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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3년 서악서원(西岳書院)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5+KSM-XF.1823.4777-20130630.Y1350101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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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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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유상익, 서악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2길 23
작성시기 1823
형태사항 크기: 111.2 X 67.8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823년 서악서원(西岳書院) 통문(通文)
이 통문은 1823년 5월 1일 서악서원옥산서원에 보낸 것으로 그 내용은 나이 많은 선비와 任司가 가능한 사람 58명의 명단을 적어 보내니 옥산서원에서 이들을 맡아달라는 것이다. 이 통문은 사실 그 안에 발급처가 명기되어 있지 않아 내용으로 이를 추측할 수밖에 없다. 그 추측의 단서가 되는 것은 통문의 발급처와 옥산서원이 유생으로 추천하거나 강안에 참석한 사람들의 명단을 주고받았다는 말이다. 이것은 서로의 교류, 즉 유생들이 자신이 소속된 서원처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이 통문의 발급처는 서악서원이 된다. 우리가 이렇게 추측하는 것은 두 서원이 같은 지역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1563서악정사라는 이름으로 건립된 서악서원에는 회재의 위패가 별묘의 형태로 봉안되어 있었으며, 1572년 말 옥산서원이 건립되면서 그 이듬해에 그 위패가 이안되었다. 그리고 옥산서원회재의 위패가 이안되던 1573년 12월에 사액을 받은 반면, 서악서원은 임진왜란 이후 중건되면서 1623년에야 사액을 받았다. 두 서원이 설립된 16세기 중반 이후 17세기까지는 옥산서원서악서원경주부의 대표적인 사족들이 공동으로 참여하여 서원운영의 기본 규약이 되는 원규를 같이하고, 원안을 합록하면서 나란히 경주의 향론을 주도해 나갔다. 본 통문에서 두 서원이 천록을 주고받아 한 권의 책으로 삼은 것은 오랜 규칙이었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다. 하지만 1700년에 최진립의 후예들이 그 조상의 영광과 종족적 기반을 갖고 그들의 세거지인 이조용산서원을 건립하면서 서악서원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서악서원의 몰락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경주지역의 사림은 18세기 이후부터 각 지역별, 문중별, 파계별, 당색별로 그 분립이 확산되어 갔다. 즉 그 당시 신향내지 노론계 유림들이 송시열을 배향하는 인산서원이나 문중원사를 건립하여 그곳의 운영에 집중하였기 때문에 서악서원은 자연 유림들에게 있어 관심 밖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 통문이 발행되던 19세기 초 이후가 되면 서악서원의 형세는 서원의 운영 자체가 힘들 정도로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들의 천록과 강안에 기록된 사람들의 명단을 적어 보내 옥산서원에서 맡아줄 것을 당부한 것이다. 물론 지리적으로 볼 때 용산서원을 비롯해 여타의 서원들이 옥산서원보다 훨씬 더 가깝다. 하지만 옥산서원에 이러한 부탁을 하는 것은 원규를 같이하고 원안을 합록하는 등 그 동안 서원운영에 있어 밀접한 교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비록 당시에 있어 활동이 미흡하였지만 경주를 대표하는 사액서원이었던 서악서원의 위상을 고려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서악서원옥산서원과 함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서 살아남으면서 다시 한 번 경주 남쪽 유림들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결코 과거와 같은 성세를 이루는 데는 이르지 못하였다.
『玉山書院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2
『龍山書院』, 이수환, 집문당, 2005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하창환,이수환

상세정보

1823년 5월 1일, 西岳書院에서 老儒와 任司가 가능한 사람의 명단을 玉山書院에 올려 이들을 맡아줄 것을 당부한다는 내용의 通文
[
내용 및 특징
]
이 통문은 1823년 5월 1일 西岳書院玉山書院에 보낸 것으로 그 내용은 나이 많은 선비와 任司가 가능한 사람 58명의 명단을 적어 보내니 玉山書院에서 이들을 맡아달라는 것이다. 이 통문에 따르면 서악서원옥산서원은 薦錄, 즉 유생으로 들어올 수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서로 주고받았으며, 이것을 합하여 한 권의 책으로 삼은 것은 오랜 규칙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옛날에 기록한 서악서원의 천록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어 정리하여 합하지를 못하였다가 이제야 유생에 천거한 사람과 강학에 참석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모두 모았다. 하지만 시일이 급하고 분량이 많아서 다 기록하지는 못하였다. 우선 시급하게 해야 하는 나이 많은 선비와 임사가 가능한 사람 58명의 명단을 추려서 보내게 되었다면서 저간의 사정을 이 통문은 밝혔다. 그리고서 이 사람들을 부디 옥산서원에서 맡아주면 유림의 사업에 있어 참으로 다행이겠다는 말로 통문의 끝을 맺었다.
이 통문은 사실 그 안에 발급처가 명기되어 있지 않아 내용으로 이를 추측할 수밖에 없다. 그 추측의 단서가 되는 것은 통문의 발급처와 옥산서원이 유생으로 추천하거나 강안에 참석한 사람들의 명단을 주고받았다는 말이다. 이것은 서로의 교류, 즉 유생들이 자신이 소속된 서원처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같은 지역 안의 서원이어야 한다. 당시는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같은 지역 안에 있지 않으면 아무래도 왕래가 잦을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이 통문의 발급처는 서악서원이 된다. 우리가 이렇게 추측하는 것은 단순히 두 서원이 같은 지역 안에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둘은 지역적으로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질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서악서원1563년 경주부윤 李楨과 사림의 公議로 仙桃山 아래에 西岳精舍라는 이름으로 건립되었다. 당시는 아직 옥산서원이 건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경주지역의 士論을 주도한 것은 물론 회재의 위패도 그곳에 별묘의 형태로 봉안되어 있었다. 그러던 것이 1572년 말 옥산서원이 건립되고, 그 이듬해에 회재의 위패가 移安되면서 그 해 12월에 監司 金繼輝의 啓達로 곧장 賜額을 받았다. 그에 반해 서악서원은 임진왜란 이후 중건되면서 1623년에야 사액을 받았다. 이처럼 사액에 있어서는 옥산서원서악서원보다 먼저 되고, 또한 그 주향자인 회재가 東方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되자 안동陶山書院, 진주德川書院과 함께 영남학파의 3대 서원으로서 경주권 사림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16세기 중반 이후 17세기까지는 옥산서원서악서원경주부의 대표적인 사족들이 공동으로 참여하여 서원운영의 기본 규약이 되는 院規를 같이하고, 院案을 合錄하면서 나란히 경주의 향론을 주도해 나갔다. 본 통문에서 두 서원이 薦錄을 주고받아 한 권의 책으로 삼은 것은 오랜 규칙이었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다. 하지만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에 이르러 서악서원은 갑작스런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것은 1700년에 崔震立의 후예들이 그 조상의 영광과 종족적 기반을 갖고 그들의 세거지인 伊助龍山書院을 건립하여 사액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서악서원의 운영을 실질적으로 담당하였던 경주최씨들이 대거 이탈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용산서원은 풍천임씨, 영양남씨, 곡산한씨 등과 연계하면서 서악서원을 제치고 廣川을 중심으로 경주부의 남쪽을 대표하는 서원으로 성장하면서 북쪽의 옥산서원에 맞서는 독자적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서악서원의 몰락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경주지역의 사림은 18세기 이후부터 각 지역별, 문중별, 파계별, 당색별로 그 分立이 확산되어 갔다. 즉 그 당시 新鄕내지 노론계 유림들이 宋時烈을 배향하는 仁山書院이나 문중원사를 건립하여 그곳의 운영에 집중하였기 때문에 서악서원은 자연 유림들에게 있어 관심 밖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 통문이 발행되던 19세기 초 이후가 되면 서악서원의 형세는 서원의 운영 자체가 힘들 정도로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들의 천록과 강안에 기록된 사람들의 명단을 적어 보내 옥산서원에서 맡아줄 것을 당부한 것이다. 물론 지리적으로 볼 때 용산서원을 비롯해 여타의 서원들이 옥산서원보다 훨씬 더 가깝다. 하지만 옥산서원에 이러한 부탁을 하는 것은 원규를 같이하고 원안을 합록하는 등 그 동안 서원운영에 있어 밀접한 교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비록 당시에 있어 활동이 미흡하였지만 경주를 대표하는 사액서원이었던 서악서원의 위상을 고려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서악서원옥산서원과 함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서 살아남으면서 다시 한번 경주 남쪽 유림들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결코 과거와 같은 성세를 이루는 데는 이르지 못하였다.
[
자료적 가치
]
이 통문은 서악서원에서 자신들의 老儒와 任司가 가능한 사람들의 명단을 옥산서원에 적어 보내 이들을 맡아줄 것을 부탁하는 사실을 알게 하는 자료이다. 그런데 이러한 부탁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추적해 보면 이 통문은 19세기 초에 서악서원이 처한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자료이며, 역사적으로 옥산서원과 어떤 교류가 있었는가를 알게 하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玉山書院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영남대학교 출판부, 1992
『龍山書院』, 이수환, 집문당, 2005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하창환,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23년 서악서원(西岳書院) 통문(通文)
通文
右文爲通諭事兩院薦錄之彑相往來合爲一冊自是古規而久綠本院薦事之所有枝節未得合案矣今則薦錄講案
俱皆團急而多不能盡書先抄時急年老儒及可合任司人五十八員以呈望須卽付貴院儒業幸甚
右文通
玉山書院
癸未五月初一日院長 柳相翼
公事員 韓文潤
李基一
齋任 南有麟
會員 韓公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