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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인향교(慈仁鄕校) 청금록(靑衿錄)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4+KSM-XG.1887.4725-20120630.Y121090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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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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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유안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작성시기 1887
형태사항 크기: 31 X 30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산 자인향교 /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교촌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산 자인향교 /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교촌리

안내정보

자인향교(慈仁鄕校) 청금록(靑衿錄)
본 자료는 1887년부터 1909년까지 자인향교의 역대 교임을 기록한 청금록이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향교의 학도들 가운데 양반유생의 명부를 청금록이라 지칭하였다. 그러나 본 자료의 경우 명칭은 청금록이나 실제로는 교임을 기록한 일종의 임원록이다. 청금록에 나타난 교임으로는 향교의 수장인 도유사를 비롯한 장의, 유사 체제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는 다른 지역의 양상과 동일하다.
자인향교의 청금록에는 교임의 명단을 비롯하여 서문(序文)과 절목(節目)이 기재되어 있다. 서문에서는 당시 향교 교임의 교체가 너무 자주 일어나고 있고 예전의 올바른 교임 교체의 예가 근래에 지켜지지 않음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습속을 바로잡을 것임을 밝히고 있다. 교임선출에 있어서의 특징으로 자인향교의 경우 관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는 전직 교임 가운데 수령을 보좌하는 역임이라 생각되는 반수(班首)와 공사원(公事員)을 선출하고 이들을 향교의 운영에 참여토록 하는 절목의 내용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교임선출을 비롯한 향교의 운영은 향중유림에 의해 자치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자인향교의 경우 이와 달리 관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다. 이는 향교의 운영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당시의 현감오횡묵의 개인적인 성향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당시의 자인이 경주의 속현에서 벗어나 독립된 현으로서의 역사가 일천한 자인의 특수한 환경에서 비롯한 것이라 생각된다.
비록 위와 같이 향교의 운영에 있어서 관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고 있었지만 당시 자인향교의 운영을 주도하였던 양반층 또한 존재하고 있었다. 김,최,박,이,배씨 등이 대표적으로 이들은 청금록의 입록에 압도적인 숫적 우위를 보이고 있으며 이들은 이전의 교생안 및 청금록에서도 우위를 보이는 성씨들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들 5대 성씨가 당시 자인향교 및 지역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음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887년의 자인향교 청금록은 이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당시 자인 지역사회의 동향을 비롯하여 자인향교 운영의 전반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慶北鄕校資料集成』(1),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박소희,유기선

상세정보

1887년부터 1909년까지 자인향교의 교임을 기록한 청금록
[내용 및 특징]
본 자료는 1887년부터 1909년까지 慈仁鄕校에서 작성된 靑衿錄이다. 일반적으로 청금록은 향교의 校生 가운데 양반사족으로 구성된 儒生의 案으로 알려져 있으나 본 자료의 경우 그 명칭은 청금록이나 양반유생의 안이 향교의 校任의 명부로 일종의 任員錄이다. 자료의 서두에는 序文 및 향교교임의 임명과 관련한 節目이 실려있고 당시의 守令수령을 보좌하던 인원으로 생각되는 班首, 公事員의 명단과 함께 교임의 명단이 기재되어 있다.
청금록 서문의 내용은 향교 교임선출에 관한 부분과 재정의 운영에 관한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교임 선출의 경우 근래의 교임선출이 예전의 禮를 따르지 않고 자주 교체하는 習俗을 비판하고 이러한 문제를 시정할 것을 밝히고 있다. 이어서 재정문제에 있어서는 校中의 넉넉지 않은 需用 가운데 校生의 額納을 통해 神門의 改造나 각종 비품을 미리 갖출 것을 규정하고 있다.
서문의 내용 가운데 잦은 교임교체를 비롯한 교임선출의 문제점은 앞선 1881년의 청금록 서문에서도 언급된 바 있는 곳으로 19세기 말기 당시의 자인향교는 교임선출에 많은 문제점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교임 선출에 대한 문제는 타지역에서도 흔한 현상이었다. 향교는 書院과 더불어 하나의 향촌기구이자 사족의 이해를 대변하는 기구였기에 사족간 또는 사족과 신흥양반 또는 서얼과의 대립이 발생하는 경우가 많았다. 본 청금록 서문이나 1881년 작성된 청금록 서문을 통해서는 당시의 구체적인 갈등이나 문제점의 내용을 확인할 수는 없으나 교임선출을 둘러싼 문제점이 발생되고 있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자인향교의 경우 이러한 교임 선출의 문제점은 官에 의해 조정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校首를 역임한 자 중에서 班首와 公事員 각 1인을 擇定토록 한 조치가 그것으로 반수와 공사원은 일종의 鄕任으로, 자인지역의 반수와 공사원의 경우 수령의 영향력을 크게 받는 위치였다. 官의 자인향교에 대한 영향력 행사는 위의 청금록 서문외의 기록에서도 발견된다. 청금록 서문이 작성될 당시 자인縣監이었던 吳宖黙의 저서인 『慈仁叢鎖錄』 중 고종 25년 9월 29일의 기록에 駭慢 無禮한 懲勵하여 교임인 掌議에 崔鶴坤, 李慶潤을 特差하였다고 하였으며 11월 19일의 기록에서 오횡묵은 居接所訓長과 齋任 遞代時 협잡하여 饒戶無識者가 아닌 文學士로 擇差토록 하라는 기록이 있다. 즉, 반수와 공사원의 임명을 전직 교수를 임명하는 것 뿐만 아니라 교수의 임명과 교체에 있어서도 관이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교임 체대의 경우 향유림중에서 천망되어 관의 택임을 거치지만 대개 수령의 결정은 追認에 그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유생들의 자치성에 더 큰 비중이 두어져 있었다. 그러나 자인향교의 경우 일반적 경우와는 달리 관의 영향력이 더 많이 작용하고 있다. 이는 앞선 1881년 청금록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관의 영향력행사는 당시 현감오횡묵의 개인적인 행위와 관련시켜 이해할 수도 있으나 경주의 오랜 屬縣이었던 자인이 일읍으로서의 위치를 확보한 것이 일천하며 이로 인해 향교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유력 사족이 부재하였다는 점과도 관련시켜 이해할 수 있다.
위와 같은 서문에 이어 앞으로의 향교운영을 규정한 절목을 기록하고 있다. 절목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一. 관이 추천한 자를 지명하여 三齋任을 呈遞할 것이며 下帖시 반수와 공사원은 재회하여 상의 후 재임을 薦報할 것. 만일 사사로움을 쫓는 폐해가 있을시 향중에서 벌할 것. 一. 재임이 遞歸될 때에 반수와 공사원 및 전 교수는 모여 청금록 등재의 여부를 의논할 것. 前 儒案과 청금록 및 기타 교중의 참고할 만한 문권은 궤에 넣어 殿司廳에 보관하며 공사원이 이를 관리한다. 一. 付錄시 需用을 헤아려 놓을 것이며 校財의 낭비가 없도록 조치할 것. 一. 반수와 공사원의 체대는 매년 동지에 행할 것 一. 校長에게 아첨하여 구하려 하지 말 것이며 서재교생이 납부한 納으로 數種의 물건을 고치고 준비할 것이며 이를 기록하여 둘 것.
위의 절목과 같이 반수와 공사원 및 향교 재임의 선출에 있어 관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반수와 공사원의 체대는 매년 동지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향교의 서재교생이 납부한 額納을 향교의 재용에 충당하고 있다. 각종 향교 소용품을 수리, 보충하는 것 뿐만 아니라 앞의 서문에서도 보이듯 향교의 神門을 수리하는 등에서도 西齋校生의 액납이 소용되고 있다. 이는 당시 향교재정 확보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으로 서재교생의 액납이 향교재정에 있어 중요한 일부분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청금록에 기록된 교임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자인향교의 청금록에는 향교의 교임인 도유사, 장의, 유사의 성명이 기록되어 있다. 도유사, 장의, 유사로 이루어진 교임구성은 다른 지역과 동일한 양상이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청금록 서문이나 절목에서와 같이 교임과 더불어 전직 교임이었던 반수와 공사원의 명단이 함께 기재되어 있다. 성씨별 교임의 구성을 보면, 金씨 65명, 崔씨 49명, 朴씨 65명, 李씨 43명, 裵씨 20명, 許씨 3명, 宋씨 3명, 尹씨 5명, 張씨 3명, 安씨 27명, 姜씨 2명, 鄭씨 1명, 白씨 4명, 全씨 13명, 曺씨 2명, 蔡씨 1명, 具씨 3명, 邊씨 2명, 秋씨 1명, 石씨 1명, 權씨 2명, 申씨 1명, 盧씨 1명, 吳씨 1명, 玄씨 1명, 孔씨 1명, 禹씨 1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대 교임 중 김, 박, 최, 이, 배씨 순으로 교임을 많이 배출하고 있으며 이는 자인향교 교생안에 나타나는 5대 성씨와 일치하는 현상이며 앞서 작성된 1881년의 청금록과도 같은 양상이다. 다만 앞선 청금록에 비해 안씨와 전씨를 비롯한 타성씨의 교임 역임이 많아지고 있는데 이는 관의 영향력 증대로 인해 향교 운영 참여집단의 외연이 확대된 것으로 생각된다. 비록 교임 역임의 외연이 확대되는 현상이 발견되기는 하나 5대 성씨의 비중은 여전히 유효하며 이는 20세기가 시작된 당시까지 이들이 향교를 주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료적 가치]
본 자료는 자인향교에서 작성된 청금록이다. 일반적으로 청금록은 향교의 學徒들 중 양반유생의 명부를 지칭하나 본 자료는 유생안이 아닌 교임을 기록한 명부로 일종의 임원록이다. 1887년부터 1909년까지 자인향교의 교임, 즉 도유사, 장의, 유사의 성명을 기록한 것으로 이를 통해 당시 자인향교의 운영을 책임지고 있었던 세력의 추이를 비롯, 교임의 구성을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청금록 서문과 절목이 기록되어 있다. 청금록의 서문은 앞서 작성된 1881년 청금록 서문의 내용과 마찬가지로 잦은 교임의 교체를 금지하고 있다. 그리고 교임의 선임과 더불어 수령을 보좌하는 일종의 향임인 반수와 공사원을 전직 校首 가운데 선출할 것을 밝히고 있다. 이는 향교의 운영에 관이 깊이 개입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이러한 조치는 현감이었던 오횡묵의 개인적인 행위라 볼 수도 있지만 당시 독립된 현으로서의 역사가 일천한 자인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비록 독립현으로서의 짧은 역사로 인해 지역사회를 영도할 유력사족은 존재하지 않았으나 자인향교의 운영을 주도한 양반층은 존재하였으며 이들은 청금록의 작성, 즉 향교교임의 역임을 통해 그들의 신분적 우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생각된다. 자인향교의 청금록을 통해 이와 같은 조선말기 자인지역 향촌사회의 동향 및 향교의 운영상황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慶北鄕校資料集成』(1),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박소희,유기선

이미지

원문 텍스트

자인향교(慈仁鄕校) 청금록(靑衿錄)
靑襟錄
夫學 校禮義相先之地也上自
國學下及列邑之校其所以養士之
方擇任之道莫不禮以讓之義以制
之爲後學矜式趍向之所聖道由是
而不泯士紀從玆而不墜列 聖朝
以來迨近五百年所儒風蔚興 國
祚線遠狗歟休哉惟我遐鄕章甫之
徒賴以遵守矣挽近天道有晦明氣
數有升沉慕聖之誠心不足養士之
紀綱不振每於擇任之際不遵中古
圈點之規模岡念前人推讓之禮俗上
有數逓之風下有圖薦之習比諸於
古寧不自恧也哉於乎物極必反自
有其理時校長全錫臣甫慨然有述
古禮正士趍之志手粧一冊子遵古制
趍 名之以靑襟錄次第記事而題名之意
語之曰魯經校首中擇㝎班首公事員
各一人及其付錄之日齊會黌堂論
其可否當錄與不當錄一從公議不敢
如前私自記焉云衆咸曰㫖哉言乎且今
校中需用不贍之中偶得校生例納若
干銅改造神門盘床器血鎖鑰鐵鑪
等屬略畧準備庶免臨事窘跲之
歎倫堂內外塗排煥然復新自不謂
有功以與向來憑公營私自肥爲計
者不可同日言之後之人庶有效慕而嗣
而葺之則豈不有宰於斯文也哉玆庸
畧記其槩以示來後云爾
崇禎紀元後五 丁亥十月 日後學朴致準
物錄
東西夾神門改備
倫堂內外塗排 釜○壹座
小盤 壹竹 笏板改備
食器 參件 鐵鑪壹座
羔羙器 參件 鎖鑰參件
知縣 李奎學
都有司 全錫臣
都訓長 金基璡
掌儀 裴鶴祚
安宅懽
接有司 朴振鎬
班首 朴致準
公事員 裴鳳祚
齊有司 蔡聖述
節目
一三齊任如或呈遞而自官薦主指名
下帖之日班首公事員齊會黌堂爛議
薦報是矣若有循私狹雜之弊則自
鄕中當有論罰事
一三齊任遞歸之日班首公事員及前節
校首一齊來會當錄不當錄一遵公議事
一此錄所重與他自別曾前儒案靑襟錄
及其他校中可考文卷藏之一櫃置于殿
司廳開金使公事員擔當母至輕昜開閉 輕湯 輕湯

一付錄時需用之資量宜措處母或浪費校
財事
一班首公事員遞代之期以每年冬至士會中
準限而開金等爲傳掌事
戊子正月日
不侫時在校長捄得西齊例納畧干銅修
備○種物件列錄于左以示來後云爾
盥洗大匜一座改備
校位田畓圖錄冊子一卷改備
外三門環鐵櫃鎖鑰改造
紅箭門顚倒後改䢖
右後學 朴貞憲
小盤 一竹
右後學 李浩翼
都有司 朴貞憲
掌儀 全致和
朴亨祚
都有司 金漢顯
掌儀 安始東
朴枓憲
都有司 李浩翼
掌儀 朴時午
崔炳鶴
朴正敎
訓長 崔承國
全性臣
接有司 李孝榮
知顯 吳宖黙
班首 朴致準
公事員 朴震憲
戊子十一月十九日
知顯 李鼎宰
都有司 崔慶會
都有司 全必德
都有司 朴基定
掌儀 安暻河
都有司 金采圭
掌儀 朴章畦
金基一
都有司 崔敬坤
掌儀 朴嶂河
都有司 李春榮
都有司 朴滿源
掌儀 金祐坤
都有司 安琫
掌儀 李相權
金震鶴
訓長 李圭纘
接有司 崔在貞
班首 朴震憲
公事員 崔基洪
己丑十一月二十九日
知顯 李鼎宰
都有司 李圭祥
掌儀 朴萬祚
崔仁鶴
都有司 朴光洛
掌儀 崔炳俊
朴在鎬
都有司 具震坤
都有司 張武相
掌儀 李寅鉉
訓長 朴貞憲
接任 李斗祥
班首 金采圭
公事員 安炳斗
庚寅十一月十二日
都有司 崔承國
掌儀 金誠煉
金聖珪
都有司 裴祥楨
掌儀 金誠煉
朴學仁
朴鎭均
訓長 李敬魯
接有司 全致和
班首 崔碩崑
公事員 裴鶴祚
辛卯十一月二十二日
知顯 趙元植
都有司 李貞和
掌儀 李圭覲
全致憲
都有司 朴升宇
掌儀 李圭覲
全致憲
訓長 朴震憲
接有司 朴嶂河
班首 崔承國
公事員 崔翔振
壬辰十一月初三日
知顯 趙元植
都有司 朴應瑞
掌儀 崔懿坤
白振瓘
知顯 李晩胤
都有司 金漢顯
掌儀 朴嶂河
崔日錫
都有司 金駿諧
掌儀 朴嶂河
崔大坤
知縣兼都有司 李晩胤
掌儀 朴嶂河
崔大坤
敎長 朴致準
訓長 李震發
接有司 金武鎬
班首 朴光洛
公事員 金致和
癸巳十一月十四日
都有司 李秉魯
都有司 金廷權
知縣 李晩胤
都有司 朴振鎬
掌儀 崔仁學
金采鎬
都有司 金鼎燮
掌儀 崔仁學
都有司 崔在亨
掌儀 李圭泰
安興壽
都有司 李孝祥
掌儀 全致舜
朴啓憲
崔秀震
都有司 裴道彦
掌儀 安敬鐘
朴龍祚
都有司 崔碩峯
掌儀 朴星鎬
崔禹錫
訓長 金采圭
接有司 金性河
班首 安琪一
公事員 李相權
知縣 曺有承
甲午十一月二十六日
都有司 全致和
掌儀 裴祥壽
金德河
知縣兼都有司 曺有承
掌儀 朴章禹
朴星鎬
都有司 金尙一
掌儀 崔昌業
金昌鎬
都有司 安相浩
掌儀 秋周曄
都有司 朴光根
掌儀 金相珪
都有司 金章祿
掌儀 尹守業
都有司 朴嶂河
掌儀 全奉祚
李弘幹
訓長 李春榮
接有司 崔日錫
班首 朴貞憲
公事員 全致舜
乙未十一月初十日
都有司 安炳喜
掌儀 崔漢坤
李圭源
金在海
都有司 崔在貞
掌儀 安泰鍾
崔翰聲
金顯奎
曺秉浩
都有司 金基奭
掌儀 李根秀
班首 崔基一
訓長 裴祥楨
接有司 朴星鎬
公事員 白鎭玉
知縣 曺有承
都有司 全尙臣
掌儀 朴致舜
李漢聲
都有司 崔海承
掌儀 金武鎬
班首 崔在亨
訓長 崔基一
接任 李圭覲
公事員 金性河
知縣 曺有承
丁酉十一月十九日
都有司 朴周憲
掌儀 金應河
安尙鎭
都有司 安啓煥
掌儀 裴瑀潤
都有司 崔相淳
掌儀 金文鎬
都有司 全致舜
掌儀 裴玄龍
朴斗萬
都有司 安周魯
都有司 崔奭幹
掌儀 朴元奎
班首 全尙臣
訓長 崔在貞
公事員 崔大坤
知縣 李寅正
戊戌十一月十六日
接有司 朴汶祚
都有司 張炳斗
掌儀 具春和
都有司 金鳳翰
掌儀 全致旭
都有司 金廷立
掌儀 金泳琇
安善鍾
都有司 崔碩鵬
掌儀 裴祥沃
安鎭泓
都有司 朴學龍
掌儀 崔斗鉉
金炳宇
都有司 朴在河
掌儀 全致澋
李祺榮
都有司 玄鍾洙
都有司 尹滋轍
掌儀 朴永春
金光業
訓長 李孝榮
接任 崔大坤
班首 張武相
公事員 金昌鎬
知縣 李敏星
己亥十一月二十日
都有司 崔禹錫
掌儀 李鍾浩
金相昊
都有司 金基郁
掌儀 安炳鎬
都有司 朴章杓
掌儀 安應龍
都有司 金漢昊
掌儀 朴楨淳
都有司 崔炳俊
掌儀 李圭夏
尹載弘
都有司 李斗祥
掌儀 崔錫友
崔燦奎
都有司 安尙鍊
掌儀 李東晩
姜鳳賢
都有司 朴東幹
都有司 金章佑
都有司 姜珉浩
掌儀 李鳳周
訓長 朴周憲
接任 裴祥沃
班首 李孝祥
公事員 李圭覲
庚子十一月初六日
都有司 具世洪
掌儀 金柄洙
裴龍道
都有司 裴致善
掌儀 申秉周
邊斗鎭
辛丑五月三十日
都有司 李秉久
掌儀 金尙培
都有司 金基鳳
掌儀 李圭萬
朴斗宖
都有司 金㝎珪
掌儀 崔炳奎
李鍾紹
李萬祚
李東浩
都有司 朴在巑
掌儀 全丁錫
金德基
金錫鎭
都有司 金性河
掌儀 鄭奎燦
白性寬
都有司 朴章禹
掌儀 朴斗汶
朴仁祚
都有司 朴元燮
掌儀 裴東鎬
李基泓
金泰植
都有司 白鎭玉
掌儀 裴東鎬
李基泓
訓長 朴振鎬
接有司 崔仁學
班首 崔相淳
公事員 全奉錫
知縣 閔致殷
辛丑十一月十二日
都有司 權台燮
掌儀 朴相奎
許宥
都有司 金鍾馹
掌儀 朴相奎
都有司 金在珪
掌儀 李圭煥
金鍾浩
都有司 金錫斗
掌儀 李應幹
朴鍾汶
都有司 朴應燮
掌儀 李應幹
尹龍浩
都有司 崔正基
掌儀 盧秉海
裴龍佑
都有司 金鳴淳
掌儀 尹廷植
朴滿安
都有司 李孝榮
掌儀 安仁坤
崔仁翰
都有司 朴致皥
掌儀 朴斗憲
金錫汶
都有司 李在穆
掌儀 李相佑
曺永鎬
都有司 朴振鎬
掌儀 崔沂誠
崔致浩
安鍾律
訓長 李孝祥
接任 金采鎬
班首 金基鳳
公事員 裴祥沃
知縣 李寅競
壬寅十一月二十四日
都有司 朴振鎬
掌儀 裴鎭佑
崔定洪
都有司 朴能憲
掌儀 朴學宗
宋思敬
都有司 朴光洙
掌儀 許仁
都有司 安定坤
掌儀 朴鎭澤
金鍾玉
白淳昌
朴時瑩
金泳禹
都有司 全致璟
掌儀 李潤鎬
金漢聲
都有司 朴在鳳
掌儀 崔馹亮
李禎世
訓長 崔正基
接任 李圭煥
班首 崔炳俊
公事員 朴鎭杓
知縣 李寅競
癸卯十一月初五日
都有司 孔在德
都有司 愼炳敖
掌儀 金鳳述
朴魯泰
都有司 金基厚
掌儀 李原雨
都有司 金應璹
掌儀 崔基楨
都有司 崔基穆
掌儀 安鍾燦
崔昌洵
訓長 金基鳳
接有司 崔錫友
金相昊
班首 朴振鎬
公事員 金震鶴
知縣 李寅競
甲辰十一月十六日
都有司 崔萬鉉
掌儀 李玟和
金碩基
都有司 朴相業
掌儀 崔翊洙
許鍈
都有司 金聖珪
掌儀 崔翊洙
許鍈
崔昌壽
知縣兼都有司 金榮淑
掌儀 崔翊洙
裴錫禹
都有司 朴汶祚
掌儀 張在杰 改名在洙
金衡洙
崔浩龍
崔孝達
都有司 金致魯
掌儀 裴鍾杓
訓長 全致和
接任 李鍾鎬
班首 崔正基
公事員 金炳宇
知郡 金榮淑
乙巳十一月二十六日
都有司 金基彩
掌儀 朴庸孝
金斗河
都有司 李在洪
掌儀 裴鍾杓
朴永頊
崔東秀
都有司 安斗坤
掌儀 裴鍾杓
宋錫久
都有司 李圭成
掌儀 裴鍾杓
朴彩奎
都有司 朴埰發
掌儀 裴鍾杓
朴彩奎
訓長 朴學淵
接任 裴瑀潤
班首 金基文
公事員 張在杰 改名在洙
知郡 金榮淑
丙午十一月初八日
都有司 李圭覲
掌儀 崔鏞漢
金泳琪
朴桂守
都有司 崔珠烱
掌儀 裴容奎
崔濟述
都有司 金秉周
掌儀 禹在善
都有司 朴珣性
掌儀 權炳祐
安在元
都有司 白振瓘
掌儀 朴時瑩
金泰元
訓長 朴在河
接任 金震鶴
班首 崔在貞
公事員 安東吉
知郡 金榮淑
丁未十一月十九日
都有司 朴時瑩
掌儀 安東烈
李圭朝
都有司 吳舜模
掌儀 李圭朝
都有司 宋光壽
掌儀 裴在淵
李章和
訓長 崔相淳
接任 金尙培
班首 朴學龍
公事員 金采鎬
知郡 秦永濂
戊申十一月二十九日
隆熙二年戊申十一月自政部成均館例改正官報叙任
鄕校直員判任官
直員 崔大坤
接所訓長 朴應燮
有司 金昌鎰
郡守 洪昌燮
己酉十一月十一日
直員 李弘幹
郡守 洪昌燮
直員 邊尙黙
郡守 金承杓
直員 石濟元
郡守 崔麟容
都有司 裴兢祚
郡守 崔麟容
都有司 李圭皓
郡守 崔麟容
都有司 朴能鎬
郡守 崔麟容
都有司 崔秉熙
郡守 崔麟容
都有司 崔斗鉉
郡守 孫之鉉
都有司 朴洪汝
郡守 孫之鉉
都有司 金震鶴
郡守 孫之鉉
都有司 金昌鎬
郡守 孫之鉉
都有司 裴瑀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