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부터 1909년까지 慶尙北道 眞寶郡 소재 眞寶鄕校 校任으로 활약했던 인사들의 명단과 교체 연월을 기록한 서책.
遞任錄
[내용 및 특징]
지금의 慶尙北道 眞寶郡에 위치한 眞寶鄕校의 교임 명부이다. 진보향교는 한말 행정구역 개편까지 慶尙道 眞寶縣에, 자료가 작성되던 1896년부터 1914년까지는 慶尙北道 眞寶郡에, 이후 현재까지는 慶尙北道 靑松郡에 소재하고 있다. ‘遞任’이라는 자료의 표제에서 확인되듯이 진보향교 교임의 교체 연월과 명단을 기재해 놓았다. 현재까지 진보향교에는 모두 세편의 『遞任錄』이 전해지고 있는데, 본 자료는 그 중에서도 1902년부터 1909년까지의 교임을 명기하고 있으며 세편 중 두 번째로 작성된 것이다.
본 『遞任錄』에는 별다른 序文이나 자료의 편찬 과정을 언급한 기록은 없으며, 오로지 遞任 연월과 교임의 성명, 그리고 현직 郡守나 관직 경력이 있을 경우 세주로 해당 직임을 기재해 놓았을 뿐이다. 교임은 都有司 1인, 掌議 1인이다. 영남 지방에 위치한 향교의 경우 首任의 명칭이 도유사인데, 진보향교도 그러한 추세를 따르고 있다. 반면 掌議는 1명만 두고 있으며 有司나 色掌, 또는 東西齋 별로 임명되는 다른 교임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러한 추이는 본 자료 이전에 작성되어 1836년부터 1902년까지의 교임을 기록한 『遞任錄』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아울러 『遞任錄』一에 이어 장의를 역임했던 인사가 도유사로 임명되는 경우가 나타나는데, 당대 진보 지역의 유력한 재지사족 가문 출신 가운데 명망 있던 인사가 유림의 추천을 받은 후, 수령의 승인을 얻는 과정을 거치면서 임명된 듯하다. 이와는 달리 李中喆과 鄭衡澤처럼 眞寶郡守를 역임하면서 도유사를 맡은 인사들도 확인된다. 실제 조선시대에는 지방 수령이 ‘興學’의 명분으로 향교 교임을 역임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비슷한 이유로 진보군수들도 도유사를 맡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 외 朴尙範은 校理로 있으면서 도유사를 맡았고, 申相翼과 李庭久는 進士 경력을 가지고 도유사를 맡았었다.
교임 가운데 도유사를 기재한 회수는 61회에 이르는데, 이중 연임자를 제외하면 55명이 실제 도유사를 역임한 것으로 나타난다. 도유사 역임자 55명 중 현직 군수였던 2명을 제외한 53명을 성씨별로 나열하면 權氏 20명, 申氏 19명, 李氏 7명, 金氏 4명, 朴氏 2명, 許氏 1명 순이다. 반면 장의를 기재한 회수는 60회로, 이중 연임자를 제외하면 실제 28명이 장의를 역임한 것으로 나타난다. 장의 역임자 28명을 다시 성씨별로 나열하면 權氏 14명, 申氏 6명, 李氏 3명, 金氏 1명, 朴氏 1명, 孫氏 1명, 鄭氏 1명, 孫氏 1명 순이다. 전반적으로 權氏, 申氏, 李氏의 비중이 높게 나타나는데, 『遞任錄』一의 교임 성씨 분포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조선시대 일반적인 교임의 임기는 1년이었지만 후기로 갈수록 그 기간이 짧아지는 양상이었으며, 한말에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 본 자료에서 확인되는 한말 진보향교의 교임 임기도 매우 짧은데, 이 기간 동안의 실제 교임 교체 회수를 보면 1902년에 도유사 3회, 장의 2회, 1903년에 도유사 6회, 장의 2회, 1904년에 도유사 6회, 장의 3회, 1905년에 도유사 2회, 장의 2회, 1906년에 도유사 5회, 장의 4회, 1907년에 도유사 20회, 장의 10회, 1908년에 도유사 11회, 장의 5회, 1909년에 도유사 9회, 장의 5회인 것으로 확인된다. 특히 향교 운영의 살림을 담당했었던 장의보다 수임인 도유사의 임기가 매우 짧게 나타나 명예직의 성격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자료적 가치]
한말 향교 운영의 추이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시대 향교는 본연의 교육과 제향을 통한 교화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지역 사림들의 향촌사회활동 장소로서도 활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사회적 변동 추이와 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 붕괴에 따라 향교 교임의 권위도 약화되던 추세였다. 특히는 19세기 후반의 신분제 폐지, 그리고 근대식 교육기관의 보급, 일제의 향교 통제 정책 등에 따라 향교의 권위 약화는 더욱 심화되어 갔다. 본 『遞任錄』에 기재된 1902년부터 1909년까지의 교임 교체 기록은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확연히 뒷받침 해준다. 한편, 진보향교 교임의 성씨 분포를 확인해보면 權氏, 申氏, 李氏의 비중이 높게 나타나는데, 이러한 추세는 19세기 진보향교 교임 분포와 큰 차이가 없다. 이들의 성관은 각기 安東權氏, 平山申氏, 眞城李氏 등으로 조선후기 이래 이들 가문들에 의해 향교를 중심으로 한 진보 지역 鄕權이 주도되고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조선후기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민음사,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경성대학교 출판부, 1992
이광우,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