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0년 작성된 慶尙道 玄風縣 玄風鄕校의 校生 명부
萬曆三十八年玄風官校案至今中元甲庚午三百二十一年也靑衿錄
玄風官校案
[내용 및 특징]
1610년 慶尙道 玄風縣 玄風鄕校(現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소재)의 校生 명부이다. 현풍향교의 교생으로 등록된 인사들을 먼저 수록하였으며, 이어 童蒙과 入格者를 수록해 놓았다. 자료의 표제는 ‘靑衿錄’이라 명명되어 있는데, 이는 후대 본 교안을 改裝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며, 자료 작성 당시의 제목은 內題에서 확인되는 ‘玄風官校案’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본 자료는 17세기 초반 아직 향교 내에서 儒生과 校生과의 구분, 또는 額內와 額外와의 구분이 이루어지거나 유생이 별도로 靑衿錄을 작성하기 이전에 만든 교안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교안을 청금록으로 改裝한 것은 표제에 ‘至今中元甲庚午三百二十一年’이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930년임을 알 수 있다. 그 사유에 대해서는 자료 가장 말미에 별도로 기재해 놓았다. 1930년 9월에 작성된 이 글에서는 改裝 사유를 원본의 훼손 때문이라 하였다. 세월이 많이 흘러 포장된 종이가 거의 떨어져 나갔으며, 습기 등으로 수록된 글자를 명확히 볼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본에는 割名된 자국이 있는데, 이 부분은 별도로 표시해 둔다고 하였다. 실제 본문에는 割名된 곳에 ‘〇〇’을 표시해 놓았다. 훗날 누군가에 의한 조작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의도이다.
校案에는 모두 23명이 수록되어 있으며, 일곱 군데에서 割名 흔적이 확인된다. 割名 흔적을 미루어 볼 때 최초 교안에는 30명이 수록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經國大典』에는 향교의 정원이 규정되어 있는데, 縣에 소재한 향교 정원은 30명이다. 즉 1610년 현풍향교의 정원은 조선후기 대부분의 서원이 그랬던 것과는 달리 정원을 정확히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교안에 입록된 입록자는 성씨별 분류가 가능하다. 이를 다수 입록 성씨별로 나열하면 郭氏 10명, 朴氏 6명, 金氏 4명, 嚴氏 1명, 蔡氏 1명, 許氏 1명 순으로 나타난다. 校案 다음에는 ‘童蒙’이라는 별도의 명단이 있다. 조선시대 향교는 정원 외의 童蒙을 두어 교육시켰으며, 성장해서는 정식 校生으로 입록시키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610년 현풍향교 교안에서 동몽은 6명이 확인되며, 割名이 두 군데 있다. 6명의 성씨는 朴氏 3명, 文氏 1명, 魚氏, 蔡氏 1명 순이다. 교안 마지막에는 ‘入格’ 명단이 있다. 지역에서 치러지는 시험에 합격한 인사들을 수록한 것이다. 割名 흔적 한 군데를 제외하고 모두 16명이 확인되는데, 성씨별로는 郭氏 7명, 金氏 5명, 朴氏 2명, 嚴氏 1명, 辛氏 1명 순으로 나타난다. 이 중 朴時中과 金克輝는 교안에도 수록된 인물이다. 현직 교생 또는 前 교생으로 入格한 인물을 망라한 듯하다.
[자료적 가치]
17세기 초반 향교 校生의 성격과 경상도 현풍 지역 재지사족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본 자료의 표제에 기재된 靑衿錄이라는 명부는 조선후기 향교 운영 과정에서 새롭게 나타난 校案이다. 향교가 사족 이하 계층의 避役 장소로 활용되자, 기존의 전통 사족들은 별도의 교안을 작성해 나갔고, 그것이 儒案과 校案, 儒生과 校生, 額內와 額外의 구분, 그리고 청금록 작성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1930년 청금록이라는 제목으로 改裝된 것도, 校生 성격의 변화를 감안한 듯하다. 17세기 중반 이후 향교 교생 명부를 지칭하는 용어 중, ‘校案’을 사용하였다면 보통 사족이 아닌 中人이나 庶孼, 일반 常民 출신의 명부로 이해되기 때문에, 청금록이란 명칭을 사용한 것이다. 반면 본 자료가 만들어지던 1610년의 현풍향교 교생은 당대 현풍 지역에서 명망 있던 가문 출신의 인사로 채워져 있음에, 17세기 중반 이후의 校案과 성격을 달리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經國大典』에 나오는 縣의 교생 정원 30명을 지키고 있는 것도, 향교 운영에 있어서 신분상의 혼란이 비교적 적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한편, 본 校案에 수록된 인사들의 성씨 분포를 보면 郭氏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는 土姓 출신의 玄風郭氏들이다. 이 가문은 조선시대 이래 현풍 지역을 대표하던 사족가문으로 지역 여론 형성과 향교 운영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다른 성씨들도 대부분 현풍곽씨와의 혼인 관계를 매개로 정착한 가문이다. 따라서 본 교안에서 확인되는 인사들은 1610년을 전후하여 현풍 지역을 대표하던 인사로 파악 할 수 있다. 이는 현풍향교에 전해지는 鄕案을 살펴보면 좀 더 명확해 진다. 1621년 이후의 鄕員을 수록한 ‘玄風鄕案’에는 본 교안 입록 교생을 11명 확인할 수 있다. ‘入格’에 수록된 인물도 7명 확인되어 교안 입록자의 성격이 17세기 중반 이후와는 크게 다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朝鮮後期鄕校硏究』, 尹熙勉, 一潮閣, 1990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韓國의 鄕校硏究』, 姜大敏, 경성대학교 출판부, 1992
이광우,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