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0년 1월, 韓鎭億을 비롯한 44명이 慕堂 洪履祥의 祠宇를 건립하기로 發議하고, 玉山書院에 이의 同議를 구하는 通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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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및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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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통문은 1840년 1월 韓鎭億를 비롯한 44명이 연명하여 玉山書院에 보낸 것으로 그 내용은 慕堂 洪履祥의 祠宇를 건립하는데 옥산서원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다. 이 통문은 서두에서 군자의 덕은 아무리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잊힐 수 없으며, 鄕社의 예절은 아무리 오래 내려오지 않아도 끝내 그만둘 수 없는데, 이것은 선현을 존중하고 사모하는 지극한 마음이며, 후학들을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단서라고 말한다. 이는 선현의 제향에 대한 의미를 말하는 것으로 본 통문에서 지목하는 제향의 대상은 홍이상이다. 이 통문은 그의 이력에 대해 아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 대강을 살펴보면 그는 문학과 덕행이 합치하는 인물로 많은 사람들의 추천을 받았으며, 임금을 보좌하여 치도를 바로잡게 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때 임금을 수행하고 援兵과 軍糧을 공급하는 공이 있었으며, 그 후 대사성이 되어서는 많은 인재들을 선발하는 등의 공로를 이루었다. 이처럼 홍이상의 학문과 공적이 우뚝한데도 추모하는 곳은 文峰書院 한 곳뿐인 것은 태평한 시대에 부족한 儀式이며, 사림의 흠이 되는 일이라고 본 통문은 그에 대한 새로운 추모의 공간을 마련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이러한 것에 어울리는 곳은 荷潭(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하담리)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이곳은 홍이상의 고향이자 만년에 벼슬을 내놓고 은거하던 곳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의 사우를 건립하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정조 때 그를 제향해도 좋다는 특별한 허락이 있어서 1805년(순조 5) 사림의 의론이 일어나 사우를 건립하려고 하였으나 재력이 넉넉지 못하여 중도에 거두어야만 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 오래도록 계획을 짜서 큰일을 성취할 수 있게 되어 여러분들에게 알리니 한목소리로 호응하여 사우를 건립하는 일을 이루도록 해주면 고맙겠다는 말로 통문은 끝을 맺는다.
이 통문에서 거론하고 있는 홍이상은 일찍이 杏村 閔純에게 나아가 공부를 하였으며, 1573년(선조 6) 사마시에 합격하고 1578년(선조 12)에 大庭 對策에서 장원을 하여 殿試에 직접 응시할 자격을 받아 이듬해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본 통문에서 많은 사람들의 추천을 받았다는 것은 이 과정에서 그의 학문과 사람됨이 알려진 결과를 두고 말하는 것이다. 이후 예조와 호조의 좌랑을 거쳐 정언․수찬․지제교․병조좌랑 등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대사성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강직함으로 直諫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광해군에게 붕당의 폐해를 언급한 것이다. 1612년(광해 4) 그가 李爾瞻․鄭仁弘 일파에게 밀려나 開城留守로 나갈 때 하직 인사를 하던 날 광해가 "河北의 적을 없애기는 쉽지만 붕당을 제거하기는 어려우니, 그렇지 않은가?"하니, 정색을 하며 "이는 암울한 조정에 나라를 망칠 말입니다. 임금이 먼저 근본의 자리에 서서 옳고 그름을 구별하면 붕당의 禍는 저절로 없어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본 통문에서 홍이상은 문학과 덕행이 합치하는 인물이라는 것은 이러한 강직한 성품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여러 가지 점에서 홍이상은 제향의 인물로 손색이 없다. 그래서 이 통문에서도 말하는 것처럼 문봉서원에서 배향되고 있다. 하지만 이 통문을 발행되던 19세기 중반은 고관을 역임했거나 유학자로서 명망이 있는 인물, 또는 충절인에 대해서는 후손이나 문인, 또는 향인들이 다투어 원사를 건립하여 제향하려 들던 그런 시기였다. 그래서 이 시기는 첩설과 남설로 여러 가지 폐단을 일으키던 때였다. 본 통문에서 한 가지 뛰어난 점이나 기예를 가진 선비라도 제향할 곳을 만드는 데가 한두 곳에 그치지 않는데, 홍이상처럼 학행과 공로가 뛰어난 사람은 비록 이웃 고을에서 제향을 하더라도 지나치지 않다고 하는 것은 바로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말하는 것이다. 이 통문을 발행한 사람들은 홍이상을 제향하는 서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사우를 건립하려는 것은 그곳이 그의 고향이자 만년에 은거하던 곳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를 제향하는 문봉서원은 선영이 있는 곳으로 그 나름의 의미가 있지만, 충주에 사는 그의 후손과 향인들은 고향이자 만년에 은거했던 자신들의 지역에 사우를 건립함으로써 그의 배경에 힘입어 그 지역에서 자신들의 지위와 입지를 확고히 하고자 하려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홍이상과 같이 학행과 공로가 뛰어난 인물은 이웃 마을에서 제향하더라도 지나친 것이 아니라는 논리를 편 것이다. 그리고 이 통문에서 홍이상의 행적을 지나치게 상세하다고 여겨질 만큼 자세하게 서술하고, 서명한 사람 모두가 手決을 한 것을 보면 사우를 건립하려는 결의와 의지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보여주려는 의도가 아닌가 추측된다. 아무튼 지금 충주시 금가면 하담리에는 홍이상을 제향하는 荷江書院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 서원은 1786년(정조 10)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통문에서 보면 하강서원은 이 시기에 창건하기는 하였으나 재력의 부족으로 마무리를 짓지 못하다가 그 후 30여 년이 지나 이 통문이 발행되던 시기에 완공을 본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홍이상을 추모하는 또 다른 시설인 慕賢亭이라는 누정이 1817년(순조 17)에 건립되었다가 이후 洪祐夔의 楣額을 받아 걸었다고 하는데, 그 시기가 이 통문이 발행되고 하강서원이 완공되던 때와 같은 때가 아니었을까 하고 추정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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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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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통문은 홍이상의 추모시설을 건립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자료이다. 그리고 이 통문은 이 시설을 건립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 홍이상에 대한 이력과 당시 사우를 건립하려던 사회적 분위기를 서술하고 있어 이에 대한 이해를 돕는 간접적 자료로서의 가치도 가진다.
이 통문이 가지는 특징 중의 하나는 홍이상의 이력에 대해 다른 것들에 비해 아주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 것은 그의 사우 건립의 타당성과 그에 대한 자신들의 의지를 나타내고자 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지금의 우리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홍이상과 이 통문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된다. 그래서 이 통문에서 기술하고 있는 홍이상의 이력을 가능한 한 원의에 가깝게 옮기도록 한다.
洪先生은 지금에 있어서는 비록 수백 년 전의 선배이기는 하지만, 정사와 야사의 믿을 만한 기록과 유명한 재상과 큰 선비들의 칭송한 글들이 사람들의 이목에 분명히 비춰져 지금은 어린 선비들까지도 함께 알고 있다. 비록 선생의 학문이 얼마나 깊은지 末學으로서는 헤아려볼 수는 없지만, 남긴 풍모가 천년이 지나도 영원할 것이라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선생은 일찍이 경전의 뜻을 일삼아 程朱學에 드나들며 ‘主敬’ 두 글자를 공부의 시작으로 삼고, 『論語』라는 한 권의 책을 힘을 기르는 근본으로 삼아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여 이르는 곳마다 핵심을 꿰뚫었다. 그래서 스승도 스스로 선생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여겼다. 성균관에서 공부할 때는 언제나 모범이 되어 사람들이 선생을 程子나 朱子에 비교하기까지 하고, 선생의 의리에 투철한 문장은 蘇東坡가 그에게 전하여 외우게 한 것이라고 여겼다. 선생의 문학과 덕행이 합치한 것을 알고서 서로 추천하여 높은 명망을 얻게 되었다. 선생이 임금을 도와 인도할 때 이런 방정한 마음을 유지한 것은 모두 실제로 얻은 것에서 나왔다. 후학을 선도할 때는 가까운 것을 깊이 연구하여 이면의 것을 알게 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는 간절한 마음이 선생의 깊은 학문에 있던 것이었다.
선생은 어버이의 병을 10년 동안 간호하였는데, 의원을 보면 반드시 절을 하였다. 선생이 두 동생을 교육하고 보살필 때는 스스로를 매질하여 깨우치게 하고, 두 동생을 기르던 뜻과 정성을 미루어서 친족들이 어버이를 사랑하고 교분을 두텁게 하도록 하고, 소학의 도리를 따라하여 마을사람들이 보고 느껴 따라하도록 하였다. 어린아이가 어버이를 사모하는 정성으로 집안을 건사하고, 효성과 우애의 명분으로 대궐에서 윗사람에게 진념하니 선생의 깊은 학문에는 이러한 면모가 있었다. 그리고 학규를 바르게 하는데 있어 옛날의 잘못을 다스려 고치고, 조정에 나아가 임금과 면대하면 다스리는 도리를 바로잡아 회복하게 하였다. 만물을 조화시키는 원리를 으뜸으로 삼아 경연에 참여하서는 참되고 정성스러움으로 임금에게 암시하여 붕당과 치우치고 사사로운 의론을 격파하는데 힘쓰고, 大司成이 되어서는 여러 인재들을 성취할 수 있게 하여 마침내 스승으로서의 선비가 되니 사람들의 축하를 받았다. 스승을 배반할 邢恕와 같은 사람을 대면한 자리에서 책망하여 선견지명을 증험하였으니 선생의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과연 어떠했겠는가? 총애하는 가까운 신하를 처벌하도록 청하여 구차하게 남의 비위를 맞추려 하지 않았으니 선생의 과감한 말씀이 어떠했겠는가? 문장으로써 말하면 선생은 문장이 가볍고 화려한 것을 자랑하는 것을 수치로 여겨 이러한 것들을 떨쳐내고, 옷감이나 알곡처럼 튼실하고 소박한 문장을 썼으니 이것들은 六經에 근거한 것이었다. 절개와 지조로써 말하면 권세와 이익을 내치는 것 같이하여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을 의리로써 하여 자연에 은거하여 광해의 조정에는 병을 핑계로 벼슬을 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선생이 지닌 덕행의 대강이다.
선생의 공로에 대해 말을 하면 먼저 능통한 인재를 선발하여 호응하고 도와주었다. 위태롭고 험난한 때에 벼슬을 맡아 4년 동안 영남을 한마음으로 묶었으며, 援兵과 천리나 떨어진 양식을 공급하는데 수고를 다했다. 전쟁이 끝난 후 屯田을 크게 열어 산과 계곡으로 흩어진 백성들을 모아서 농업과 양잠을 권장하였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어사는 임금에게 품계를 높여줄 것을 신청했다. 그런데 그곳에 돌림병이 다시 일어나 사람들이 선생의 선정을 그리워하니 백성들을 중흥시키려 애쓴 모습이 청사에 빛남이 어떠했겠는가? 대개 선생의 덕은 지닌 아름다움은 안으로 쌓은 빼어나고 화려함이 총명한 임금을 만나 밖으로 발하게 되어 淸宦과 顯職을 두루 역임하고, 한가하게 거할 때는 조용하고 검소하여 사물에 걸림이 없었다. 일을 만나면 강직하고 방정한 성품으로 바른 것을 지니고 흔들리지 않았으니 이로써 제일의 講官이라 포상하여 특별히 임금이 친히 쓴 글제를 받아 영원히 우러러 보도록 벽에 걸려 있다.
이병훈, 영남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5
하창환,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