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3년 서악서원(西岳書院) 통문(通文)
이 통문은 1823년 5월 1일 서악서원이 옥산서원에 보낸 것으로 그 내용은 나이 많은 선비와 任司가 가능한 사람 58명의 명단을 적어 보내니 옥산서원에서 이들을 맡아달라는 것이다. 이 통문은 사실 그 안에 발급처가 명기되어 있지 않아 내용으로 이를 추측할 수밖에 없다. 그 추측의 단서가 되는 것은 통문의 발급처와 옥산서원이 유생으로 추천하거나 강안에 참석한 사람들의 명단을 주고받았다는 말이다. 이것은 서로의 교류, 즉 유생들이 자신이 소속된 서원처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이 통문의 발급처는 서악서원이 된다. 우리가 이렇게 추측하는 것은 두 서원이 같은 지역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1563년 서악정사라는 이름으로 건립된 서악서원에는 회재의 위패가 별묘의 형태로 봉안되어 있었으며, 1572년 말 옥산서원이 건립되면서 그 이듬해에 그 위패가 이안되었다. 그리고 옥산서원은 회재의 위패가 이안되던 1573년 12월에 사액을 받은 반면, 서악서원은 임진왜란 이후 중건되면서 1623년에야 사액을 받았다. 두 서원이 설립된 16세기 중반 이후 17세기까지는 옥산서원과 서악서원에 경주부의 대표적인 사족들이 공동으로 참여하여 서원운영의 기본 규약이 되는 원규를 같이하고, 원안을 합록하면서 나란히 경주의 향론을 주도해 나갔다. 본 통문에서 두 서원이 천록을 주고받아 한 권의 책으로 삼은 것은 오랜 규칙이었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다. 하지만 1700년에 최진립의 후예들이 그 조상의 영광과 종족적 기반을 갖고 그들의 세거지인 이조에 용산서원을 건립하면서 서악서원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서악서원의 몰락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경주지역의 사림은 18세기 이후부터 각 지역별, 문중별, 파계별, 당색별로 그 분립이 확산되어 갔다. 즉 그 당시 신향내지 노론계 유림들이 송시열을 배향하는 인산서원이나 문중원사를 건립하여 그곳의 운영에 집중하였기 때문에 서악서원은 자연 유림들에게 있어 관심 밖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 통문이 발행되던 19세기 초 이후가 되면 서악서원의 형세는 서원의 운영 자체가 힘들 정도로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들의 천록과 강안에 기록된 사람들의 명단을 적어 보내 옥산서원에서 맡아줄 것을 당부한 것이다. 물론 지리적으로 볼 때 용산서원을 비롯해 여타의 서원들이 옥산서원보다 훨씬 더 가깝다. 하지만 옥산서원에 이러한 부탁을 하는 것은 원규를 같이하고 원안을 합록하는 등 그 동안 서원운영에 있어 밀접한 교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비록 당시에 있어 활동이 미흡하였지만 경주를 대표하는 사액서원이었던 서악서원의 위상을 고려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서악서원은 옥산서원과 함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서 살아남으면서 다시 한 번 경주 남쪽 유림들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결코 과거와 같은 성세를 이루는 데는 이르지 못하였다.
『玉山書院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2
『龍山書院』, 이수환, 집문당, 2005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하창환,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