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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3년 청도향교(淸道鄕校) 교중감역사실(校中監役事實)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4+KSM-XG.1843.4782-20120630.Y1210604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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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중수기
내용분류: 경제-토목/건축-중수기
작성주체 청도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면 교촌동
작성시기 1843
형태사항 크기: 25 X 33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청도 청도향교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면 청도향교 문중소개
현소장처: 청도 청도향교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면 청도향교

안내정보

1843년 청도향교(淸道鄕校) 교중감역사실(校中監役事實)
1843청도향교에서 향교의 중수공사를 완료하고 중수공사를 감독한 사실에 대해 기록한 교중감역사실(校中監役事實)이다. 청도향교는 이미 1734년에 한 차례의 중수공사를 거쳤으나 100여 년이 지나면서 건물이 퇴락하여 중수의 여론이 일어났다. 이어 1842년 겨울에 재목 등의 준비를 시작하고, 1843년에는 중수공사를 완료하였는데, 본 문건은 그 월 일에 대해 기재되어 있지 않으므로 작성의 시점까지는 알 수 없으나 동 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본 문건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부분은 청도군수송계백이 향교중수를 진행함에 있어 일을 주도면밀하게 처리하여 본 군의 산에서 재목을 베어서 쓰게 하여 재목을 원거리에서 수송할 필요를 없애는 등, 민력의 동원을 최소화하고 사림들의 협조도 많았으므로 중수공사가 예정보다 훨씬 빨리 끝난 사실 등, 중수과정의 진행상황을 기록한 부분이다. 둘째 부분은 이 번의 중수공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노고를 기록한 부분으로, 성조감(成造監)을 맡은 김재곤(金再坤)은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드는 돈은 자신의 개인경비로서 충당하였고, 불철주야 공사의 감독에 최선을 다하였다. 예시보(芮時補)는 병이 있는 몸으로도 공동 성조감을 맡아 병석의 와중에도 최선을 다해 공사를 감독하였다. 이외에도 공사 참여인원의 노고를 일일이 기록하였으며, 중수공사가 무사히 끝났으나 국상(國喪)이 일어나게 되어 향교중수의 완공을 경축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게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慶北鄕校資料集成(1),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慶尙北道, 1991.
남민수

상세정보

1843청도향교에서 향교의 중수를 끝내고 중수공사를 감독한 사실을 기록한 校中監役事實
내용 및 특징
1843청도향교에서 중수공사를 완료하고 이를 감독한 사실에 대해 기록한 校中監役事實이다. 청도향교1734년에 한 차례의 중수공사를 거쳤으나 100여년이 지나면서 건물이 낡고 허물어진 곳이 생겼으므로, 1842년에 부임한 청도군수宋啓柏의 재임시에 중수논의가 일어났다. 이에 宋啓柏의 주관하에 향교중수가 결의되어 이듬해인 1843년에 본격적으로 공사가 시작되어 그 해에 공사가 완료되었다. 본 校中監役事實은 당시 工事에서 주요 역할을 했던 사람들의 활동에 대해 기록한 것으로 현재의 감리보고서와 같은 성격의 문건이다. 본 문건은 두 부분으로 되어있다. 첫째 부분은 향교중수공사의 과정을 간략하게 소개한 부분이다. 즉, 시기에 알맞게 宋啓柏청도군수로 부임하였는데 이로 인해 중수공사가 빠르게 진행되었고, 군수가 지혜를 내어 중수공사에 소요되는 材木을 본 郡의 山에서 조달하게 하였으므로, 먼 곳에서 材木을 수송하기 위해 民力을 동원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843 12월에 본 郡의 山에서 材木을 베어내고 준비를 마친 뒤, 1843년 3월 5일부터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사람들의 협조로 매우 빨리 공사를 마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부분은 중수공사에 참여한 여러 사람의 노고에 대해 기술한 부분이다. 청도향교의 齋長인 金再坤은 成造監을 맡아 중수공사의 총감독을 하였다. 그는 한 푼의 儒戶錢도 자신의 개인 경비로 쓰지 않았고, 개인 경비로는 자신의 돈을 쓰면서 불철주야 공사의 감독에 최선을 다했다. 그와 더불어 成造監의 임무를 맡은 芮時補는 몸이 몹시 아파 불편했으나 회의가 열리면 반드시 참석하였고 병석의 와중에도 자신의 책임을 다하고자 하였다. 기록을 맡은 관리인 金晙河는 都檢의 책임을 맡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공사를 독려했다. 이 밖에도 李光鬱, 金光道등은 將校로써 일꾼들의 감독에 참여하였고, 色吏인 金赫五, 金-國등도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며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주야로 노력하여 향교가 조기에 완공되었으나, 때마침 國喪이 일어나서 淸道士林을 위한 경축연을 베풀지 못한 것은 큰 아쉬움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자료적 가치
1843청도향교중수과정을 소상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료 중의 하나이다. 이 문건을 통해서도 당시 청도향교의 중수가 청도유림의 숙원 사업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慶北鄕校資料集成(1),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남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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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3년 청도향교(淸道鄕校) 교중감역사실(校中監役事實)
校中監役事實
校役之營始始有移建而基址之未定財力之不足仍貫舊址
重建質議故鄕中排任自然見逓但以成造齋長監事矣始事
壬寅至月之日所用之材四山取來木有本泉運無民弊本
宋侯之恢弘大智化被物物名家大度仰見於校宮之敦事
癸卯三月初五日聖廟破屋之後徃徃親覩眷眷使役工匠
之矩規庶民之子來皆律如焉齋長金再坤兼行成造監事己
重大夙宵戰兢恒留校中不歸家里規矩敦匠省弊民丁事之
巨細親執勤導每患財力之不足不犯儒錢而食飮士曰有義
民曰無怨以齋長之不食都下監役諸任亦皆自備而幹事矣
成造監芮時補亦當重任非不勤幹而病不能恒留役所每當
有事則必參會席無不修議矣記官金晙河素有輿望而鄕出
都檢及其任役之日夙宵在公掌下事事必告於都所與一心
做事無有違越工匠持麾之道各遵優劣役丁董督之方亦無
苦歇又於雜用散下之節功料磨鍊之式至公且淸煩重事務
一副誠規廉勤已著將校李光郁全光道色吏金赫五金聲國
四人各有將吏擧行而見事動靜晨入暮還雖雨盛暑自修差
番未嘗一日小懈其誠亦嘉矣諸任之誠敬如此竢事之方亦
甚輕捷未朞年而校宮翼然復成斯莫非主倅之興學耶抑
亦任司之勤導歟然畢事之際不幸遭逢國哀未能落成之
樂非但士林之欠事亦爲任司之慨吁處也至於都木手冶匠
工人等處賞秩之事自官別有施惠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