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6년부터 1902년까지 慶尙北道 진보군(眞寶郡) 소재 眞寶鄕校의 校任으로 활약했던 인사들의 명단과 교체 연월을 기록한 서책.
丙申八月中元修正眞寶鄕校遞任錄一
[내용 및 특징]
지금의 慶尙北道 靑松郡에 위치한 眞寶鄕校의 校任 명부이다. 진보향교는 19세기 후반까지 慶尙道 眞寶縣에 소재하였으나, 자료가 작성되던 1896년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당시에는 慶尙北道 眞寶郡에 소재한 상황이었다. ‘遞任’이라는 자료의 표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校任의 명단과 함께 교체시기를 명기해 놓았다. 현재까지 진보향교에는 모두 세편의 『遞任錄』이 전해지는데, 그 중에서 본 자료는 1836년부터 1902년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다. 1836년 이전의 『체임록』은 확인되고 있지 않아 진보향교의 교임을 확인 할 수 있는 자료로는 본 자료가 가장 오래된 것이다. 표제와 序文의 작성 연도로 보아 『遞任錄』一은 1896년 8월에 엮여진 것으로 확인된다. 1836년부터 1896년까지의 교임과 교체시기를 정리하면서 본 자료를 엮어 놓은 것이다. 다만 1897년부터 1902년까지의 체임 기록은 성책이 이루지고 난 이후, 校任이 갱신되면서 추가 기재한 것으로 여겨진다.
먼저 『遞任錄』一의 서문에 해당되는 權秀元의 글에는 본 자료가 엮여진 경위와 의의를 간략히 언급해 놓았다. 이에 따르면 진보향교에는 『任錄』이라는 교임 명단이 존재하여 儒籍을 중시하고 선배가 학문을 권장하던 의의를 추모하였으며, 특히 교임의 首任과 副任 姓銜을 기재해 존중하는 전통을 유지해 왔었다고 나타나 있다. 또한 진보향교의 운영이 李滉이 권장한 鄕學의 전통을 계승했음을 밝혀 놓았다. 이는 『遞任錄』 작성 이전 『任錄』이라는 별도의 교임 명단이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근래에 발생한 ‘掇院之變’ 이후 故事와 文籍이 대거 毁盡되는 변을 당하게 되었으며, 오직 향교에 보관되어 있는 『任錄』 2책만이 선배들의 성과 휘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로 남게 되었음을 한탄하고 있다. 즉 서원훼철령 이전까지 경상도 진보현에는 향교와 더불어 서원 관련 자료가 남아 있어 향촌의 질서를 주도하는 재지사족의 명부를 확인할 수 있었으나, 서원훼철령 이후 향촌의 유력 인사 명부는 『任錄』만이 남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任錄』이 『遞任錄』으로 새롭게 엮여진 것은 眞寶縣監 任百淳의 재임 도중인 1896년 8월이었다. 기존에 있던 『任錄』이 많이 훼손되어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현감 임백순이 종이를 지급해 주어 다시 한통을 精寫케 하니, 이에 權炁奭이 깨끗이 써서 『遞任錄』을 엮게 되었다고 한다. 향촌 질서와 관련된 서원 등의 자료들이 훼진된 상황에서, 향촌 질서를 확인하는 새로운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향교 『任錄』을 『遞任錄』으로 개편하였던 것이다. 한편, 서문에서 확인되는 『遞任錄』 편찬 관련 인물들은 모두 진보향교의 교임을 역임했던 인사들이다. 편찬을 후원했던 현감 임백순은 1895년 都有司를 역임하였었고, 권수원과 권기석도 1896년 이전 각각 도유사와 掌議를 역임했던 경력이 확인된다.
『遞任錄』一에서의 역대 진보향교 교임은 1836년 8월부터 1902년 8월까지 기재되어 있다. 교임으로는 都有司와 掌議만 확인된다. 일반적으로 경상도 소재 향교의 경우 校任 가운데 首任을 도유사라 칭했는데, 진보향교도 수임을 도유사로 불렀던 것이다. 도유사 이외에도 副任으로 장의를 두고 있다. 이외 色掌과 有司 또는 東齋와 西齋 별로 부여된 교임은 확인되지 않는다. 진보향교의 경우 보통 도유사 1명, 장의 1명 체제로 유지되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수임 없이 장의 혼자만 임용되는 경우도 몇 차례 확인된다. 다만 1897년 1월에서 4월까지 한 차례만 도유사 대신 都執禮, 장의 대신 公事員이라는 명칭의 교임으로 임명되나 곧바로 도유사와 장의 체제로 환원된다.
진보향교의 도유사와 장의도 다른 향교와 마찬가지로 지역 내 명망 있는 인사 가운데 향교에서 자체적인 추천 과정을 거쳐 수령의 승인 하에 임명된 듯하다. 여기에는 承旨나 參奉을 역임했던 인사들도 포함되어 있다. 대부분 지역 인사가 임명되었지만 수임인 도유사의 경우 수령이 위촉되기도 하였다. 1895년 9월 도유사로 임명되었던 진보현감 임백순을 비롯하여 李先耆, 李根厚, 洪觀錫, 柳沂秀, 朴海聞, 王濟千, 李周儀, 金東潤, 兪正憲까지 모두 10명의 현감이 도유사를 역임한 것으로 나타난다. 조선시대 수령들 가운데서는 향교의 首任을 직접 맡으면서 ‘興學’을 도모하기도 했는데, 위의 수령들이 수임을 맡은 이유도 비슷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장임 역임자 가운데서는 훗날 도유사로 임명되는 비율이 높게 나타난다.
『遞任錄』에는 遞任 연월, 교임, 성명만 기재하여 다른 인적사항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교임별로 성씨 분포는 확인이 가능한데, 도유사의 경우 누적 임명 회수가 207회(都執禮 1회 포함), 장의는 누적 임명 회수가 230회(공사원 1회 포함)이다. 연임한 자와 수령 10명을 제외한 도유사 역임자를 계산하면 1836년에서 1902년까지 모두 182명이 도유사를 역임한 것으로 확인되며, 이들을 성씨별로 나열하면 申氏 75명, 權氏 56명, 金氏 14명, 李氏 13명, 鄭氏 7명, 朴氏 6명, 趙氏 4명, 孫氏 2명, 安氏 2명, 崔氏 2명, 柳氏 1명 순이다. 같은 방식으로 장의를 계산하면 모두 130명이 장의를 역임한 것으로 확인되며, 성씨별로 나열하면 權氏 51명, 申氏 34명, 金氏 12명, 李氏 12명, 朴氏 7명, 安氏 5명, 鄭氏 4명, 柳氏 2명, 孫氏 2명, 南氏 1명 순으로 나타난다. 이들 성씨 중 주요 성관은 安東權氏, 平山申氏, 密陽朴氏, 眞城李氏 등으로 이들 가문들에 의해 조선후기 진보향교 운영이 주도되었음을 추정 할 수 있다.
일반적인 향교의 경우 교임의 임기가 보통 1년이지만 1836년 이후 진보향교 교임의 임기는 1년을 채우는 경우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그나마 1년을 채운 것으로 여겨지는 인사들도 『遞任錄』一의 초반 기록에서만 확인된다. 후기로 갈수록, 그 중에서도 19세기 후반 이후에는 임기가 매우 짧게 나타나며 같은 달에도 교체되기도 하고 1년에 수회에 걸쳐 교체가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에는 향교 교임의 위상 약화라는 시대적 분위기와 맥을 같이한다. 19세기 후반부터 근대식 교육기관이 설립되고 향교가 외세에 의해 간섭을 받기 시작하면서, 재지사족들의 활동처로서의 향교 권위가 날로 위축되고 있던 상황이 반영된 것이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향교 운영의 추이와 진보 지역 재지사족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遞任錄』一에는 향교 교임으로 도유사와 장의가 확인되며, 이들의 遞任 연월만 자료에 기재되어 있다. 이 자료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는 것은 진보향교 校任의 간략한 구성 현황과 체임 현황, 그리고 교임 역임자의 성씨 정도이다. 하지만 遞任 현황, 특히 임기의 추이는 19세기 향촌사회 질서의 변화상, 그리고 19세기 후반 근대식 교육의 도입에 따른 교육 환경의 변화상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한편, 현재까지 확인되는 舊 眞寶縣 지역의 조선후기 향촌사회사 관련 자료는 매우 부족한 편이다. 鄕案이나 鄕約 관련 자료, 또는 書院 관련 자료도 적을뿐더러 향교 자료도 『遞任錄』을 제외하고는 모두 20세기 이후의 자료만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자료 현황 때문에 『遞任錄』一은 사실상 조선후기 진보 지역의 향촌질서 주도와 유력 사족 가문의 동향을 살펴보는데 있어 중요한 자료로 판단된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조선후기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민음사,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경성대학교 출판부, 1992
이광우,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