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慶尙道觀察使가 慶尙道 英陽縣에서 거두어지고 있는 각종 雜稅 부과에 대한 개선안을 英陽縣監에게 지시하며 내린 關旨
[내용 및 특징]
1886년 3월 慶尙道觀察使가 내린 關旨이다. 수급자가 별도로 명기되어 있지 않은데, 慶尙道 英陽縣의 英陽鄕校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英陽縣監에게 내려진 것으로 여겨진다. ‘巡營關旨’라는 제목으로 시작되며, 별도의 着官과 署押, 그리고 官印 등이 확인되지 않기에, 보아 謄書된 문서임을 알 수 있다. 경상도관찰사가 관지를 통해 지시하고 있는 내용은 영양현에서 거두어지고 있는 각종 雜稅에 대한 개선이다.
관지 서두에는 本邑의 鄕民들이 조세 따위를 토지 면적에 따라 배정하는 結排와 집집마다 거두는 세였던 戶斂 문제로 聯訴한 사실을 밝혀 놓았다. 영양현에서 잡세 문제에 대한 지속적인 청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경상도관찰사가 관련 文簿 등을 거두어 案에 따라 샅샅이 조사해 보니, 아전의 농간과 백성의 괴로움을 대략 이해하였는데, 그 중에서 가장 놀랍고 탄식되는 일은 邑用, 즉 읍에서 사용하는 추가 징수분이 과도하게 많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이어 邑에 이렇게 허다한 納, 즉 잡세가 아전들에 의해 부과되고 있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징수이며 많은 부담을 주는 것이니, 영양현 향민들이 일제히 소송하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며, 향민들의 청원을 동조하고 있는 것이다.
경상도관찰사가 지적하고 있는 영양현의 잡세는 군액에게서 정해진 거두어들이는 錢과 木 이 외의 것과 各司의 禮木과 疏箚, 朝報, 周報 등의 명목으로 부과되는 錢 등이다. 三軍府 磨勘錢은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상황이며, 工曹 上納은 이미 받았음에도 米와 木을 거두어들이고 있으니, 이것은 명백히 아전들의 濫食이요, 民의 세금을 마구 징수하는 행위임을 지적한 것이다. 따라서 各年에 이미 징수한 條는 일일이 推尋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다만 工曹의 木價는 木과 鐵을 납부하는 데 있어 公役의 편의에 쫒아 예전부터 관례에 따라 편안한 것을 따른 것이니 일단 유보한도고 하였으나, 이미 삼군부가 해체되었음에도 징수한 것이 있으니, 매년 거두어들인 51냥 5전은 빨리 해당 吏處로부터 徵捧한 뒤 수에 맞추어 封留하고, 나머지 錢과 木은 모두 除下할 것을 지시해 놓았다. 삼군부는 興宣大院君 집권기에 부활하였으나, 실각 후 다시 해체된 기관이나, 관련 부세가 영양현에 잔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工曹에 상납하는 가운데 발생하는 情太 등도 실제 邑用에 맞추어 區處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어 각종 부세, 그 중에서도 잡세의 문제에 대해 거론하였다. 먼저 結價는 上納과 邑用을 고려하여 징수하는 것이 옳기에, 지금 巡營에 논보된 장부에 따라 出秩하라고 지시해 놓았다. 고을 常米의 경우 지난 1884년과 1885년에 순영의 조치로 줄인 것이 있으나, 오히려 민들에게 더욱 거두어들이니 공평한 부세에 많은 비방이 쌓이게 되었으니, 빨리 조사하여 추심하는 거사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細木價의 경우 다른 고을에는 없는 부세이므로 마땅히 다른 官下로 移錄할 것이며, 牛皮價는 당초 소출되는 수가 대략 헤아린 것이니 정확한 조사가 필요함을 밝혀 놓았다. 더구나 皮索價는 있지도 않은 명분이기에 부당한 부세라고 하였다. 이에 경상도관찰사는 작년 分排條 993냥 6전 내에 182냥 5전 2푼의 已納條는 제하고, 그 나머지 751냥 8푼은 특별히 시행하지 말며, 그 중에 혹시 이미 거둔 것이 있으면 환급하라고 지시해 놓았다. 그 외 각종 未捧條는 옛 장부를 살펴보고 다시 작성하며, 牛皮斤 역시 실제 도살 되는 소의 숫자를 보고한 후 다시 작성하라고 지시하였다.
관지의 말미에는 지금 矯革하는 ‘軍田之貢’과 ‘官府之納’은 후일의 항식이 되어야 함을 당부하고 있다. 이에 우선적으로 甘辭로 깨우친 뒤, 향후 1년 내에 結斂과 戶斂, 錢과 木의 排捧條는 조항 별로 일일이 名目을 작성하여 다시 논보하라고 하였다. 각종 잡세를 정리해서 논보하면, 그것을 살펴보고 실제 징수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의도이다. 그렇게 완성된 장부는 다시 營邑과 各面에 배치하여 향후, 잡세의 추가 징수로 인한 폐단이 일어나지 않도록 당부하고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부세 수취의 일면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시대 수취 체제는 기본적으로 일원화되지 못한 상황에서, 각종 잡세가 여러 명목으로 부과되었었다. 그런 가운데 각종 폐단이 발생하였는데, 가장 큰 이유는 과세 표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데 있었다. 이러한 부분은 해당 고을의 邑用으로 사용되는 경우를 제외한, 탐관오리와 아전들에 의한 많은 부정을 초래하였다. 각종 명목으로 만들어진 부세는 주로 전답에 부과되었는데, 본 자료에서 확인되는 부세의 상당수도 전답에 부과된 錢과 木임을 알 수 있다. 19세기 토지세의 비중이 많이 높아지는 연유 중 하나가, 잡세가 대부분 전답에 부과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英陽郡誌』, 英陽郡誌編纂委員會, 197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朝鮮後期 地方財政硏究』, 장동표, 國學資料院, 1999
이광우,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