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및 특징]
1661년 慶尙道 淸道郡의 鄕廳에서 작성한 鄕案으로, 표제는 『正名舊錄』이다. 표제에 나타난 ‘正名’과 ‘舊錄’이라는 의미대로 이전에 작성되었던 향안을 새롭게 정리해 놓았다. 즉 『정명구록』은 1661년의 座目이 아니라 1599년부터 1657년까지 11회에 걸쳐 이루어진 청도향안 입록자 180명의 명단을 정리한 것이다. 연도 순서대로 11편의 좌목을 수록해 놓았으며, 말미에는 朴東孝의 誌를 수록하였다. 한편, 『正名舊錄』은 1712년에 작성된 『正名錄』과 함께 엮여져, 1911년 『淸道鄕案正名錄』으로 간행되었다. 『청도향안정명록』에는 두 자료와는 달리 입록자의 본관을 기재해 놓았다. 또한 근래까지 淸道鄕校에는 『정명구록』과 『정명록』을 비롯하여, 7편의 개별 향안이 전해져 17세기 청도 지역 재지사족의 동향을 살펴보는데 활용되고 있다.
좌목의 기재 양식은 먼저 입록자의 관직과 직역 등을 기재하고, 이어 성명을 수록해 놓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명구록』에 수록된 첫 번째 좌목은 萬曆 27년(1599)의 것으로 23명이 확인된다. 『청도향안정명록』을 통해 입록자의 성관을 살펴보면 固城李氏 8명, 密陽朴氏 4명, 慶州李氏 3명, 載寧李氏 2명이며, 淸道金氏, 金海金氏, 長淵盧氏, 驪興閔氏, 咸安趙氏, 그리고 본관 미상의 崔氏 각 1명 순으로 나타난다. 당시 座首와 別監은 朴誠과 李廷郁이다. 두 번째 좌목은 만력 28년(1600)의 것으로 밀양박씨 4명과 청도김씨, 김해김씨, 義興芮氏, 고성이씨, 全義李氏, 牙山蔣氏, 慶州崔氏 각 1명 등 모두 11명이 수록되어 있다. 당시 좌수는 李洙, 별감은 박성이다. 세 번째 좌목은 만력 37년(1609)의 것으로 밀양박씨 7명, 고성이씨 2명, 여흥민씨, 竹山朴氏, 재령이씨, 경주이씨 각 1명으로 모두 13명이 수록되어 있다. 좌수는 이름 없이 崔로만 기재되어 있고, 별감은 李氏 2명이다. 네 번째 좌목은 만력 38년(1610)의 것으로 의흥예씨 1명, 原州元氏 1명만 수록되어 있으며, 좌수는 박씨, 별감은 예씨와 이씨이다.
다섯 번째 좌목은 만력 42년(1614)의 것으로 밀양박씨 3명, 玄風郭氏 2명, 고성이씨, 夏山張氏, 경주최씨 1명 등 모두 8명이 수록되어 있다. 당시 좌수는 박씨, 별감은 박씨와 이씨 2명이다. 여섯 번째 좌목은 만력 45년(1617)의 것으로 고성이씨, 김해김씨, 高靈金氏, 岐城潘氏 각 1명씩을 수록하였다. 당시 좌수는 이씨, 별감은 2명으로 모두 박씨였다. 일곱 번째 좌목은 天啓 7년(1627)의 것으로 경주이씨 4명, 고성이씨와 밀양박씨 각 3명, 제주고씨 1명 등 총 11명을 수록하였으며, 좌수는 李廷卓, 별감은 崔嶂과 李漑로 나타난다. 여덟 번째 좌목은 乙酉年(1645)에 작성되었는데 『정명구록』에서 최대 규모인 50명이 수록되어 있다. 성관별로는 고성이씨 17명, 밀양박씨 16명, 경주이씨와 경주최씨 각 3명, 의흥예씨와 재령이씨 각 2명, 청도김씨, 김해김씨, 義城金氏, 기성반씨, 密陽孫氏, 원주원씨, 전의이씨 각 1명 순이다. 당시 좌수는 李稑, 별감은 李珉과 朴東貞이 맡고 있었다. 아홉 번째 좌목은 辛卯年(1651)의 것으로 밀양박씨 5명, 고성이씨 4명, 의흥예씨 2명, 기성반씨와 安東孫氏 각 1명 순으로 모두 13명이 수록되어 있으며, 좌수는 朴東惟, 별감은 1645년과 마찬가지로 박동정과 이민으로 확인된다. 열 번째 좌목은 乙未年(1655)의 것으로 모두 23명이 입록되었는데 밀양박씨 9명, 경주이씨 3명, 의흥예씨 2명과 본관 불명의 孫氏 2명, 현풍곽씨, 청도김씨, 김해김씨, 의성김씨, 원주원씨, 고성이씨, 경주최씨 각 1명 순으로 기재되어 있다. 당시 좌수는 朴東悌, 별감은 金鐵堅과 李光弼이다. 열한 번째 좌목은 丁酉年(1657)의 것으로 고성이씨 8명, 밀양박씨 7명, 현풍곽씨 2명, 청도김씨, 김해김씨, 고령김씨, 전의이씨, 하산장씨 각 1명 순으로 모두 22명을 수록하고 있다. 당시 좌수는 朴東老, 별감은 孫樹䉨와 朴東傅로 나타난다.
이상 『정명구록』에 수록된 180명을 성관 별로 나열하면 밀양박씨 58명, 고성이씨 46명, 경주이씨 14명, 의흥예씨 8명, 현풍곽씨, 청도김씨, 김해김씨, 재령이씨 각 5명, 기성반씨, 원주원씨, 전의이씨 각 3명 제주고씨, 고령김씨, 의성김씨, 여흥민씨, 하산장씨 각 2명, 장연노씨, 죽산박씨, 밀양손씨, 안동손씨, 아산장씨, 함안조씨 각 1명과 본관 불명 성씨 3명으로 확인된다. 성관 비중으로 보아 청도 지역에서 밀양박씨의 族勢가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성관은 16세기 이래 청도 지역의 대표적인 사림 가문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가문이다.
입록자의 관직과 직역 등을 살펴보았을 때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단연 幼學이지만, 유학의 입록 비중은 시기적으로 약간씩 차이가 난다. 180명 입록자 중 유학은 90명으로 50%를 차지하고 있는데, 입록 시기별로 그 비중을 살펴보면 1599년 30%, 1600년 64%, 1609년 23%, 1610년 50%, 1614년 75%, 1617년 25%, 1627년 45%, 1645년 40%, 1651년 62%, 1655년 83%, 1657년 59%이다. 전반적으로 17세기 중반에 가까워질수록 유학이 비중이 높아지는 것으로 확인된다. 비록 고위관직을 역임한 인물은 좌목에서 확인되지 않지만, 17세기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임란공신에 녹훈되거나 지방관과 무관직을 역임했던 인물들이 입록되어 있으며 명예직과 忠義衛와 같은 병종 등 다양한 관직과 직역 등이 나타났지만, 후기로 갈수록 유학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자료 가장 말미에 수록된 誌는 辛丑年(1661)에 박동효가 작성한 것으로 『정명구록』의 작성 경위를 언급해 놓았다. 박동효는 또 다른 향안인 『정명록』에 通德郞이라는 품계를 가지고 1661년 좌목에 수록된 인물이다. 誌에 따르면 榮川李候가 재임한지 5년이 되던 해 여름, 향중에서 別會를 열어 새로운 입록자들에 대한 좌목을 작성하고 이를 보관하게 되었다고 한다. 榮川李候는 당시 淸道郡守를 역임했던 李燦漢으로, 그는 1656년부터 1661년까지 5년간 청도군수를 역임하였다. 당시 ‘正名’된 좌목은 ‘在世之員’의 원칙에 따라 작성했다고 나타나 있다. 실제 1661년 향안의 입록자는 『정명구록』 보다 많았음을 암시한다. 이어 1661년 당시 좌수였던 李球의 노고로 이상의 작업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며 그를 기리며 誌를 마치고 있다. 이구 역시 『정명록』에서 확인되는 인물이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鄕案 작성의 추이와 17세기 전반기 청도 지역 재지사족들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향안은 조선중기 이후 재지사족들 중심의 향촌지배질서 유지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배타적인 향안 작성을 통해 사족들은 지방자치행정 기구인 留鄕所(이후의 鄕廳) 운영을 주도해 나갔던 것이다.
『정명구록』 입록자의 성관을 분석하면 전반적으로 土姓 보다는 이주한 재지사족의 세가 강한 고을임이 확인된다. 청도의 토성으로는 申, 金, 白, 李, 曺氏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후 향안에는 김씨만 수록되어 있으며, 그나마 입록자도 10여 명에 불과해 본관지에서의 族勢가 그리 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는 반대로 밀양박씨, 고성이씨, 경주이씨, 의흥예씨, 재령이씨, 김해김씨 등 이주 성씨의 족세가 강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가문은 17세기 이전 혼인과 복거 등을 통해 청도에 移居한 사족 가문이었는데, 이들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전후 士林의 형성과 맥을 같이한다. 김해김씨 출신의 金馹孫은 무오사화 당시 대표적인 사림으로 피화를 당했던 인물이며, 16세기 전반기 활약한 밀양박씨의 朴河淡과 朴河澄 등도 청도 지역 사림 세력의 형성에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본 향안에 입록된 인물들은 이들의 후손이거나, 혼인 등을 통해 중첩된 인척관계를 맺은 가문으로 16세기 사림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가문 출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