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2년 慶尙道 義興縣 소재 義興鄕校의 重建이 끝난 후 중건의 경위와 관련 인사들의 공적을 언급한 朴俒의 後識로 1935년 간행된 『義興校錄』에 수록
[내용 및 특징]
1642년 下澣에 慶尙道 義興縣 출신의 유생 朴俒이 작성한 後識이다. 박흔은 1641년 시작된 義興鄕校의 중건 공사가 이듬해인 1642년 마무리되자 간략한 공사 경위와 관련 인사들의 공적을 칭송하기 위해 본 後識를 작성하였다. 본 後識는 1935년 의흥향교에서 간행한 『義興校錄』에 수록되어 있다. 박흔은 『義興校錄』 수록 역대 의흥향교 校任 명단인 「校任相遞錄」에 따르면, 1635년 2월 首任인 都有司를 역임한 것으로 나타난다. 아울러 본문을 통해 중건 당시 임명된 두 명의 유사 중 한 명으로 참여했음이 확인된다. 한편, 『義興校錄』에는 박흔의 後識 이외에도 중건 당시 임원으로 참여했던 李慶培의 「鄕校移創節目記」와 洪禹範의 「重建鄕校頌幷序」가 함께 수록되어 있어 의흥향교 중건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는데 참고가 된다.
後識에서는 먼저 1614년에 聖廟를 移刱하였었는데, 후에 士林들이 크게 일어나 다시 옮기는 것에 대하여 논의를 해서 都監 3인에 有司 6인을 정했지만, 太守, 즉 당시 義興縣監이 불필요하게 많다고 해서 그 중에 都監 1인과 兩有司만 차출하게 되었다며, 1641년 重刱 당시 임원의 선출 경위를 밝혀 놓았다. 이 중 都監은 上舍 舅氏이고, 유사는 李上舍 孟堅이며, 본인 朴俒 역시 이 중 하나, 즉 兩有司 중 한 명이라고 하였다.『義興校錄』에 수록되어 있는 「重建鄕校頌幷序」에 따르면, 전자는 洪禹範이고 후자는 李慶培인 것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이때 物力이 지금 보다 조금 더 있어 공사가 이듬해에 완료할 수 있었으니, 모두 1년 안에 처리하였음을 높이 사고 있다. 실제 『義興校錄』 수록 「重建鄕校頌幷序」와 「鄕校移創節目記」에 따르면 1641년 4월에 본격적으로 重刱을 시작하여 이듬해인 1642년 2월에 공사가 끝이 났음이 나타난다. 더구나 농번기에는 공사를 하지 않았으므로, 빠른 완공에 대해 더욱 극찬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여기에는 方伯과 太守의 큰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 하였다. 당시 방백은 巡察使 具鳳瑞, 태수는 義興縣監 李復吉인데, 구봉서는 移建의 청을 임금에게 啓達하여 윤허를 받았고, 이복길은 이건을 지원하며 녹봉을 덜어 주는 등 관료로서 많은 협조를 아끼지 않았던 인물들이다. 무엇보다 後識에서는 이렇게 빠른 시일 내에 완공을 한 것은 모두 洪과 李 兩君, 즉 홍우범과 이경배의 공임을 강조하며, 고을의 여러 父老들이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後識의 후반부는 특히 이경배의 공적을 칭송해 놓았다. 전후의 여러 校任들이 모두 같지 아니하여, 일을 맡아 공적이 뛰어남과 그렇지 못함에 차이가 났는데, 이경배는 이때에 首任, 즉 의흥향교의 都有司를 맡아 힘을 다해 부지런히 수행했음을 칭송하고 있다. 이에 下屬輩들은 그를 敬畏하지 않는 자가 없었고, 官吏들도 쉽게 보지 않으니 有弊가 無弊가 되고 無形이 有形이 되는 등의 변화가 있음에, 이것 역시 이경배의 공적이라고 하였다. 이에 後任의 제 執事들도 이경배를 본 받아 校任을 수행한다면, 비록 우리 의흥현이 十室의 작은 고을이지만 忠과 信이 반드시 생길 것임을 확신하며 後識를 마무리해 놓았다.
[자료적 가치]
본 자료는 의흥향교 관련 자료가 대부분 逸失된 상태에서 이경배가 지은 「鄕校移創節目記」, 홍우범이 지은 「重建鄕校頌幷序」와 더불어 의흥향교의 연혁을 살펴보는 데 참고가 되는 중요한 자료이다.
1935년에 慶尙北道 軍威郡 소재 義興鄕校에서 간행한 『義興校錄』 卷之一의 七에서 八까지 「附重刱記後」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義興校錄』, 義興鄕校, 1995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경성대학교 출판부, 1992
『軍威마을誌』, 대구대학교 지역문화연구소, 군위군청, 군위문화원, 2007
이광우,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