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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2년 경상도(慶尙道) 청도군(靑道郡) 정명록(正名錄)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5+KSM-WZ.1712.4782-20130630.Y1310603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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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정치/행정-조직/운영-향안
작성주체 청도군 향청
작성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작성시기 1712
형태사항 크기: 34 X 27
판본: 필사본
장정: 선장
수량: 1책(37면)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청도 청도향교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동교길 36 문중소개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학로 280

안내정보

1712년 경상도(慶尙道) 청도군(靑道郡) 정명록(正名錄)
1712년 작성된 경상도(慶尙道) 청도군(淸道郡)의 향안(鄕案)이다. 1661년, 1693년, 1700년 세 차례에 걸쳐 청도 지역 향청(鄕廳) 향원(鄕員)으로 입록되었던 인사 214명의 명단을 수록해 놓았다. 향청은 조선시대 지역 양반들이 주도하던 자치행정기구였던 유향소(留鄕所)의 명칭이 대략 17세기 이후 변경된 것으로 향원은 그 구성원을 뜻하며 향안은 향원의 명단이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이러한 향청 운영을 주도함으로써, 수령과 향리(鄕吏)를 견제함과 동시에 지역 내에서의 지위를 유지해 나갔었다. 즉 향안에 입록되어 있다는 것은 지역 여론을 주도할 만큼 사회적 지위가 있다는 것이며, 지역 내 명망 있던 양반 가문 출신임을 뜻한다.
정명록(正名錄)』이라 이름 붙여진 본 향안에는 향원의 성명과 더불어 관직이나 직역(職役)을 함께 기재해 놓았는데, 청도 지역 여론에 영향력이 높은 가문일수록 많은 입록자를 배출하였다. 『정명록』에 입록된 214명을 성관별로 분석하면, 밀양박씨(密陽朴氏), 고성이씨(固城李氏), 경주이씨(慶州李氏), 의흥예씨(義興芮氏), 김해김씨(金海金氏), 경주이씨(慶州李氏), 청도김씨(淸道金氏), 재령이씨(載寧李氏) 가문 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 가문에 의해 18세기 전후 청도 지역 여론이 주도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광우,이수환

상세정보

1712慶尙道 淸道郡 鄕廳에서 작성한 향안으로 1661년부터 1700년까지 鄕員 214명을 수록
正名錄
[내용 및 특징]
1712慶尙道 淸道郡의 鄕廳에서 작성한 鄕案으로, 표제는 『正名錄』이다. ‘正名’이라는 표제에서 나타나듯이, 이전의 것을 새롭게 정리하는 차원에서 작성된 향안이다. 『정명록』은 1661년, 1693년, 1700년에 각각 작성된 좌목, 1712년에 작성된 李光節의 謹誌, 1661년에 작성된 李燦漢의 書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정명록』은 1661년 작성된 『正名舊錄』과 함께 엮여져, 1911년 『淸道鄕案正名錄』으로 간행되었다. 『청도향안정명록』에는 두 자료와는 달리 입록자의 본관도 확인된다. 또한 근래까지 淸道鄕校에는 『정명록』과 『정명구록』을 비롯하여, 7편의 개별 향안이 전해져 17세기 청도 지역 재지사족의 동향을 살펴보는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좌목은 입록자의 관직과 직역 등을 먼저 기재하고, 이어 성명을 수록해 놓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만 1661년 좌목의 경우 앞에 ‘仙’이라 명기된 흔적이 50군데서 확인된다. 1661년 이후 어느 시점에 좌목에 수록된 인사들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작고한 인물들을 간추려 적기한 듯하다. 『정명록』에 수록된 첫 번째 좌목은 ‘辛丑(1661) 4월 29일’의 좌목으로 모두 115명이 입록되어 있다. 이들을 성씨 별로 나열하면, 朴氏 46명, 李氏 40명, 金氏 10명, 芮氏 5명, 孫氏 4명, 崔氏 3명, 郭氏 3명, 元氏 2명, 張氏 1명, 潘氏 1명 순으로 나타난다. 이들을 다시 관직 및 직역별로 나열하면, 幼學이 72명으로 단연 많고, 다음이 忠義衛 26명이다. 그 외 宣務郞 4명, 通德郞 2명, 參奉 2명, 僉知 2명, 府使 1명, 僉使 1명, 訓導 1명, 同知 1명, 宣敎郞 1명, 承仕郞 1명, 進士 1명으로 나타난다. 말미에는 1661년 좌목 작성 당시의 座首 李球, 別監 朴自章朴衛漢의 성명 및 각각의 手決이 기재되어 있다.
두 번째 좌목은 ‘癸酉(1693) 2월 6일’의 것으로 46명이 입록되어 있다. 성씨별로는 박씨 16명, 이씨 14명, 김씨 9명, 예씨 3명, 곽씨 2명, 손씨 1명, 최씨 1명 순이며, 이들의 직역은 出身 1명만 기재되어 있고, 나머지는 비워져 있는데 모두 유학으로 추정된다. 당시 좌수는 李瑢, 별감은 芮碩薰朴瑞漢으로 모두 수결이 있다. 마지막 세 번째 좌목은 ‘庚辰(1700) 2월 3일’의 것으로 좌목으로 청도 지역에서 확인되는 향안 좌목 중 가장 늦게 작성된 것이다. 모두 53명을 입록하고 있으며, 성씨별로는 이씨 21명, 박씨 14명, 김씨 7명, 예씨 7명, 반씨 1명, 손씨 1명, 원씨 1명, 장씨 1명 순으로 나타난다. 이 중 진사 1명을 제외한 52명은 모두 유학이다. 당시 좌수는 예석훈이며, 별감은 李光時 1명만 기재되어 있다. 역시 각각의 수결이 확인된다.
이상 좌목 세 편의 입록자 모두를 성씨별로 나열하면 박씨 76명, 이씨 75명으로 두 성씨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외 김씨 26명, 예씨 15명, 손씨 6명, 곽씨 5명, 최씨 4명, 원씨 3명, 장씨 2명, 반씨 2명 순이다. 1911년 간행된 『청도향안정명록』에는 『정명록』에 수록된 인물들의 본관도 함께 기재되어 있는데, 이에 의하면 입록자 중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성관은 密陽朴氏, 固城李氏, 義興芮氏, 金海金氏, 慶州李氏, 淸道金氏, 載寧李氏, 玄風郭氏 임이 확인된다. 이들 성관은 17세기 이래 작성되었던 청도향안에 다수의 입록자를 꾸준히 배출하고 있는 가문이다.
좌목 다음에 수록된 謹誌는 ‘壬辰(1712) 7월 1일’ 이광절이 작성한 것으로, 그의 성명은 1693년 좌목에서 확인된다. 謹誌에는 『정명록』을 엮게 된 의의를 간략히 언급해 놓았다. 이에 따르면 先父老의 성명을 바르게 기록하는 것이 향안이기에, 후손된 입장에서 이를 잘 보존함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더구나 지금처럼 풍속이 어지러워 예전 같지 않은 세태에는 더욱 더 향안의 작성과 보존에 힘써야 됨을 강조하고 있다.
가장 말미에는 ‘신축(1661) 4월 晦’에 작성된 行郡守 李燦漢의 書를 수록해 놓았다. 이찬한은 1661년 좌목이 작성될 때의 淸道郡守로, 1656년부터 1661년까지 5년간 이 고을 수령으로 재임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이 書에는 『정명록』 작성의 의의를 언급하였다. 향안의 권위를 ‘金榜題名’, 즉 과거시험 합격 명단에 비유하였는데, 재주가 있으면 ‘金榜題名’에 들어갈 수 있으나, 향안은 재주가 있어도 입록되기 힘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니 지금 소중하게 간직하여, 후세에 입록자에 대한 시끄러운 일이 있어도 쉽게 고치지 말 것을 당부해 놓았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鄕案 작성의 추이와 17세기 후반기 청도 지역 재지사족들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중기 이래 재지사족들은 향안을 그들 중심의 향촌지배질서 유지 수단으로 활용해 왔었다. 이러한 향안을 배타적으로 작성해 나감으로써, 그들은 고을의 鄕廳 운영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정명록』에 다수 입록자를 배출한 성관일수록, 당시 청도 지역 鄕權을 주도했던 재지사족 가문으로 이해 할 수 있다.
한편, 『정명록』 입록자의 성관을 분석하면 전반적으로 土姓인 申, 金, 白, 李, 曺氏 보다, 이주한 성씨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입록자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밀양박씨, 고성이씨, 의흥예씨, 김해김씨, 경주이씨, 청도김씨, 재령이씨 가문 등은 17세기 이전 혼인과 복거 등을 통해 청도에 移居한 사족 가문이었던 것이다. 이들 가문은 16세기 전후 형성된 士林派와 연관 지어 생각 할 수 있다. 청도 출신의 金馹孫은 본관이 金海로 무오사화 당시 사림파를 대표하다 피화된 인물이며, 16세기 전반기 활약한 朴河淡朴河澄 등은 청도 지역 사림 형성에 큰 역할을 했던 인물들이다. 청도 지역의 향안은 17세기 전후 이들 후손들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18세기 전후 『정명록』이 작성될 때까지 지역 내에서의 지위를 유지해 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嶠南誌』,
『淸道鄕案正名錄』, 1911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민음사, 1990
申正熙, 嶺南大學校 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991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釜大史學』22, 張東杓, 釜山大學校史學會, 1998
이광우,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712년 경상도(慶尙道) 청도군(靑道郡) 정명록(正名錄)

正名錄
【仙】同知孫千一
【仙】幼學朴璣
幼學李稑
【仙】訓導崔建
【仙】幼學金胤先
【仙】幼學李穰
參奉李重慶
【仙】僉知朴東徵
僉知金軷
幼學潘溶
【仙】通德郞朴東孝
【仙】幼學崔遠
【仙】宣務郞朴東悌
【仙】宣務郞郭鴻翰
幼學朴東徽
【仙】幼學朴東信
【仙】幼學朴東老
通德郞朴東欽
【仙】幼學芮慎謙
【仙】幼學金轉
【仙】幼學朴東維
忠義衛李琛
【仙】幼學李櫓
宣敎郞朴東貞
幼學朴宣章
【仙】忠義衛李珉
【仙】宣務郞朴東溫
【仙】幼學朴東耈
【仙】幼學朴東緯
【仙】幼學元斗興
【仙】參奉李光義
【仙】幼學金潝
【仙】幼學金鐵堅
【仙】忠義衛李光元
【仙】忠義衛李光禮
【仙】幼學郭鴻習
忠義衛李珩
幼學朴興章
【仙】幼學張克後
【仙】幼學朴之荗
【仙】幼學孫錫
【仙】忠義衛李球
【仙】忠義衛李璈
【仙】忠義衛李光軫
幼學李處毅
【仙】幼學朴之慶
幼學朴彌章
僉使金友仁
【仙】幼學孫樹䉨
【仙】幼學朴東耆
【仙】幼學朴自章
【仙】幼學金漾
幼學李重毅
幼學朴東卨
忠義衛李珠
幼學李尙毅
【仙】宣務郞朴東柱
幼學崔慶章
幼學朴東章
幼學李恒毅
忠義衛李瑢
幼學朴東傳
【仙】幼學朴東宰
幼學朴東耋
幼學芮俊民
忠義衛李光斗
府使朴始漢
幼學朴衛漢
忠義衛李光星
幼學李惟毅
幼學芮碩蕃
【仙】幼學朴經漢
幼學朴東昱
幼學朴佑漢
忠義衛李光啓
幼學朴屛漢
幼學朴寅漢
幼學芮碩薰
【仙】幼學元萬始
【仙】幼學朴昌漢
幼學李好毅
進士朴泰漢
忠義衛李光國
忠義衛李光復
【仙】忠義衛李天耈
幼學朴賓漢
忠義衛李光廷
【仙】幼學金重夏
忠義衛李光鼎
忠義衛李光晋
【仙】幼學朴東彦
幼學李祐徵
幼學朴瑞漢
幼學朴之贇
忠義衛李光春
幼學芮碩荗
幼學李命毅
【仙】幼學朴翼漢
【仙】忠義衛李徵耈
忠義衛李光泰
【仙】忠義衛李光恒
幼學朴蓂
承仕郞朴啓漢
幼學金聲徹
忠義衛李殷耈
幼學朴東毅
忠義衛李斗回
幼學金聲達
幼學朴新漢
忠義衛李光履
幼學李祐徵
幼學孫汝伯
幼學朴齊漢
幼學朴東垶
【仙】幼學郭壽岺

辛丑四月二十九日座首李球[署押]
別監朴自章[署押]
朴衛漢[署押]
朴宗漢
郭壽巘
李汝馧
李光有
朴蔓
李光節
金聲呂
崔時翰
金聲頀
李斗赫
金峻行
朴隆漢
朴宜漢
孫必達
朴之賀
李光翼
朴師古
郭壽天
李景川
芮秀百
李光文
朴起漢
朴之貫
朴文軾
朴太古
李夏耈
金聲大
朴來漢
芮秀千
李培
朴文泰
金南杓
朴心休
朴心一
朴文謙
芮秀千
李培
朴文泰
金南杓
朴心休
朴心一
朴文謙
李光咸
李億耈
李夏兼
李應錫

癸酉二月六日
座首李瑢 [署押]
別監芮碩薰 [署押]
朴瑞漢 [署押]
進士朴尙古
幼學李光馨
張時傑
朴之賓
李光璧
李光奎
金聲韻
金英粹
金英績
朴世堂
元日省
芮秀三
朴文弼
朴重漢
李景洙
進士朴尙古
幼學李光馨
張時傑
朴之賓
李光璧
李光奎
金聲韻
金英粹
芮秀億
潘後泰
朴肇漢
孫碩麟
芮尙彬
朴履漢
芮秀九
李啇耈
李渭耈
李翼耈
金南健
李義耈
朴文漢
朴文升
朴廷實
李漢耈
芮秀五
金震一
李斗耈
李受耈
朴文源
朴樞漢
金世章
李儁耈
朴文性
李挺百
李望耈
李彦耈
朴廷筍
李德耈
李台耈

庚辰二月三日
座首芮碩薰 [署押]
別監李光時 [署押]
鄕案乃先父老正名之錄也粧以錦繡藏
諸櫃中則尊閣之擧誠謂至矣爲其子弟
者護之當如氈裘愛之亦如圭璧而不幸淳
風一慤鄕習不古偸窃汚衊之變曾出不
虞吾南士禮義之教到此掃矣寧不塞心
况且藏守失所反歸不敬之地其於後生崇
奉之道殊甚不安【光節】之平居扼腕者是耳
忝居憲席以來首謀典守之宜玆用拈閱
櫃藏精曩新舊名錄留于別處未知僉君子
謂之如何顒竢輿議悚仄亡
壬辰七月一日後學李光節謹誌
題名金榜有才則
非難而書名此冊雖
有才實難然則是冊
也不亦嚴且重乎錦
其衣藏之樻意非
偶然唯我父老永
珍勿褻正書此冊之
後則雖有橫議切
不撓改以爲恒式事
辛丑四月晦行
李燦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