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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4년 청도향교(淸道鄕校) 대성전구상량문(大成殿舊上樑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4+KSM-XI.1734.4782-20120630.Y1210604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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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시문류-상량문
내용분류: 경제-토목/건축-상량문
작성주체 청도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면 교촌동
작성시기 1734
형태사항 크기: 25 X 33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청도 청도향교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면 청도향교 문중소개
현소장처: 청도 청도향교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면 교촌동

안내정보

1734년 청도향교(淸道鄕校) 대성전구상량문(大成殿舊上樑文)
1734청도향교에서 대성전을 중수하고 상량식을 하면서 작성한 대성전구상량문이다. 청도향교는 원래 고려시대 말엽에 창건 되었다고 하나 여러차례 옮긴 바 있다고 하며, 선조원년인 1568청도군수이의경(李宜慶)의 주도로 화양읍 고평동으로 이건하였다. 다시 1626년에는 청도군수송석조(宋碩祚)의 주관하에 화양읍 합천동에 새로 이건하였다 그러나 역시 많은 문제가 있었으므로 영조 10년인 1734년에 이르러 청도군수정흠선(鄭欽先)의 주관하에 송정동으로 이건하게 되었다. 이 상량문은 아마 1843년의 향교 중수 공사때에 대성전에서 발견된 것으로 추정된다. 본 상량문의 내용은 몇 개의 부분으로 세분할 수 있다. 제1부분은 도입부에 해당하는 것으로 ‘성인은 백세의 스승이고, 학교는 국가가 존재하는 근본’이라고 강조하면서 교육과 제사 등 , 향교의 교육적 기능을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다. 제2부분은 청도향교의 오랜 역사를 소개하면서, 도주(道州)는 문헌의 고을이고 ‘추로(鄒魯)의 유풍(遺風)’을 간직하고 있는 유서깊은 곳이라고 하였다. 제3부분에서는 이처럼 역사가 오래고 그 의미가 깊은 청도향교가 입지환경이 좋지 못하여 사람과 말이 다니는 소리로 시끄러울 뿐 아니라 향교 주위를 흐르는 반수(泮水) 역시 불결하여 많은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제4부분에서는 새로 도임한 청도군수정흠선이 이러한 문제점들을 깊이 인식하고 사림의 의견을 반영하여 향교의 이건을 추진하였으며, 새로운 향교터가 길지(吉地)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대들보를 올리는 노래(兒郞偉歌)’를 첨부하여 청도향교의 입지환경을 아름답게 묘사하면서 유림(儒林)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고 있다. 이 당시 상량식의 주관자는 청도군수정흠선이었으며, 이 자료를 통해 1734대성전이건의 상황을 잘 알 수가 있다.
慶北鄕校資料集成(1),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남민수

상세정보

1734년에 청도향교에서 상량식을 하면서 작성한 大成殿舊上樑文
내용 및 특징
1734청도향교에서 대성전을 중수하고 상량식을 하면서 작성한 大成殿舊上樑文이다. 청도향교는 원래 고려말에 건립된 후, 여러 차례 옮겼다고 하며, 1568년에 당시 郡守였던 李宜慶華陽邑 古坪洞으로 옮겨서 오랫동안 존속하였으나, 향교 사이에 큰 강이 흘러서 享祀를 지낼 때 祭物의 휴대가 어려웠고 심지어 물에 빠져 죽은 校奴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이 때문에 1626년에 당시 郡守였던 宋碩祚華陽邑 合川洞으로 향교를 옮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의 향교터도 大路에 위치하고 있는 데다가 聖廟 부근의 泮水도 불결하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移建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본 上樑文의 내용에 의하면, 이러한 사실들이 개별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上樑文의 찬자는 우선 鄕校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聖人乃百也之師, 學校爲有國之本’이라고 주장하면서, 향교의 주요 기능이 諸生들을 經書를 통해 교육시킬 뿐 아니라 歷代의 先賢을 祭祀함에 있음을 재차 확인하고 있다. 다음으로 청도향교의 오랜 역사를 강조하면서 ‘道州是文獻之邦’이라 하였고, 청도향교는 ‘鄒魯之遺風’이 있는 곳이라고 부연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중요한 향교의 터가 큰 강물로 인해 범람의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왕래로 불결하고 시끄러웠으므로 尊賢과 敎育의 기능을 다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뜻있는 士林의 탄식을 자아냈다고 하였다. 때마침 청도군수鄭欽先공이 부임하여, 이러한 향교의 제반사정과 문제점을 깊이 인식하였기 때문에 향교 移建의 중차대한 役事가 시작될 수 있었다고 하였다.
다음으로는 청도향교 校基의 이전지로 삼은 松享洞터의 훌륭한 입지조건을 찬미하고 있다. 前面에는 넓은 들판이 있고, 後面에는 높은 산이 감싸고 있으며, 또 깨끗한 강물이 띠처럼 둘러싸고 있으니 옛터와 비교할 수 없는 好條件이라는 것이다. 찬자는 8번이나 이전한 끝에 마침내 天意에 의해 현재의 터를 얻었다는 식으로 미사여구를 총동원해 입지조건을 찬미하였다. 마지막에는 兒郞偉歌를 지어 청도향교의 입지조건이 뛰어남과 淸道의 儒林이 이곳의 程朱學을 영원히 계승 발전시키자는 소망을 표현하였다.
자료적 가치
본 上樑文은 아마 1843년의 大成殿 重修 당시에 발견되었던 上樑文인 것 같다. 이 때문에 제목을 ‘舊上樑文’이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상량문 말미에 첨부된 ‘上樑二十四日午時’라는 구절로 미루어 1734년 9월 24일의 상량식 당시에 이 글을 기둥에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상량식의 주관자는 당시 청도군수였던 鄭欽先이며, 成造都監으로 李義耈朴聖熙의 성명이 기록되었다. 또 燔瓦都監으로 李碩標趙鼎九 등의 성명이 기록되어 있고, 磧川의 승려 偉鑑 등이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기와터를 만들고 승려까지 동원한 대규모 공사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상량문은 1734년의 청도향교 중수상황을 파악 할 수 있는 자료 중의 하나이다.
『慶北鄕校資料集成』(1),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남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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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734년 청도향교(淸道鄕校) 대성전구상량문(大成殿舊上樑文)
大成殿舊上樑文
設神教於區宇咸切仰日覩之心移明宮於奧幽爰覩虹樑之擧
列纓弁而均慶攀戶牖而同歸窃念聖人乃百世之師學校爲有
國之本竹籩木豆歷代明欽崇之儀辟水黌堂諸生矝依歸之
所至若漢祖之謾罵克虔拜廟之誠乃如魏家之陋風尙行釋
菜之尊質文交映瞻禴祀於千秋華夷異教護斯文於一脉惟
箕封稱禮義之國矧道州是文獻之邦聞文王而有興道已東
矣居君子之何陋禮以享之西序東膠依然漢唐之宏制夏絃
秋誦宛爾鄒魯之遺風第玆校基之稍洿以致神道之靡靜大
川傍激那免防山之深憂驚湍却流未傳泗水之異事事多未
遑幾士林之瞻歎時亦有幸適賢侯之來莅乃推庚年之舊卜
爰得午坐之新區鉅野鋪前挹寬平正直之像華岳峙後起仰
鑽高堅之心水如帶而山如屛淑氣咸萃於此神爲慳而鬼爲
秘天意有待于今奠基於八遷之餘授規於三農之隙易地以處
儼重欄之如初不日乃成紛庶民之來赴地勢平於塽嵦濟濟襟
佩之聳瞻水害遠於浸淫肅肅壼奧之永鞏昇其堂入其室階
級斯嚴烝於春祀於秋陟降如在敢效善頌用升脩樑兒郞偉
抛樑東太陽朝自扶桑紅乾坤不入漫漫夜更仰程朱秉燭功兒
郞偉抛樑西一道源川是紫溪逝者如斯無晝夜也應上接泗
洙涯兒郞偉抛樑南蕭條鰲岳彼松楠夜朝雨露猶堪長莫遣
斧斤日更尋兒郞偉抛樑北如天大道走安宅求之自可有
師何事時人但墑埴兒郞偉抛樑上日月星辰高照朗萬像
羅昭下臨潜心對越是存養兒郞偉抛樑下實地真工踐者
下學方湏歸聖域弘䂓何異日薫炙㐲願上樑之後淳風克
文教丕闡正君臣父子夫婦之義昭掲大倫講慎思明辨審
之工永守徽訓値此千一期聖作詎二三子學荒庶休菁莪
替芬苾崇禎紀元後百有七年甲寅九月二十四日郡守鄭欽先
省峴察訪李夏宗成造都監李義耈朴聖熙都有司
來復掌議朴重一孫鎭極伐木都監李益華蔣來朝
燔瓦都監李碩標趙鼎九李鰲書都色記官金汝鋼
木手磧川偉鑑邊手驛吏金己難
离丙龍午坐子向開基八月初九申時列礎二十五日巳時祀土地
二十六日巳時立柱九月二十二日子時上樑二十四日午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