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3년 9월 慶州鄕校 都色이 경주 북면 각 祠院 都色에게 公州 金宗瑞祠宇와 驪州 金昌集書社의 건립에 필요한 자금의 분담금을 거두어 기간에 맞춰 보내라는 내용의 私通
[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이 문서는 公州와 驪州에서 慶州校院으로 보내온 두 편의 통문에 대하여 그 내용을 각각 謄書와 謄草하여 한 장의 문건으로 만든 후 慶州鄕校 都色이 경주부 북면 각 祠院의 都色에게 보내는 私通을 粘連하였다. 사통에 의하면, 1823년(순조 23)인 癸未年 5월과 6월에 慶州校院 앞으로 통문이 왔는데, 이 통문이 향교로 온 것은 府內에 향교는 하나이지만 祠院은 많기에 향교로 온 것이라고 밝혔다. 두 편의 통문에는 節孝 金宗瑞와 夢窩 金昌集을 제향하는 사원의 重建 및 新設과 관련하여 扶助를 요구하는 내용이 踏印되어 있었기에 경주향교에서는 경주부내 祠院에 이를 謄寫하여 보내었지만 부조금은 모이지 않고 上任이 교체되어 일을 추진하기 어렵다는 등등의 이유만 들었다고 하였다. 향교 도색은 이에 북면 사원 도색에게 사통을 보내어 경주의 學宮이 校宮만 있느냐며 질책하는 것과 동시에 납부한 부조금이 혹 下隸가 사사로이 착복한 것은 아닌지 되묻고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교체된 上任主가 전해들은 내용을 무시하고 급한 일이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또한 부조금의 수합이 지지부진한 것은 경주부내의 祠院에서는 그 일을 도울 마음이 없고 급한 것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지만, 타읍의 향교와 사원에서는 사안을 높게 보고 일을 추진하고 있다고 하였다.
경주향교에서는 경주지역 校院에 책정된 부조금을 분배한 금액은 자신들이 아닌 京在所의 邸人이 관부에 연락하여 즉시 責出하도록 한 것이며, 경주부에서는 향교로 하여금 貿納하도록 했다고 전하였다. 그러나 관의 이러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3달이 지나도록 한 푼의 돈도 거둔 것이 없는 것은 도울 마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에 통문 원본의 내용을 보낸 것이 수없이 많다 할지라도 다시 이 통문들을 베껴서 보내니, 上任과 성실히 소통하여 참으로 분배전을 하나하나 거두어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이번에 보내는 통문의 글은 一廳의 상임주가 分付한 말이 아니니 진실로 지체되어 기한을 넘기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고 했다.
경주향교 도색이 사통으로 謄草하여 보내온 두 건의 통문을 살펴본다. 첫 번째 통문은 1823년 6월 25일에 공주에서 보내온 것으로 영남의 상주, 안동, 경주, 대구의 校院들에게 보내온 것이다. 公州의 蓼塘書院의 縉紳有司로 있던 六曹의 判書와 參判들과 章甫有司로 金履緯 등이 연명하였다. 통문 내용은 크게 김종서의 伸寃과 宣揚과정에 대하여 설명하고, 金宗瑞祠宇의 重建에 따른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이를 살펴보면, 端宗대에 충신이었던 좌의정 節齋 金宗瑞는 死六臣과 그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의 절개와 忠勳을 가진 자였기에 1678년(숙종4)에 그의 伸寃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 후손에 대한 敍用이 있었다. 이후 1746년(영조 22)에 김종서와 그의 아들 金承珪, 金承璧의 官爵이 회복되었다. 1758년(영조 34)에는 김종서에게 忠翼公이라는 諡號가 내려졌으며, 1765년(영조 41)에는 致祭하고, 김종서의 옛 집을 그의 자손에게 돌려주었다. 1786년(정조 10)에는 不祧廟를 세우도록 하였으며, 1791년(정조 15)에는 영월 莊陵에 配食壇을 세우고 김종서와 그의 아들 김승규·김승벽을 배향하였다. 이로서 충신으로서의 확고부동한 위상이 확립되었다. 1804년(순조 4)에는 旌閭가 건립되었다. 이처럼 여러 왕을 거치면서 그의 충절이 평가 받자, 배식단에는 많은 선비들이 공경하여 항상 찾아 배알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김종서를 제향하는 祠宇가 公州에 있는데, 그 터가 하천가에 위치하고 있어서 작년의 큰 홍수로 건물이 顚覆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런데 그 후손들의 집안이 가난하여 이를 복원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를 그냥 지켜볼 수 없어서 이에 재물을 모아 重建하기로 謀議하였다. 이에 鄒魯之鄕이자, 忠義之處인 영남 각 고을의 校院에서도 忠賢의 일을 괄시하지 말고 힘을 합쳐 중건비를 부조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두 번째 통문은 1823년 5월에 경주교원에 到來한 것으로 原本을 謄草하였다. 내용은 1725년(영조 1)에 夢窩 金昌集을 제향하는 四忠書院이 세워졌지만, 黃呂[驪州]은 그가 노닐고, 무덤이 있는 곳인데도 한 칸의 書社가 없어서 후생들이 尊慕하는 마음을 펼칠 곳이 없다고 한탄하였다. 그래서 이번에 서사를 건립하기로 했으나, 건립에 큰 물력이 계속해서 들어가므로 列邑의 校院에서 扶助를 해주길 청하였다. 특히, 경주는 京邸人이 이미 推用하기로 했으므로 살펴 헤아려 달라고 하였다.
이상의 私通 문서를 통해 몇 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첫째, 私通이라는 문서의 성격이다. 옥산서원을 비롯한 경주지방 鄕校・書院・祠宇 사이에는 각 기간의 실무자간의 ‘알림장’이라고 할 수 있는 ‘私通’ 문서가 授受되었다. 여기서 실무자라는 것은, 예컨대 ‘都色’과 같은 직임을 맡은 사람을 말하다. 都色은 말 그대로 향교·서원 등의 고유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祭享, 講學에 필요한 제반 실무를 총괄하는 자를 말하는데, 가문의 경우 舍音[마름], 혹은 執事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향교·서원에서 해당 기관 차원의 공식적인 일에 대해서는 通文을 이용했지만, 실무자 차원의 업무연락은 私通이라는 양식의 문서를 이용했던 것이다. 이 문서는 사통의 전형적 예에 속하는데, 官府에서 결정한 분배전의 처리지침과 그 時限 등을 적시하고 있다. 이 같은 일은 조선시대 양반이 직접 당당하기에는 정서상 맞지 않는 것이었다. 이 또한 牌旨에서와 같이 양반집단이 그들에게 예속되어 있던 소속인들에게 실무적인 일을 위임하면서 생긴 관행이라고 판단된다.
둘째, 純祖대 金祖淳을 중심으로 하는 안동김씨 일파의 세도정치하에서 영남지역 사족들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영남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김조순의 5대조인 金昌集 사우의 新建과 송시열·송준길 이래로 이선·민진후 등 노론들의 계속된 伸寃노력으로 復爵된 金宗瑞 祠宇의 重建에 필요한 자금의 모집에 적극적이었다. 老論 時派系인 김조순 일파에 잘 보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김종서는 당파와 무관한 인물이지만, 그의 후손들이 송시열 등 노론계열과 혈연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 송시열의 5대조부는 김종서의 姪女壻였으며, 김종서의 6세손인 김수언의 딸 순천김씨는 沙溪 金長生의 後妻로 출가하였다. 또한 후대에 김종서 신원운동을 전개한 이선은 송시열의 문인이었고, 민진후 역시 송준길의 외손이자, 송시열의 문인이었다. 이외에도 김종서와 함께 제향 되었던 金文起 등의 死六臣 중 일부는 영남에 연고를 둔 자들이었지만 영남지역의 사족들은 별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김문기의 위패는 1864년 공주의요당서원에서 義城의 德陽書院으로 후손들이 옮겨와 제향함으로써 당색을 분명히 하였다. 결국, 김창집, 김종서를 제향하는 건물의 신축 및 중건에 필요한 자금의 수합이 원활치 않았던 것은 영남지역이 오랫동안 정치적으로 소외되어 오면서 기득권 세력에 대한 거부감이 팽배한 가운데 전통적으로 남인의 입장을 고수하던 영남인들의 반노론 정서와 19세기 들어 증가한 개별 祠院들의 경제적 어려움도 한 요인이 되었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조선후기 원사 건립에 있어서 각처의 校院에서 부조를 주고받던 관행이 확대되는 것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일반적으로 19세기 이래로 문중서원이 증가하면서 서원 건립 자금은 제향인에 따라 후손과 道內 혹은 鄕內 유림들의 부조로 건립이 진행되었다. 타도에 부조를 요청하는 것은 매우 특별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여주의 유생들이 김창집을 제향하는 書社를 건립하면서 통문을 보낸 것은 그가 19세기 초 세도정권하에서 실세인 김조순의 5대조이자, 관향이 안동이기 때문이다. 즉, 당대의 권력과 관향을 내세워 영남지역 유림들의 부조를 요청하였던 것이다. 공주 요당서원의 경우에도 현직 관료를 진신유사로 내세워 영남지역 유림들을 압박하는 한편, 제향인들 중 경상도와 직·간접적인 관련이 있는 인물이 다수 있다는 점을 내세워 영남 유림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요청하고 있었다. 이상과 같이 이 통문은 19세기 초 정치권력에서 소외된 경상도 유림들의 실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일정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古文書集成』50, 안승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0
『史學硏究』68, 임선빈, 한국사학회, 2002
이병훈,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