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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1년 양동수전소(良洞收錢所)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5+KSM-XF.1831.4777-20130630.Y1350101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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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이종상, 양동수전소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작성시기 1831
형태사항 크기: 59.2 X 47.7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831년 양동 수전소(良洞收錢所) 통문(通文)
이 통문은 1831년 11월 19일 양동수전소옥산서원을 비롯한 경주 부북의 원사 및 대표 가문들에게 보낸 것으로 그 내용은 원주 도천서원을 개축하는데 찬조할 돈을 기일에 맞추어 납부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이 통문에서 거론하고 있는 관설 허후허목의 사촌형이다. 그는 광해군 때 세상을 피하여 원주에 살다가 영남으로 내려와 정구정경세를 만나보고 크게 감화를 입었다. 이 통문에서 허후의 학문적 연원이 영남에 있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허후이항복의 천거로 1623년 내시교관이 되었다가 1627년 정묘호란 때 의병장 김창일을 도와 공을 세웠다. 1633년 사도사주부를 거쳐 지평현감으로 나갔을 때 내수사 소속의 종복 가운데 10년이 되도록 백성들을 괴롭힌 자가 있어 법으로 처단하자 백성들은 크게 즐거워했으나, 함부로 죽였다는 죄목으로 옥에 갇혔다가 마을사람들의 호소로 풀려났다. 1637년에는 의성현감이 되어 4년간 고을을 다스렸다. 아마도 이때 영남의 인사들과 많은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통문에서 원본 통문에 있는 옛 기록에는 선부형의 이름이 뚜렷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이후 허후는 형조와 호조의 좌랑과 정랑, 은산현감, 그리고 장악원정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도 전부, 음률, 형법, 천문, 지리, 음양의 운화 등 다양한 학문을 섭렵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이 통문의 내용은 원본 통문을 함께 볼 수 있으면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럴 수 없기에 본 통문과 허후라는 인물을 종합해 그 대강의 내용을 파악할 수밖에 없다. 먼저 허후라는 인물을 제향하는 도천서원에서 건물을 개축하는데 도움을 청해왔다. 그런데 도천서원은 강원도에 있으면서 그 도움을 경상도경주, 그것도 경주 부북의 원사와 집안에 도움을 청한 것은 예외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경주의 북부 사림에서는 양동에 수전소를 설치하여 적극적으로 돕고자 한 것은 더욱 예외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예외적인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오래전 허후가 살아 있을 때 경주 북부지역의 사림과 아주 친밀한 유대가 있었다는 것을 본 통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래서 경주 북부지역의 대표적인 가문인 여주이씨와 경주손씨가 자신들의 가문에서 각각 한 사람씩 수전유사를 선임하여 돈을 거두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문의 독려에도 불구하고 수금은 그다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지리적으로나 시대적으로 너무 격조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이처럼 돈을 거두는 일이 여의치 않자 여주이씨와 경주손씨의 집안에서는 이 통문을 돌려 돈의 납부를 독촉한 것이다. 그래서 이 통문의 말미에서 "돈을 거두는 날에 영동의 여러 군자들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할 뿐만 아니라, 덧붙인 말에서도 "기약한 날에 양동수전소로 돈을 보내어 돈이 도달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없도록 해주면 고맙겠다."고 거듭 당부의 말을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으로서는 이 일이 어떻게 결말지어졌는지 알 수는 없다.
『玉山書院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3
하창환,이수환

상세정보

1831년 11월 19일, 原州 陶川書院의 改築에 贊助할 돈의 收金을 위해 玉山書院을 비롯한 慶州 北部의 院祠 및 집안에 돌린 良洞收錢所의 通文
[
내용 및 특징
]
이 통문은 1831년 11월 19일 良洞收錢所玉山書院를 비롯한 慶州 府北의 院祠 및 대표 가문들에게 보낸 것으로 그 내용은 原州 陶川書院을 改築하는데 贊助할 돈을 기일에 맞추어 納付할 것을 促求하는 것이다. 이 통문에 따르면 도천서원觀雪 許厚를 배향하는 곳으로 그의 학문과 행적은 원본 통문에 상세히 기재되어 있으므로 다시 덧붙이지 않겠다고 이 통문은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허후의 학문적 연원을 파고들어가 보면 영남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당초 서원을 개축할 때부터 모두가 우리 영남이 도와줄 것을 믿었다고 한다. 그리고 영남 중에서도 우리 경주가 더욱 힘써야 한다고 이 통문은 강조했다. 그 이유는 원본 통문 속에 있는 옛 기록들을 보면 거기에 돌아가신 父兄들의 이름이 뚜렷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통문은 여기에 이름이 있는 각 집안의 후생들은 감회가 없지 않을 것이라며 도천서원에 대한 도움을 호소했다. 이어서 이 통고를 받은 각 원사들은 옛 부형들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아 돈을 수송하는 날 嶺東의 여러 군자들을 욕되게 하지 말며, 이전과 같은 탄식을 하지 않게 한다면 참으로 고맙겠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에서 거론하고 있는 관설 허후許穆의 사촌형이다. 그는 광해군 때 세상을 피하여 원주에 살다가 영남으로 내려와 鄭逑鄭經世를 만나보고 크게 감화를 입었다. 이 통문에서 허후의 학문적 연원이 영남에 있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허후이항복의 천거로 1623년 內侍敎官이 되었다가 1627년 정묘호란 때 의병장 金昌一을 도와 공을 세웠다. 1633년 司導寺主簿를 거쳐 砥平縣監으로 나갔을 때 內需司 소속의 從僕 가운데 10년이 되도록 백성들을 괴롭힌 자가 있어 법으로 처단하자 백성들은 크게 즐거워했으나, 함부로 죽였다는 죄목으로 옥에 갇혔다가 마을사람들의 호소로 풀려났다. 1637년에는 義城縣監이 되어 4년간 고을을 다스렸다. 아마도 이때 영남의 인사들과 많은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통문에서 원본 통문에 있는 옛 기록에는 선부형의 이름이 뚜렷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이후 허후는 형조와 호조의 좌랑과 정랑, 은산현감, 그리고 장악원정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도 田賦, 音律, 刑法, 天文, 地理, 陰陽의 運化 등 다양한 학문을 섭렵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이 통문의 내용은 원본 통문을 함께 볼 수 있으면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럴 수 없기에 본 통문과 허후라는 인물을 종합해 그 대강의 내용을 파악할 수밖에 없다. 먼저 허후라는 인물을 제향하는 도천서원에서 건물을 개축하는데 도움을 청해왔다. 그런데 도천서원강원도에 있으면서 그 도움을 경상도경주, 그것도 경주 북부의 원사와 집안에 도움을 청한 것은 예외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경주의 북부 사림에서는 양동에 수전소를 설치하여 적극적으로 돕고자 한 것은 더욱 예외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예외적인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당사자들에게 있어서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오래전 허후가 살아 있을 때 경주 북부지역의 사림과 아주 친밀한 유대가 있었다는 것을 본 통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래서 경주 북부지역의 대표적인 가문인 驪州李氏와 慶州孫氏가 자신들의 가문에서 각각 한 사람씩 收錢有司를 선임하여 돈을 거두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문의 독려에도 불구하고 수금은 그다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지리적으로나 시대적으로 너무 격조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이 된다. 다시 말해서 평소에 경주 북부의 사림이 강원도 원주에 있는 도천서원과 교류하는 일은 거의 없었을 것이며, 허후 또한 이 통문이 발행되기 200년 전의 인물이기에 아무리 선조를 거론하며 도움을 청하여도 그다지 절실함이 느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돈을 거두는 일이 여의치 않자 여주이씨와 경주손씨의 집안에서는 이 통문을 돌려 돈의 납부를 독촉한 것이다. 그래서 이 통문의 말미에서 "돈을 거두는 날에 嶺東의 여러 군자들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할 뿐만 아니라, 附記에서도 "기약한 날에 양동수전소로 돈을 보내어 돈이 도달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없도록 해주면 고맙겠다."고 거듭 당부의 말을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으로서는 이 일이 어떻게 결말지어졌는지 알 수는 없다.
[
자료적 가치
]
이 통문은 외형적으로 보면 원사들 간에 많은 물력을 필요로 하는 일에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흔한 사례를 보여주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도움의 요청하는 곳이 평소에 교류하는 곳이 아닌 선대와 연관된 곳이고, 또 그러한 곳의 도움에 그 지역을 대표하는 가문이 수전소를 설치하고 수전유사를 선임하여 수금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점에서 보면 드문 사례를 보여주는 희귀한 자료라고도 할 수 있다.
『玉山書院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3
하창환,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31년 양동수전소(良洞收錢所) 통문(通文)
通文
右通文事原州陶川書院許觀雪先生受靈
之所也其學問行蹟詳載原通故更不架疊然其淵源
瓚承昉自嶠南故當初建院中成改擔皆賴吾嶺贍助
之力而吾嶺之中吾慶尤爲用力焉今考原通中舊錄則
先父兄名諱宛然如在爲各家後生者又爲得無感懷之
必哉玆以輪告于各院隨多少另爲加意以當日先父兄
之心爲心而收送之日毋侮嶺東諸君子有今不如前之歎
千萬幸甚
玉山書院
東江書院
龜江書院
雲谷祠
聖山祠
虎溪祠
世德祠
良洞李氏各宅
孫氏各宅
霞谷鄭氏各宅
魯堂權氏各宅
辛卯十一月十九日收錢有司 李鍾祥(手決)
孫志魯
此亦中期促
望須以今月念前各自
惕念趂期收送于
良洞收錢所
俾無不及之患
幸甚耳
爻藪不敢私自酌定多少
間諒?備送芹
南學則自南收刷
之諒之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