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1년 양동 수전소(良洞收錢所) 통문(通文)
이 통문은 1831년 11월 19일 양동수전소가 옥산서원을 비롯한 경주 부북의 원사 및 대표 가문들에게 보낸 것으로 그 내용은 원주 도천서원을 개축하는데 찬조할 돈을 기일에 맞추어 납부할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이 통문에서 거론하고 있는 관설 허후는 허목의 사촌형이다. 그는 광해군 때 세상을 피하여 원주에 살다가 영남으로 내려와 정구와 정경세를 만나보고 크게 감화를 입었다. 이 통문에서 허후의 학문적 연원이 영남에 있다는 것은 이러한 사실과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허후는 이항복의 천거로 1623년 내시교관이 되었다가 1627년 정묘호란 때 의병장 김창일을 도와 공을 세웠다. 1633년 사도사주부를 거쳐 지평현감으로 나갔을 때 내수사 소속의 종복 가운데 10년이 되도록 백성들을 괴롭힌 자가 있어 법으로 처단하자 백성들은 크게 즐거워했으나, 함부로 죽였다는 죄목으로 옥에 갇혔다가 마을사람들의 호소로 풀려났다. 1637년에는 의성현감이 되어 4년간 고을을 다스렸다. 아마도 이때 영남의 인사들과 많은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 통문에서 원본 통문에 있는 옛 기록에는 선부형의 이름이 뚜렷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이후 허후는 형조와 호조의 좌랑과 정랑, 은산현감, 그리고 장악원정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도 전부, 음률, 형법, 천문, 지리, 음양의 운화 등 다양한 학문을 섭렵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이 통문의 내용은 원본 통문을 함께 볼 수 있으면 명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그럴 수 없기에 본 통문과 허후라는 인물을 종합해 그 대강의 내용을 파악할 수밖에 없다. 먼저 허후라는 인물을 제향하는 도천서원에서 건물을 개축하는데 도움을 청해왔다. 그런데 도천서원은 강원도에 있으면서 그 도움을 경상도의 경주, 그것도 경주 부북의 원사와 집안에 도움을 청한 것은 예외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경주의 북부 사림에서는 양동에 수전소를 설치하여 적극적으로 돕고자 한 것은 더욱 예외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예외적인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오래전 허후가 살아 있을 때 경주 북부지역의 사림과 아주 친밀한 유대가 있었다는 것을 본 통문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래서 경주 북부지역의 대표적인 가문인 여주이씨와 경주손씨가 자신들의 가문에서 각각 한 사람씩 수전유사를 선임하여 돈을 거두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하지만 이 두 가문의 독려에도 불구하고 수금은 그다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지리적으로나 시대적으로 너무 격조했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이 된다. 이처럼 돈을 거두는 일이 여의치 않자 여주이씨와 경주손씨의 집안에서는 이 통문을 돌려 돈의 납부를 독촉한 것이다. 그래서 이 통문의 말미에서 "돈을 거두는 날에 영동의 여러 군자들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할 뿐만 아니라, 덧붙인 말에서도 "기약한 날에 양동수전소로 돈을 보내어 돈이 도달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없도록 해주면 고맙겠다."고 거듭 당부의 말을 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으로서는 이 일이 어떻게 결말지어졌는지 알 수는 없다.
『玉山書院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3
하창환,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