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4년부터 1759년까지 慶尙道 河陽縣 河陽鄕校의 역대 校任 명단과 교체 연도를 기재한 서책
甲子以後河陽郡鄕校任事案鄕校任事案天
[내용 및 특징]
지금의 慶尙北道 慶山市 河陽邑에 위치한 河陽鄕校의 校任 명단과 교체 연도를 기록한 자료이다. 조선시대 하양향교는 慶尙道 河陽縣이라는 독립된 고을의 향교였으나, 현재는 경산시에 편입된 상태이다. 자료 표제에는 ‘甲子以後 河陽郡鄕校任事案 鄕校任事案天’이라고 명기되어 있지만 정확한 편찬 연대는 확인되지 않는다. 표제 가운데 ‘河陽郡鄕校任事案’이라는 글자는 가장 마지막 장에도 기재되어 있는데, 자료가 엮여진 이후 어느 시점에 명기한 듯하다. ‘河陽郡’이라는 지명이 사용된 1896년부터 1914년 사이에 기재된 것으로 여겨진다.
본문에는 교임인 都有司와 掌議 역임자 성명, 임명된 해의 간지와 節氣를 수록하였다. 교임은 일반적인 영남의 다른 향교와 마찬가지로 도유사, 장의 체제로 구성되어 있다. 향교의 首任으로, 향교 업무를 총괄하고 대표하는 도유사는 1인만 임명되었다. 도유사를 보좌하며 향교 실무에 간여하는 副任으로는 2명이 임명되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1명만 임명하는 경우도 나타난다. 그 외 色掌이나, 東齋 또는 西齋 별로 임명되는 교임은 수록해 놓지 않았다. 향교 교임의 임기는 보통 1년으로 설정되는 경우가 많으나, 그대로 지켜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대부분 1년 미만만 복무하는데, 하양향교도 마찬가지였다. 본 자료에는 교임이 새롭게 임명되는 해의 간지와 절기만을 수록하였는데, 한 해에 3회 이상 교체되는 경우가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한편, 본 자료에서 1684년부터 1759년까지 75년 간 도유사 또는 장의로 임명된 인원은 모두 479명으로 나타난다. 이중에는 장의를 역임한 경력을 가지고 도유사로 임명되는 인사가 다수 있다. 479명 가운데 중복되는 이름을 제외하면, 실제 75년 간 향교 교임 역임자는 190명이다. 190명의 교임은 다시 성씨별 분류가 가능한데, 다수 입록된 성씨 순으로 나열하면 曺氏 45명, 朴氏 27명, 許氏 25명, 李氏 21명, 金氏 16명, 鄭氏 13명, 黃氏 9명, 都氏 9명, 張氏 8명, 林氏 5명, 徐氏 3명, 崔氏 3명, 蔡氏 3명, 玄氏 1명, 全氏 1명, 羅氏 1명 순으로 나타난다. 대체로 曺氏, 朴氏, 許氏, 李氏, 金氏, 鄭氏, 張氏, 都氏 등의 성씨에서 많은 교임이 배출되었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향교의 사회적 기반과 인적 구성에 대한 사례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시대 향교는 단순히 교육 및 교화의 기능을 가질 뿐만 아니라, 지역 여론에도 큰 영향력을 끼치는 사회조직이었다. 비록 지역별 시기별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지역 내 유력한 재지사족 가문일수록 향교 운영에 대한 영향력이 높았으며, 그것은 校任의 인적 구성에도 반영되었다. 하양향교 任事案의 인적 구성도 지역 사족의 동향과 연관 지어 살펴 볼 수 있는 것이다. 본 任事案에서 다수의 인물을 배출한 姓貫은 昌寧曺氏, 蔚山朴氏, 永川李氏, 淸道金氏, 그리고 土姓인 河陽許氏가 있다. 이들 가문이 16세기 후반 이래 하양 지역의 대표적인 가문으로 자리 잡으며 지역 여론을 주도하며, 향교 운영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하양향교에는 본 任事案에 이어서 1760년부터 1777년까지의 교임을 수록한 任事案이 전하고 있어 교임 임명의 추이를 비교 검토 해 볼 수 있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조선후기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민음사,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경성대학교 출판부, 1992
이광우,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