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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흥향교(義興鄕校) 간행 『의흥교록(義興校錄)』 수록 1642년 홍흔(洪昕) 「중건향교송병서(重建鄕校頌幷序)」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5+KSM-WZ.1642.4772-20130630.Y131120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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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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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향교지
작성주체 홍흔, 의흥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군위군 의흥면
작성시기 1642
형태사항 크기: 28.6 X 18.9
판본: 석판본
장정: 선장
수량: 1책
판식: 半郭 : 15.0×18.6㎝, 四周雙邊, 有界, 10行20字, 上二葉花紋魚尾, 上下白口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 대구광역시 달서구 달구벌대로 1095
현소장처: 계명대학교 동산도서관 / 대구광역시 달서구 달구벌대로 1095

안내정보

의흥향교(義興鄕校) 간행 『의흥교록(義興校錄)』 수록 1642년 홍흔(洪昕) 「중건향교송병서(重建鄕校頌幷序)」
1642경상도(慶尙道) 의흥현(義興縣) 출신의 유학자이며, 의병장인 홍흔(洪昕)이 지은 송(頌)과 서문(序文)이다. 홍흔1641년 지금은 경상북도(慶尙北道) 군위군(軍威軍)에 편입된 조선시대 의흥현 소재 의흥향교(義興鄕校)가 새롭게 중건되어, 이듬해인 1642년 공사가 끝나자 공사 경위와 관련된 인사들의 공적을 칭송하기 위해 송(頌)과 서문을 작성하였던 것이다. 작성자 홍흔의흥향교 교임(校任) 중 부임(副任)인 장의(掌議)를 역임하기도 했었다. 본 서문은 공사가 끝난 1642년 10월 상완(上浣)에 작성된 것인데, 1935의흥향교에서 간행한 『의흥교록(義興校錄)』에 「중건향교송병서(重建鄕校頌幷序)」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본문에는 중건 경위와 관련 인사의 공적을 언급한 서문을 먼저 수록해 놓았다. 이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향교의 위치를 읍의 서쪽 산에다가 옮겼는데, 이때 이곳으로 옮긴 것은 풍수의 설(說)에 의한 것으로, 위치가 너무 험준한데다가 건물까지 부실했다고 한다. 이에 여러 후배들이 옛 터로 옮기기를 원했는데, 마침 1640순찰사(巡察使) 구봉서(具鳳瑞)의흥현에 왔을 때 향교의 상황을 보고 임금에게 계(啓)를 올려 이건(移建)을 허락 받게 되었으며, 이때 새로 정해진 향교의 위치도 풍수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1641년 공사가 시작되자 의흥현감(義興縣監) 이복길(李復吉)은 녹봉을 내어 보조해 주었으며, 공사는 고을의 유생인 홍흔(洪昕)과 이경배(李慶培)가 맡았다고 한다. 이에 1641년 3월 기와를 구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이듬해 2월까지 대성전, 명륜당, 문루 등 여러 건물들을 차례로 완성했다며 공사 경위를 언급하고 있다. 이어 수록된 송(頌)에도 향교의 중건 경위와 관련 인사들의 공적, 특히 순찰사 구봉서, 의흥현감 이복길, 홍흔이경배의 공적을 중심으로 칭송해 놓았다. 이상의 서문과 송(頌)은 자료가 대부분 일실(逸失)된 상황에서 의흥향교의 연혁을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이광우,이수환

상세정보

1642慶尙道 義興縣義興鄕校의 重建이 끝난 후 중건의 경위와 의의를 노래한 洪昕의 頌과 序文으로 1935년 간행된 『義興校錄』에 수록
[내용 및 특징]
1642년 10월 上浣에 慶尙道 義興縣 출신의 유학자이자 의병장인 洪昕이 지은 頌과 序文이다. 1641년 시작된 義興鄕校의 이건 공사가 이듬해인 1642년 마무리되자 공사 경위와 관련 인사들의 노고를 칭송하며 지은 것이다. 해당 頌과 序文은 1935의흥향교에서 간행한 『義興校錄』에 「重建鄕校頌幷序」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홍흔 역시 의흥향교 운영에 간여했던 인물로 『義興校錄』에 수록된 역대 의흥향교 校任 명단인 「校任相遞錄」에 따르면, 1636년 2월과 1638년 2월에 의흥향교 副任인 掌議를 역임한 것으로 나타난다. 「重建鄕校頌幷序」는 먼저 서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서문에 나타나 있는 의흥향교 중건 경위와 관련 인사들의 공적을 간략히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옛 우리 고을에 향교가 항상 제 자리에 있지 못했던 것은 몇 번이나 地勢에 대하여 古今의 의견이 달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前後의 術士, 즉 풍수를 보는 사람의 견해가 같지 않음에서 비롯되었다. 지난 30년 전 邑의 서쪽 艮坐의 가파른 산에다가 향교를 옮겨지었는데, 棟宇는 기울 듯이 위태로웠고 담장은 무너져 쓰러질 듯했으니, 이는 후배들이 얼마나 많은 근심을 겪게 될지 모르고 저지른 조치였다. 그곳은 절대 聖靈을 안위케 하고, 禮容을 베풀 장소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이웃한 고을 사람들이 비웃으며 손가락질 했으며, 또한 巡歷하던 星使, 즉 巡察使가 꾸짖어 책망하였다. 이로써 鄕儒와 蒙士가 모두 옛 터에 還安하여, 장차 그곳에서 영원히 享祀를 지내고 싶은 염원을 가지게 되었다. 마침 지난 1640년 가을 순찰사 具鳳瑞가 本顯을 살펴보실 때 향교에서 謁聖禮를 행한 뒤 諸生들 앞에서 향교를 이전에 옮긴 것은 당연히 우리 고을 사람들의 죄임을 큰 소리로 경계하였고, 이어 還安하는 것으로 陳啓할 것을 말하였다. 이때 義興縣監으로 있던 李復吉과 향교의 首任, 즉 都有司를 맡은 적이 있는 鄕儒 李慶培가 간절하게 還安의 당위성을 간청하였었다. 이전에 우리 고을에 임명되었던 수령과 巡歷했던 순찰사 가운데 지금의 수령처럼 공사를 위해 자신의 녹봉을 내어줄 만큼 관심을 보인 이가 없었으며, 이전에 향교의 首任들 가운데 이경배처럼 자신 집안의 일을 다스리는 것처럼 정성을 다한 이도 없었다. 이에 이듬해인 1641년 봄 正月 建廟를 허락하는 임금의 윤허를 받게 되었다. 봄 2월에는 父老를 모아두고 所任을 정하였는데, 고을의 원로들은 洪禹範이 신중하며 화평하고 단아하기에 그를 택하였다. 또 이경배는 부지런하고 재주 있는 선비로서 유생들이 추천한 자이다. 둘이 서로 갖가지 방책을 모색하니 고을 사람들의 人心에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이에 봄 3월 기와를 만들 자금을 모으고, 여름 4월에는 聖廟를 세우고 齋舍를 지었으며, 5월과 6월에는 농번기여서 공사를 중지하였다. 7월에는 단청을 칠하였고, 가을 9월에는 담장 공사를 마무리하였으며, 겨울 10월에는 還安하고 제례를 올렸다. 겨울 11월 明倫堂을 짓고 門樓와 齋舍를 세우기 위한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보름 이후에는 날씨가 추워 중지하고, 이듬해 2월에 공사를 끝내게 되었다. 공사를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年考해보면, 비록 해로는 1년이 걸렸지만 달로는 겨우 6개월 만에 이룬 것이니, 그 성공의 이룸을 고하매 하늘이 귀신을 부려 공사를 마친 것과 같았다. 그 간에 무릇 백가지로 모의하여 經營한자가 한둘이 아니나, 工匠을 불러 모은 것, 役人을 모집한 것, 夫軍을 돌려가며 일을 시킨 것, 糧餉을 辦出한 것은 모두 홍우범이경배의 가슴 속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좋은 방책과 근면함으로 시작부터 끝까지 힘쓴 이로는 이경배가 유일하다. 향교의 제도를 위한 그의 업적은 近古에 드문 것이며, 營運의 공로를 전후에 비교할 만한 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제 聖廟를 우러러 살펴보니 堂奧는 깊숙하고 고요하여 聖靈이 편안할 수 있으며, 계단과 뜰은 평평하고 반듯하여 執事의 삼감이 있을 만하다. 이어 아래로 명륜당을 살펴보니 房室이 나뉘어져 있어 젊은이와 어른 간에 위계가 있는 것과 같으며, 廳事에는 모양새가 있어 序次가 저절로 구분이 된다. 또한 典庫와 齋舍를 얼핏 보니, 좌우에 저장할 곳을 갖추어 籩豆가 정결하게 놓여 있으며, 東西로 正位해 있음은 拜位하는 데 알맞다. 앞의 門樓를 보니 州里를 높이서 눌러 넓은 들판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北窓으로 맑은 바람이 불고 東軒에는 밝은 달이 뜨니, 墨客으로 하여금 가히 이곳에서 시를 짓고 歌舞를 즐기게 하며, 또한 족히 이곳에서 致齊하고 居接할 만하다. 이러한 것이 어찌 우리 方伯이 移安의 啓를 올린 것, 太守께서 항교를 흥하게 한 것, 그리고 우리 宗叔, 즉 홍우범이 都監을 맡은 것, 이경배가 모든 일을 총괄하여 일을 두루 살펴 깊은 계책을 낸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만약 후에 本縣을 巡安하는 자가 있어서 이를 본다면, 전에 우리 方伯이 移安을 하자고 啓를 올린 것, 우리 고을에 부임하신 수령께서 녹봉을 내어 공사를 도와 준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首任이 학교를 위한 일을 자신의 집안일을 돌보는 것과 같이 한 것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일에 큰 공이 있는 순찰사 구봉서, 의흥현감 이복길, 홍우범이경배의 공적을 泯滅됨이 없이 후대에 알리고자 하는 까닭에 이경배의 誌 다음에 이 서문을 쓰게 되었다.
위의 서문에서 주로 언급하고 있는 이경배의흥현 출신의 유생으로 중건 공사를 주도했으며, 의흥향교의 首任인 都有司를 역임했던 인물이다. 본 공사를 주도했던 관계로 역시 중건 경위와 의의를 언급한 「鄕校移創節目記」를 작성하였었다. 서문 말미에 말한 이경배의 誌가 「鄕校移創節目記」로 추정되는데, 「重建鄕校頌幷序」와 함께 『義興校錄』에 수록되어 있다. 이경배의 기문에는 본 서문에서 언급하지 않은 읍의 서쪽으로 처음 향교를 移建하기 전의 상황과 공사를 주도한 주요 인사들의 행적이 좀 더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아울러 본 자료 다음에는 역시 有司로 중건에 참여했던 朴俒의 「附重刱記後」가 수록되어 있어 앞의 자료와 함께 중건 경위와 그 과정을 살펴 보는 데 참고가 된다. 서문 다음에는 중건 공사의 공적을 칭송한 頌을 수록해 놓았다. 서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중건의 경위와 순찰사 구봉서, 의흥현감 이복길, 그리고 홍우범이경배의 공적을 칭송하고 있다.
[자료적 가치]
본 자료에서 확인되는 홍흔의 서문과 頌은 의흥향교 관련 자료가 대부분 逸失된 상태에서, 이경배가 지은 「鄕校移創節目記」와 더불어 의흥향교의 연혁을 살펴보는 데 참고가 되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서문과 頌에 수록된 내용 가운데 흥미로운 점은 풍수에 따라 의흥향교의 위치가 거듭 옮겨졌다는 사실로, 17세기 초반 풍수에 대한 인식을 단편적으로 살펴 볼 수 있다.
1935년에 慶尙北道 軍威郡 소재 義興鄕校에서 간행한 『義興校錄』 卷之一의 四에서 七까지 「重建鄕校頌幷序」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義興校錄』, 義興鄕校, 1995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경성대학교 출판부, 1992
『軍威마을誌』, 대구대학교 지역문화연구소, 군위군청, 군위문화원, 2007
이광우,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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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흥향교(義興鄕校) 간행 『의흥교록(義興校錄)』 수록 1642년 홍흔(洪昕) 「중건향교송병서(重建鄕校頌幷序)」

重建鄕校頌【幷序】
鳴呼古我鄕邑不常厥校于今幾遭直以地勢之古
今異宜而術士之前後殊見故也粤在三十年前移
刱于邑西艮坐之山峭其棟宇之所傾危墻壁之所
頹圮不知其後輩之幾多患也殊非所以妥聖靈
設禮容之地也此豈徒傍觀隣邑之所嗤點也抑亦
巡歷星使之所呵責者也是以鄕儒蒙士皆欲還安
于舊基將以爲永享之所者日月已多其在庚辰秋
巡使具公鳳瑞巡按本縣仍展謁聖禮柖諸生
席其前颺言警之曰當於首倡移此校者吾當罪之
速爲還安舊基具由陳啓云云時瑞山李候復吉
官此土鄕儒李君慶培首任此校相與善其說辭懇
其還安之請噫前之巡按本縣者非一而豈如此太
守之梋俸錢勸功役之多也前之首任此校者非一
而豈如此李君之爲學校比私家之誠也越明年辛
巳春正月蒙上允議建廟春二月聚父老定所任
則鄕老洪公禹範乃詳愼愷悌之人而鄕之所擇者
李君乃勤幹藝能之士而儒之所推者也相與區
畫規策無不適中人心春三月鳩財瓦夏四月立聖
廟構齋舍五月六月間妨農停役秋七月始丹艧秋
九月終垣墻冬十月祀還安冬十一月創明倫堂立
門樓構齋舍自望後妨寒停役越明年壬午二月畢
工役自始役至終役以年考之則雖閱一朞而以月
計之則纔止六蓂若是乎告厥成功之易也不啻若
天使而鬼役也噫其間凡百謀營者不一而足以工
匠之招集役人之募得夫軍之輪役糧餉之辦出皆
禹範李君之胸畫之淵深手策之圓闊而勤而力
之始而終之者其惟一李君乎其爲學宮之制作近
古之所罕其爲營運之功勞前後無比也仰觀聖
廟則堂奧幽深而聖靈斯妥階庭平正而執事有
恪府察明倫則房室分夾而少長各位廳事有容而
序次自別旁窺典庫齋舍則左右有藏而籩豆靜嘉
東西正位而拜揖便當前晀門樓則高壓州里旁通
郊野淸風乎北窓皓月乎東軒使調人墨客可以吟
詠於斯歌舞於斯亦足以致齊于斯居接于斯滌煩
襟爽胸懷而助一勝槪者也此何非吾方伯啓移
安吾太守興學校吾宗叔荷都監吾李君摠任事其
所以逞周慮審遠畫出尋常萬萬也哉若使後之巡
安本縣者觀之則孰不曰前吾之方伯者啓移安
妥聖靈如此其至也使後之莅官此土者觀之則
孰不曰前吾之太守者損俸錢勸工役如此其多也
使後之首任此校者觀之則孰不曰前吾之所任者
爲學校比私家如此其誠也余忝此任目撮梗槪將
欲以賢方伯瑞太守鄙宗叔吾李君之事蹟使不得
泯滅於千百載之下故於是乎序而尾於李君之誌
遂爲之頌曰
【邑之艮校之建】三紀餘【基址危廟貌欹】終悔初【駿奔走執籩豆】幾失禮【或展多傾】
【謁跌】官謗詆【志還安僉議從】有誰【地術或國防塞】無可{大/禾}【歲庚辰具巡使】時
何幸【按本縣謁聖殿】諸生警【啓具由謂待秋】蒙聖允【適李倅來自瑞】於事敏
【闡文敎興學校】慰多士【招侕漢擇勤幹】敦匠事【少長咸出都監】衆役鉅【巨集工金募丁】
【匠壯】不日擧【瓦亦燔材亦鳩】基又新【阜面陽廟可堂】坤向因【主龍頭龜流】靈
畢至【巽已聳兌亦拱】文蔚起【礎豊豕棟隆竪】穆涓吉【椽奕構丹雘就】未旬月
【越辛巳奉安祀】孟冬五【堂廡整階{石+巳}正】便禮數【革舊址就新位】列聖妥【父老士流】
【嗟誇】無不賀【堂明倫作維新】古無比【齋東西壁高低】今有次【衣書箱簠簋藏】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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其功【自今始安祀事】賴我公【陶髦彦盛纓弁】從爾作【欲揚顯如伐善】其無極
【余忝任費校廩】相未久【見大巫呈小愚】功何有【同出人齊拜揖】於此校【環橋闖墻】
【門垣】數仞貌【翬其桶鳥斯翼】煥重新【殖其庭覺其楹】像成均【探周規依漢儀】器
局寬【杏壇潔槐市密】位成完【崇儒宮名我東】方伯傳【誦其聲守其成】於萬年
崇禎十五年壬午十月上浣洪昕謹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