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6년 慶尙道 玄風縣 玄風鄕校에서 작성한 역대 향교 都有司 명부로, 1632년 9월부터 1765년까지의 도유사를 정리한 뒤 1838년까지의 도유사를 추록한 자료
[내용 및 특징]
1632년 9월부터 1838년까지의 慶尙道 玄風縣 玄風鄕校(現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소재)의 역대 都有司 명단을 기록한 자료이다. 도유사는 향교 校任 중 향교를 대표하며,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首任 자리이다. 향교 首任은 지역마다 명칭이 다른 경우도 있으나, 대체로 영남의 향교는 도유사라 칭하였다. 1632년부터 1838년까지의 도유사 명부를 수록한 본 자료가 엮여진 것은 1766년이다. 즉 1632년부터 1765년까지 임명되었던 도유사를 정리하여 본 자료를 엮었으며, 이후 1838년까지의 도유사는 追錄한 것이다.
본 자료의 서두에는 ‘乾隆 丙戌(1766) 10월 초4일’에 작성된 嚴友光의 記가 수록되어 있다. 작성자 엄우광은 이전해인 1765년 현풍향교 도유사로 임명된 상태로, 임명 기록은 본 자료 명부에서 확인된다. 記에서는 도유사안이 새롭게 편찬되는 경위를 간략히 언급해 놓았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도유사로 있던 엄우광이 어느 날 향교의 古蹟을 살펴보았는데,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都有司案 하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엄우광이 이를 열람하니, 여기에는 현풍향교 수임을 역임했던 先父老의 諱가 나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훼손이 심하여 온전한 것은 3장 밖에 없었기에 향후 그 명부가 세상에 전해지지 않을까 염려를 하게 된다. 이에 엄우광과 同任 郭相垕와 金錫圭는 이것이 尊慕의 도리가 아니라 하여, 새롭게 본 책자를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同任이라는 명칭으로 보아 당시 곽상후와 김석규는 도유사를 보좌하고 실질적으로 향교 운영을 주도하던 교임인 掌議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새로 만든 책자에 옛 기록을 보완하여 1632년부터 도유사를 역임한 인사들의 성명을 명기해 놓았으니, 향후 교임들은 이후에 임명되는 도유사의 성명도 여기에 추록하기를 당부하면서 記를 마치고 있다.
명부의 가장 서두에는 郭以昌이라는 인물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 아래에는 임명 연월인 ‘壬申九月’을 명기해 놓았다. 곽이창의 생년이 1590년, 沒年이 1654년인 것으로 보아 壬申年은 1632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에는 金相玉이라는 인물이 戊戌年에 行公했다고 기재되어 있어, 1838년 기록이 마지막임을 알 수 있다. 명부는 역대 도유사 역임자를 순차적으로 나열한 뒤, 그 아래에 세주로 임명 시기 또는 行公한 干支를 기재하는 형태로 구성하였다. 임명되었으나 行公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未行公’이라 기재하였으며, 改名 사실도 밝혀 놓았다. 하지만 엄우광의 記에서 나타나듯이 1766년 자료를 작성할 당시 근거 자료가 된 도유사안이 이미 심하게 훼손되어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1766년 이전 도유사, 특히 17세기에 임명되었던 도유사는 임명 시기를 명확하게 고증 할 수 없어 상당수는 성명만 기재되어 있다. 본 자료에서 임명 또는 行公 연원을 명기하지 않은 회수가 모두 82회인데, 이 중 79회가 1766년 이전임은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향교 도유사의 임기는 보통 1년으로 설정되어 있었지만 이를 일률적으로 지키는 경우는 드물었다. 현풍향교의 도유사 임기도 일률적이지 않게 나타난다. 첫 번째로 수록된 곽이창은 1년 6개월 간 도유사를 역임하였으며, 엄우광도 1년 이상 도유사 직을 유지하였다. 하지만 대체로 1년 안에 교체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본 자료 중반부 이후의 도유사 교체 기록에 따르면, 한 해에 3회 이상 교체되는 경우도 많으며, 같은 달에 교체되는 기록도 나타난다. 본 자료에서는 206년 간 도유사 역임자가 244회로 나타나, 재임 기간은 평균 1년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1766년 이전의 기록은 자료 훼손으로 모든 역대 도유사를 수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교체 빈도는 후기로 갈수록 잦아지는 추세이다. 이러한 부분은 조선후기 사회적 문제, 특히 신분상의 문제에 따른 향교 校任의 권위 약화를 반영한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본 명단을 통해 역대 도유사 역임자의 성씨 분석이 가능하다. 割名되어 이름을 확인 할 수 없는 1760년의 한 군데 흔적을 제외하고, 244회에 걸쳐 임명된 도유사를 성씨별로 나열하면 郭氏 148회, 金氏 52회, 嚴氏 18회, 朴氏 9회, 裵氏 6회, 成氏 6회, 蔡氏 4회, 羅氏 1회 순으로 나타난다. 郭氏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데, 이들은 현풍 지역의 土姓인 玄風郭氏들이다. 조선후기 향교의 교임이 유림의 공론에 의해 임명됨을 감안한다면, 향교 운영에 있어 현풍곽씨의 영향력이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향교 운영의 일면과 현풍 지역 재지사족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도유사는 향교 校任 중 首任으로, 보통 지방 유림의 公議를 거쳐 薦望을 하면 수령이 결정하는 형식으로 임명되었다. 비록 향교는 官學이었지만 지역 내에서 德望있고 文行이 있으며 나이가 많은 인사를 지역 유림의 공론을 통해 임명하는 자치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經國大典』을 살펴보면, 縣에는 향교의 수임으로 訓導라는 정9품의 교관을 임명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향교가 교육기관으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사족들이 향교에서 교육하기를 꺼려하면서 점차 훈도가 사라지고 유림의 공의로 수임이 자체적으로 선발되기 시작하였다. 그 시점은 고을마다 다르나 대체로 17세기 이후라고 여겨진다. 본 자료에서 확인되는 현풍향교의 가장 오래전의 도유사 임명 기록이 1632년 9월로, 훈도가 없어지기 시작하는 시점과 비슷하다. 현풍향교에서 훈도가 없어지는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본 자료 서두에 수록되어 있는 도유사의 임명 시기와 비슷할 것이라 추정된다.
한편, 본 자료에서 확인되는 역대 도유사 중 가장 많은 성씨를 배출한 것은 郭氏이다. 1632년부터 1838년까지 확인되는 도유사 중 거의 2/3 가량이 곽씨, 즉 현풍 지역의 土姓인 玄風郭氏인 것이다. 조선시대 향교가 단순히 교육 및 교화의 기능만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현안을 논의하고 수령을 보좌하는 일종의 자치 기구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다. 이들은 書院이나 鄕廳과 더불어 향교를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자치기구, 즉 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 유지 기구로 활용하며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 나갔다. 이에 따라 자연히 도유사도 지역 내 유력한 사족 가문 출신 인사로 선임되었고, 교임을 많이 배출한 가문일수록 향교 운영뿐만 아니라 지역 여론에도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다. 조선중기 이래 현풍현에는 토성인 현풍곽씨를 비롯하여 瑞興金氏, 淸道金氏, 慶州金氏, 善山金氏, 密陽朴氏, 順天朴氏, 寧越嚴氏, 平康蔡氏, 星州裵氏, 壽城羅氏 등의 사족 가문이 분포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향교를 중심으로 한 고을 내 영향력은 현풍곽씨가 압도적으로 높았던 것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경성대학교 출판부, 1992
이광우,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