦心榦事使焦尾爛劫之地有寘焉改觀之美 縟禮克擧
恩額重宣其爲慶賀豈以近遠而有間乎生等當齊心共誠圖所以效萬一焦尞之力而至於敞鄕校院之凋殘有難形說者且中松院事端
僉君子想已耳之矣一經大刼以來 廟貌宮墻惟風雨是懼患在朝夕方區區繕修綿力俱竭雖如干排送之物萬無凖數之勢堇得收合十
緡銅以呈只不過塞責之科而已假 僉君子恕而量之爲今日鄙鄕人士者豈不騂然乎耳伏願僉尊更加誠力以安大事幸甚
右文通
慶州 玉山書院
庚子三月一日靑松校院會中 幼學 權衕
趙觀祐
申弘遠
沈永源
李泰鉉
趙基暹
申弘璧
沈能一
鄭壽坤
進士 柳致球
幼學 南凞宅
金文凞
李鎭民
李弘國
沈秉文
徐聖模
閔羽鏞
趙基毫
趙廣祐
金載凞
李元稷
進士 申弘運
幼學 閔致兢
權五奎
鄭泰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