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및 특징]
1683년 8월부터 1699년 3월까지 慶尙道 玄風縣 玄風鄕校(現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소재)의 掌議 추천 기록이다. 약 16년 동안 15회에 걸쳐 진행된 추천 기록을 수록하고 있는 것이다. 추천이 이루어지던 시기 현풍향교의 掌議를 확인 할 수 있는 다른 자료가 전하지 않아, 추천 결과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기록은 특정 시기 한꺼번에 작성된 것이 아니라, 추천이 있을 때마다 追錄하는 형식으로 엮여진 듯하다. 자료는 朴世維가 謹書한 序文격의 글, 15회에 걸친 齋薦錄, 簡通規 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록된 내용 가운데 박세유의 글과 簡通規는 모두 자료의 겉표지 안쪽에 기재되어 있는데, 齋薦錄 보다 훨씬 후대에 작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대해서는 박세유의 글을 통해 짐작이 가능하다. 박세유의 글에 따르면, 어느 날 박세유가 舊蹟을 披閱하게 되었고, 休紙 가운데 齋薦錄을 발견하게 되었음을 밝혀 놓았다. 그리고 그것을 살펴보니, 父老의 성함이 기록되어 있어 敬護의 마음이 발생하게 되었으나 훼손이 심해 제대로 된 책의 모양이 아니어 곧 泯滅될 것을 염려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에 새롭게 책의 背後, 즉 표지를 단장하니 후대의 향교 任員들이 이를 잘 傳與하기를 당부하며 글을 마치고 있다. 즉 본 자료의 표지는 후대에 박세유 등에 의해 새롭게 엮여진 것이며, 그 겉표지 안쪽에 이 글과 簡通規를 적어 놓은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이 작성된 庚申年은 齋薦錄 작성 훨씬 후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齋薦錄의 본문은 齋薦이 이루어진 연월, 추천된 자, 추천한 자의 성명을 함께 기재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앞선 두 차례의 기록, 즉 1683년 8월의 재천록과 1685년 4월의 재천록은 추천된 인사를 먼저 기재하고, 뒤에 추천인인 薦主를 기재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1686년 7월부터 나머지 13회의 齋薦錄은 추천된 인사의 성명 바로 밑에 薦主가 기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앞선 두 차례의 齋薦錄은 천주가 누구를 추천했는지 모르나, 나머지는 추천된 인사의 薦主가 누구인지를 명확히 알 수 있다는 차이이다. 추천에 대한 천주의 책임을 분명히 하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齋薦錄은 16년 동안 15회에 걸쳐 모두 57명의 추천 기록을 담고 있다. 시기별 추천 현황은 1683년 8월 薦主 4명이 15명 추천, 1685년 4월 천주 2명이 2명 추천, 1686년 7월 천주 2명이 2명 추천, 1688년 5월 천주 2명이 2명 추천, 1690년 9월 천주 2명이 2명 추천, 1691년 3월 천주 2명이 2명 추천, 1691년 3월 천주 2명이 2명 추천, 1692년 8월 천주 2명이 2명 추천, 1693년 3월 천주 2명이 2명 추천, 1694년 2월 천주 2명이 2명 추천, 1694년 8월 천주 2명이 2명 추천, 1695년 10월 천주 2명이 2명 추천, 1697년 3월 천주 8명이 12명 추천, 1698년 2월 천주 6명이 6명 추천한 것으로 나타난다. 마지막 기록은 천주 2명이 2명을 추천한 것인데, 연월의 기재 위치가 애매하여 1698년 2월의 기록인지 1699년 3월의 기록인지 불분명한데, 후자일 것으로 추정된다. 1683년 8월과 1697년 3월의 齋薦錄을 제외하고 천주 1명 당 1명을 추천한 것으로 나타나며, 대체로 2명씩 추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추천이 이루어지던 양상으로 보아 현풍향교의 장의 임기가 대략 1년 내외임이 확인된다.
추천된 인사들과 천주는 성씨별 분류가 가능하다. 우천 추천된 인사 57명의 성씨는 郭氏 29명, 金氏 10명, 成氏 6명, 朴氏 5명, 嚴氏 3명, 裵氏 2명, 蔡氏 2명 순으로 나타난다. 천주는 26명이 참여하였는데, 여러 차례에 걸쳐 천주가 되거나, 한 번의 齋薦이 있을 때 복수의 인사를 추천하기도 하였다. 성씨별로는 郭氏 13명, 朴氏 4명, 金氏 3명, 嚴氏 3명, 成氏 1명, 裵氏 1명, 蔡氏 1명 순이다. 장의로 추천된 인사와 천주 모두 郭氏의 비중이 매우 높게 나타난다. 한편, 현풍향교에는 역대 도유사 역임자를 수록한 『都有司案』이 별도로 전하는데, 천주 26명 가운데 12명의 이름을 확인 할 수 있다. 향교에 큰 영향력을 끼치고 지역 내에서 명망 있던 도유사급의 인사가 천주로 임명되어 장의를 추천했던 것이다.
자료 말미에 수록된 簡通規는 추천된 인사의 합당 여부를 여러 宅에 묻는 서식이다. 편지에다 추천된 인사의 이름을 써서 여러 댁에 편지로 돌린 뒤, 답장 받는 형식으로 장의가 선출됨을 밝히고 있다. 즉, 선출에 참여하는 인사는 簡通이 오면, 그 이름을 본 뒤 합당하다고 판단될 경우 삼가 알겠다는 ‘謹悉’을 써서 답장하고, 불가하다면 답장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선출 방법을 규정해 놓았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향교의 교임 선발 과정과 17세기 경상도 현풍현 지역 재지사족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장의는 향교 운영을 실질적으로 담당하는 중요한 자리로, 지역 내 유력한 사족들의 公議를 거쳐 고을 내 젊은 인사 가운데 人望을 갖춘 자로 선발되었다. 또한 장의는 조선시대 향교가 단순히 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재지사족들의 향촌사회활동 공간으로 활용되었기에 지역 내 위상을 표방할 수 있는 중요한 잣대가 되었다. 따라서 장의는 향촌 세력 간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힐 여지가 많은 자리였다. 이에 향교에서는 장의 선발을 위해 齋薦과 簡通이라는 엄중한 절차를 마련하였고, 그 운영의 일면이 현풍향교 소장 齋薦錄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본 자료에서 추천된 인물과 薦主를 가장 많이 배출한 성씨는 단연 郭氏이다. 이들은 현풍현의 土姓인 玄風郭氏로 수록된 인물의 5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현풍향교의 역대 도유사 명단을 수록한 『都有司案』에서도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조선시대 향교가 단순히 교육 및 교화의 기능만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 현안을 논의하고 수령을 보좌하는 일종의 자치 기구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장의와 같은 교임을 많이 배출하고 그 선발권을 많이 행사한 가문일수록 향교 운영뿐만 아니라 지역 여론에도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조선중기 이래 현풍현에는 토성인 현풍곽씨를 비롯하여 타 고을에 이주한 여러 姓貫의 사족 가문이 분포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향교를 중심으로 한 고을 내 영향력은 현풍곽씨가 압도적으로 높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