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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6~1692년 경상도(慶尙道) 영양현(英陽縣) 영양향교(英陽鄕校) 응강안(應講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5+KSM-WZ.1686.4776-20130630.Y1311304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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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고강단자
작성주체 영양 영양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작성시기 1686
형태사항 크기: 23 X 26
판본: 필사본
장정: 선장
수량: 1책(7면)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양 영양향교 /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향교길 22-16 문중소개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학로 280

안내정보

1686~1692년 경상도(慶尙道) 영양현(英陽縣) 영양향교(英陽鄕校) 응강안(應講案)
1686년부터 1692년까지 경상도(慶尙道) 영양현(英陽縣) 영양향교(英陽鄕校)에서 치러진 고강(考講)의 응시자 명단이다. 영양현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양군으로 1683년 독립된 고을로 복현(復縣)되었다. 이에 일읍일교(一邑一校)의 원칙에 따라 영양 영양향교가 고을의 지방 관학으로 자리 잡게 되는데, 이러한 지역 내 흥학(興學)의 분위기 하에서 고을 내 유림들을 대상으로 한 고강이 이루어지고 본 자료가 작성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조선후기 향교의 고강이라 하면, 흥학 보다는 피역(避役)을 목적으로 입학한 교생(校生)을 추려내어 충군(充軍) 시킨다는 분위기가 강하였지만, 당시 영양 영양향교는 새로운 고을의 관학으로서 학문을 진작시킨다는 분위기 하에 고강이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이는 고강 응시자 대부분이 17세기 후반부터 작성되기 시작한 영양 영양향교집강안(執綱案)』의 교임(校任)으로 확인되고 있다는 점에서 뒷받침 할 수 있다. 고을 내 명망 있는 인사들이 향교 집강을 맡았기 때문에, 당시 응강안 수록 인물들의 고을 내 위상을 짐작 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응강안은 1686년부터 1692년까지 2년 마다 치러졌으며, 모두 44명이 고강에 응시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을 성씨별로 나열해 보면 14개 성씨가 참여한 것으로 확인되는데, 그 중에서도 조씨(趙氏), 남씨(南氏), 오씨(吳氏)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다. 이들의 성관은 한양조씨(漢陽趙氏), 영양남씨(英陽南氏), 함양오씨(咸陽吳氏)로 17세기말 영양현을 대표하던 양반 가문이었다. 17세기 후반 이들 가문은 지역적 위상을 바탕으로 향교 운영을 주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광우,이수환

상세정보

1686년부터 1692 사이 4회에 걸쳐 慶尙道 英陽縣 英陽鄕校에서 실시한 考講의 응시자 명단
應講案
[내용 및 특징]
1686년부터 1692년까지 실시된 慶尙道 英陽縣 英陽鄕校(現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소재)의 考講 응시자 명단이다. 첫 번째 응강안의 간지가 丙寅인데, 수록된 인물들의 생년을 감안할 때 1686년부터의 기록임을 알 수 있다. 자료 본문에는 4회에 걸쳐 실시된 고강 응시자의 성명만을 나열해 놓았다. 성명 아래에 개명된 이름을 부기한 흔적이 세 군데 확인되는데, 모두 자료 작성 이후 어느 시기 추가로 기재한 듯하다.
응강안에 수록된 고강 응시자는 모두 44명이다. 첫 번째 1686년 2월 응강안에 15명, 두 번째 1688년 2월 응강안에 13명, 세 번째 1690년 2월 응강안에 14명, 마지막 1692년 2월 응강안에 2명이 수록되어 있다. 비록 17세기 후반의 한정된 기록이지만 2년에 걸쳐 考講을 실시했음이 확인된다. 보통 향교의 고강은 봄과 가을 釋奠禮 이후, 해당 고을 수령의 주도 하에 봄에는 製述, 가을에는 講讀을 시험하는 것이 일반적인 원칙이었다. 응강안에 기재된 月이 2월인 것으로 보아 製述을 고강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그 원칙이 영양 영양향교에도 적용되었는지는 응시 과목을 기재한 자료가 확인되지 않아 명확히 알 수 없다.
본 응강안에 수록된 고강 대상자 44명을 성씨별로 나열하면 趙氏 12명, 南氏 7명, 吳氏 5명, 權氏 4명, 李氏 3명, 琴氏 2명, 金氏 2명, 孫氏 2명, 鄭氏 2명, 朴氏 1명, 申氏 1명, 辛氏 1명, 禹氏 1명, 朱氏 1명 순으로 나타난다. 趙氏, 南氏, 吳氏, 權氏의 비중이 높게 나타나는데, 이는 본 응강안뿐만 아니라 현재까지 영양 영양향교에 전해지고 있는 校生案이나 校任案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되는 추세이다.
[자료적 가치]
17세기 후반 향교 고강의 특색과 이 시기 영양현 지역 재지사족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시대 향교는 본연의 교육 기능보다 避役과 신분상승을 위한 수단, 祭禮 참여와 儒案 등록을 통한 사회적 지위 유지 및 확보, 그리고 재지사족의 향촌사회활동 기구로 활용되는 것이 일반적인 존재 양상이었다. 그 중에서도 피역과 관련된 부분은 국가 재정과 軍保의 감소라는 국가적 문제를 발생시키기도 하였다. 이에 정부 당국자는 피역을 위해 향교에 입적한 교생을 추려내어 充軍하기 위한 정책을 마련하였고, 그것이 仁祖 연간 이후 강화된 落講充軍制이다.
그러나 1686년부터 1692년까지 4회에 걸쳐 실시된 영양 영양향교의 고강은 피역자를 추려낸다는 정부의 의도 보다는 향교 본연의 기능인 興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양 영양향교가 소재한 영양현이 독립된 고을로 復縣된 것은 자료 작성 3년 전인 1683년이었다. 즉, 새롭게 독립한 고을의 관학에서 치러지는 고강은 한 고을의 興學과 관련하여 매우 의미 있는 행사라 할 수 있는 것이다. 落講充軍制가 실시되었지만, 전통적인 사족들은 고강을 기피하고 하층 계층은 免講帖을 매입함으로써, 실제 제도상의 효과는 미미한 분위기였다. 이러한 분위기와 무관하게 17세기 후반 영양 영양향교에서는 지역 내 명망 있는 인사들이 고강에 참여하여 興學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던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 응강안에 확인되는 인물 중 상당수가 17세기 후반부터 작성되기 시작한 영양 영양향교執綱案』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은 이러한 분위기를 뒷받침 해준다.
한편, 응강안에 수록된 인물들의 성씨를 확인해 보면, 趙氏, 南氏, 吳氏, 權氏의 비중이 높게 나타나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들 성씨의 姓貫은 漢陽趙氏, 英陽南氏, 咸陽吳氏로 17세기말 영양현 향촌지배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던 가문들이다. 향교가 단순히 교육 기능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향촌지배기구를 병행하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 이들 가문 출신의 인사가 본 응강안에 다수 확인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英陽郡誌』, 英陽郡誌編纂委員會, 1970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경성대학교 출판부, 1992
이광우,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686~1692년 경상도(慶尙道) 영양현(英陽縣) 영양향교(英陽鄕校) 응강안(應講案)

應講案
金沔
趙{永+頁}
南翼漢
金夏成
琴以武
趙{氵+冏+頁}
趙壽華
南錫祉
南錫祺
南後尹
趙{益+頁}
權斗夏
孫述祖
李時華
禹希逸
丙寅二月日
鄭埏
吳三說
李碩基
朴世鉉
吳三聘
趙德淵
南翼河
趙壽益
權永久
南時重
趙䫆
琴紏【改世昱】
孫立錫【改萬雲】
戊辰八月日
吳學曾
申世重
權載久
李秀葉
朱繼文
趙德亨
南翼老
鄭時玄
趙德久
吳三近
吳三愼
趙是光
權德齡
辛渭錫【改渭望】
庚午二月日
趙德臣
趙壽春
壬申二月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