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디렉토리 분류

상주향교(尙州鄕校) 청금록(靑衿錄)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4+KSM-XG.1692.4725-20120630.Y1232102001
URL
복사
복사하기

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치부기록류-선생안
내용분류: 교육/문화-서원/향교-유안
작성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작성시기 1692
형태사항 크기: 40 X 26
수량: 12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상주 상주향교 / 경상북도 상주시 신봉동 문중소개
현소장처: 상주 상주향교 / 경상북도 상주시 신봉동

안내정보

상주향교(尙州鄕校) 청금록(靑衿錄)
본 자료는 1723년부터 상주향교에서 작성된 양반사족의 명부인 청금록이다. 상주향교의 청금록은 1692년부터 1738까지 작성되었고 총 2책이 현전하고 있다. 본 자료는 그 가운데 하나로 1692년부터 1718년까지의 기록이다. 조선시대 향교의 교생에게는 군역면제를 비롯한 각종 특권이 부여되었고 이러한 특권의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군현의 대소에 따라 교생의 수가 차등적으로 규정되었다. 법적으로 규정된 정액내의 교생을 액내교생이라 하였고 양반사족들은 액내교생으로 입교하여 향교의 운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에 반해 서얼 및 평민들은 정액외의 교생, 즉 액외교생으로의 입학을 통해 교생에게 주어진 특권을 획득하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로 오면서 서얼 및 평민층의 액외교생으로의 입교가 증가하게 되었고 이러한 현상은 군역의 부족을 초래하였다. 따라서 중앙정부는 교생을 시험하여 수준미달의 교생을 군역에 강정하는 교생고강을 실시하게 된다. 교생고강은 액내, 액외의 구분없이 모두 고강하고 탈락자는 군역에 충정하는 강력한 정책이었다. 교생고강이 실시되자 양반들은 점차 향교 교생으로의 입학을 점차 회피하게 되었다. 양반들의 군역면제가 조선후기로 오면서 점차 보편화되는 추세에게 굳이 향교에 교생으로 입학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반들은 교생으로의 입학을 회피하였을 뿐 향교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유효하였다. 향교는 고을의 유일한 관학이자 공자의 위패를 모신 성리학전파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양반사족들은 종래 교생으로 입교를 피하는 대신 그들만의 명부인 청금록을 작성하고 스스로 청금유생이라 칭하면서 향교의 운영에 지속적으로 관여하였다. 그리고 당시 청금유생으로 입록된 인물들은 향안 또는 서원안에도 동시에 입록된 지역의 유력집안들이었으며 이는 당시 작성된 청금록과 향안 및 서원안과의 비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상주지역의 경우 서원(남인계 서원인 도남서원과 서인계 서원인 흥암서원)은 당색간의 분명한 구분이 있었는데 반해 향교의 경우에는 당색간의 구분없이 일향의 사림이 모두 관여되어 있었다. 이를 통해 당시 상주향교가 서원과 더불어 양반사족들의 향론을 결정하는 하나의 향촌기구였음을 알 수 있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유기선,박소희

상세정보

1692년부터 1718년까지 尙州鄕校에서 작성된 양반 유생의 명부인 靑衿錄
내용 및 특징
『청금록』은 조선후기 향교의 청금유생을 기록한 명부이다. 그리고 청금유생은 향교에 출입하였던 양반사족의 명부로서 평민 또는 서얼들로 이루어졌던 校生과 대비되는 존재들이었다. 당연히 이들 청금유생은 교임과 더불어 향교를 구성하는 중요한 인적 구성요소이자 향교 운영의 담당자였다. 이러한 교생과 청금유생의 분화, 즉 청금록이 작성되는 직접적인 원인으로는 인조년간 교생고강의 실시와 과거응시 자격부여라는 2가지의 요인을 들 수 있다.
먼저 교생고생의 경우, 조선초기 국가에서는 인재양성과 향촌교화를 위해 양반은 물론 평민까지도 16세 이상 이면 교생으로의 입학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교생에게는 軍役免除를 비롯한 무상교육 및 하급관리로의 진출 등의 여러 특권이 부여되었다. 이러한 특권의 무분별한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중앙에서는 군현의 등급에 따라 교생의 수를 규정하였다. 『經國大典』에 규정된 교생의 수는 府, 大都護府, 牧은 90명, 都護府는 70명, 郡은 50명, 縣은 30명으로 이는 世祖代의 액수에서 두배 정도 증액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생의 정원은 『大典會通』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지켜졌다.
교생에 대한 정원이 법적으로 규정된 이후. 양반사족들은 군현의 등급에 따라 규정된 정액내의 교생, 즉 額內校生으로 향교에 입교하여 향교의 운영에 관여하였다. 그에 반해 군역회피를 목적으로 한 非양반층의 정원 외의 입교 또한 이루어졌으며 정원 외의 교생을 額外校生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액외교생은 점차 증가하였고 마침내 심각한 사회문제화 되었다. 당시 액외교생의 증가현상은 "校生이라고 이름을 붙인 閑游의 무리들의 수가 너무 많아 中和·安東·南原 같은 곳은 혹 1천 명에 이르고 있다는데 그러한 부류들을 軍額에 채워 넣지 못하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이 괴로움을 당하고 身役도 고르지 못한 것입니다."라 할 정도로 액외교생의 증가현상은 영남을 비롯한 평안남도 및 호남의 大邑에서도 광범위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교생의 증가는 군역 부족의 큰 원인이 되었고 교생의 증가로 인해 교생의 지위 또한 雜類라 인식될 만큼 악화되고 있었다.
중앙정부와 양반사족의 입장에서 교생의 증가현상은 큰 위협이 되었다. 우선 군역부족의 문제가 심화될 뿐만 아니라 교생으로의 입교를 통한 평민의 광범위한 신분상승 현상이 발생하였기 때문이었다. 지방에서의 官學의 상징인 향교가 양반사족이 아닌 평민교생에 의해 장악되고 제례를 비롯한 유교의식에 그들이 참여하는 것은 신분질서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校生考講을 통해 불법적이고 비대해진 교생집단을 정비하려 하였다.
교생고강에 대한 논의는 인조대에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다. 교생에 대한 고강은 조선초부터 규정되어 있었으나 敎官의 무능과 이에 따른 향교교육의 쇠퇴 등으로 인해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 교생의 질적하락이 사회문제화 됨에 따라 인조년간 보다 상세하고 강력한 고강정책이 실시된다.
우선 교생을 고강하여 落講者는 軍役에 보충한다는 ‘落講者直定軍役’의 원칙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당시는 교생고강이 오랫동안 실시되지 않았고 고강에 대한 세부적인 규칙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라 많은 논란이 있었다. 이 가운데 가장 큰 쟁점은 고강대상의 범위와 낙강자에 대한 처리의 문제였다. 이는 양반사족의 이해관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기에 조정에서 많은 논란이 발생하였다.
우선 고강대상의 범위를 설정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額數의 多少를 따지지 말고 오직 入格 여부만으로 取舍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는 司憲府의 건의가 받아들여지는 것으로 보아 사헌부의 건의 이전에는 액내교생만을 고강한 후 낙강자를 군역에 충정하고 액외의 경우에는 고강없이 곧바로 군역에 충정하려 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영남지역은 액내교생이 사족이고, 호남은 액외가 사족인, 즉 지역마다 액내와 액외의 신분구성이 다른 상황에서 액내교생만을 고강하고 액외는 군역에 충정하려는 규정은 실행되기 어려웠기에 위의 사헌부의 건의대로 액내와 액외를 모두 고강하여 낙강자를 군역에 충정토록 하였다.
낙강자의 처리문제에 관해서는 고강대상의 범위에 비해 더욱 큰 논란이 있었다. 당시 여론은 크게 2가지로 나뉘었는데, 신분의 고하에 상관없이 낙강한 자는 곧바로 군역에 충정해야 한다는 주장과 낙강자라도 양반의 경우에는 일반 평민과 서얼 교생과는 처리를 달리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문신들은 후자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그 이유로는 양반의 자제들을 고강하여 곧바로 군역에 충정하는 것은 그들을 死地로 몰아넣는 일과 다름없으며 양반을 良人의 처지로 만드는 것이라는 이유였다. 즉 임란후 신분질서가 문란한 상황에서 사족을 군역에 충정하는 것은 신분질서를 더욱 문란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는 이유로 양반의 군역충정을 반대하였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신료들은 지역에 따라 각 도의 상황을 살펴 고강을 실시하되 평민과 서얼과 같은 계층의 교생이 낙강할 경우에는 곧바로 군역에 충정하고 사족의 경우에는 罰布만을 징수토록 건의하였다. 그러나 당시 인조는 고강이 신분에 따라 다르게 시행되어야 함은 조정의 신료들과 의견을 같이하였으나, 향교의 교생은 모두 雜類이므로 일체로 고강하고 定役하는데 문제가 없다고 보았다.
인조의 이와 같은 강력한 교생고강법은 현실적으로 강행되기 어려웠다. 갑작스러운 고강의 실시는 군역에 降定됨을 의미하였기에 사족 뿐만 아니라 비사족교생 모두가 반발하였다. 더욱이 인조의 주장으로 四部學生이 고강에서 면제되자 형평성문제가 제기되었고 교생고강이 勸學보다 군액확보에만 치우쳐 先後가 전도되는, 즉 향교의 설립목적이 훼손된다는 반대여론이 심화되었다.
결국 인조가 동의하였던 강력한 낙강정군의 고강법은 시행되지 못하고 절충안이 채택되었다. 절충안은 낙강자를 당장 군역에 降定치 말고 收布한 뒤 3년간의 講習기간을 주고 다시 고강하여 그 때도 낙강하는 경우 군역에 강정한다는 것이었다. 이로써 가장 논란이 많았던 낙강자 처리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그리고 당시 결론에 신분에 따라 달리 고강한다는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액내와 액외교생 모두를 고강대상에 포함시켜 실행한 것으로 보인다.
진통 끝에 인조 4년(1626) 교생고강법의 세부규칙이 마련되고 곧 시행되었으나 곧 정묘호란의 발생으로 고강은 중단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민심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 상황에서 교생고강의 강행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정묘호란이 끝나고 인조 9년(1631), 교생고강은 都事의 책임하에 재개되었으나 이후 고강에 대한 별다른『실록』의 기록이 없고, 고강이 폐지되어 법을 설치한 뜻이 없다는 備邊司의 啓로 미루어 보아 인조 9년에서 인조 21년까지 교생고강이 엄격히 실시되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인조 22년(1644) 교생교강은 다시 거론되어 「校生考講事目」의 반포를 통해 구체적인 원칙이 재정비되었다. 제정된 「校生考講事目」은 액내와 액외교생 모두를 고강하고 낙강할 경우 벌포 대신에 武學에 降定하고, 3년 뒤 무학을 試才하여 또다시 才落할 경우에는 영구히 軍保에 강정한다는 내용이 규정되었다. 이로써 인조대 전반에 걸쳐 진행되었던 교생고강에 대한 논란은 일단락되었고, 실제로도 고강에 낙강한 교생을 무학에 강정하고 군역에 충당하는 조치가 顯宗代까지 실시되었다.
이상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인조대에 마련된 교생고강은 액내외 구별없이 모두 고강하였고 낙강할 경우에는, 비록 재시험의 기회가 있으나 군역에 강정되는 정책이었다. 이러한 교생고강은 무자격 교생들을 도태시키는 데에는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으나, 반면에 양반사족의 액내교생 회피현상을 초래하게 되었다. 임란 후 군역면제라는 신분적 특권이 점차 확립되어 가는 상황에서 굳이 향교에 입교할 필요가 없었던 사족들은 향교를 점차 외면하는 경향이 심해져 갔다.
이에 조정에서는 사족들의 향교입학을 강제하기 위해 과거응시자격을 校籍에 등재된 자로 제한하게 하는 조치를 교생고강과 함께 실시하였다. 교적 등재인에 한한 과거응시자격 부여정책은 교생고강이 실시된 인조년간 뿐만 아니라 孝宗肅宗 시기에 걸쳐 지속적으로 규정되었고 이를 통해 양반사족의 향교참여를 유도하고자 하였다.
교생고강이 실시되고 과거응시자격을 校籍에 등재된 자로 제한하게 되자 양반사족들은 종래의 액내교생에 더 이상 이름을 올리지 않고 그들만의 명부를 따로 작성하게 되었다. 『儒案』또는 『靑衿錄』 등이 그 결과물로 양반사족들은 이러한 양반사족들 만의 명부를 따로 작성함으로써 考講을 회피하는 동시에 과거응시요건을 충족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청금록』의 작성 후 명칭에 있어서도 더 이상 교생이 아닌 스스로 儒生으로 칭하여 교생들과의 신분적 차이를 분명히 나타내고자 하였다.
상주향교에서도 위와 같은 유생과 교생의 분화가 뚜렷이 진행되었다. 먼저 액내교생과 액외교생의 경우 분화를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남아 있지 않으나 현재 상주향교에 남아있는 『준분록』에서 액외교생의 존재를 단편적이나마 확인할 수 있다. 제례에 참석하였던 양반사족의 명단 끝에 특별히 額外라 표시하고 명단을 기재하였는데 壬戌春(1622)의 제례에 孫覃緖, 壬戌秋의 제례에 韓克亨·金衍慶, 癸丑春(1623)의 제례에 韓克亨, 癸丑秋의 제례에 韓克亨·孫覃緖·金衍慶의 이름이 중복 확인된다. 이들은 특별히 액외로 호칭되고 鄕案이나 서원자료에서 이들의 이름을 확인할 수 없는 점으로 보아 당시 교임을 보좌하여 제례를 준비하고 시행하였던 서얼 또는 평민층으로 구성된 액외교생 가운데 하나였다 생각된다. 그리고 액내교생은 관련 기록이 현재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없으나 액외교생과 대비되는 양반사족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액내·외로 구분되었던 상주향교의 교생은 교생고강이 실시된 인조년간 이후, 즉 17세기 중반 또다시 유생과 교생으로 분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현재 상주향교에 남아있는 『校案』과 『靑衿錄』이 그 산물로써 두 案은 더 이상 액내교생이 아닌 유생으로 호칭되었던 양반사족의 명부이다. 교생고강이 실시되고 평민·서얼층의 향교 입교가 가속화되어 가는 상황에서 종래의 액내교생안으로의 입적이 더 이상 양반의 상징이 될 수 없게 되자 양반사족들은 그들만의 명부를 작성하게 되었고 『교안』과 『청금록』이 그 결과물이었다.
州縣의 鄕校에서는 平人도 入籍하였으니 八路(八道) 중에 七路(七道)가 다같이 그러하고 유독 우리 嶺南만이 衣纓家의 子弟들 만이 종사하여 왔다. 대개 칠로가 이렇게 하는 것은 칠로가 한 것이 아니라 國典이 그렇다. 國典을 相考하여 보면 校生의 序列이 土官의 아래에 있으니 土官이란 鄕吏를 말한다. 이 鄕吏가 교생의 앞에 있으니 교생의 지위는 가히 알만하다. 이것은 國典 때문이었다. 근년에 朝家의 事目에 軍士子枝들이 校籍을 가지고 避軍을 도모하고 있다 하였다. 이로 보면 校生들이 平人인 것을 알 수 있겠다. 嶺南이 七路와는 달리 하면서도 점차 따라가고 있어 지금은 능히 變通할 수 없게 되어가니 이는 士氣가 萎縮되거나 習俗이 달라져서 그런 것은 아니다. 法이 한결같이 하나로 행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기에 이른 것이니 이 어찌 嶺儒만의 羞恥이겠는가? 이는 조가의 결전으로 생각을 깊이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어진 牧使는 斯文의 宗匠으로 朝廷의 命에 의하여 우리 州에 赴任한지 數個月에 온 州의 백성들이 善政에 힘입어 生業에 즐기고 있다. 금년 봄에 先聖에게 釋奠을 드리고 난 다음 鄕中의 父老와 諸生들이 公席을 베풀고 禮遇하였다. 이어서 嶺儒들의 襲謬의 弊端과 朝家의 行會하는 뜻을 開陳하고 七道의 規를 행하기를 청하니 이가 採納되어 이 常典을 成章하고 施行할 節目은 條例로 다음과 같이 정하여 久遠토록 尊行하게 되었으니 朝家에서 靑衿을 구별하고 士族을 優禮하는 뜻이 지극하다. 생각건대 이름이 이 靑衿錄에 실려있는 者 日往邁進하고 勉勵提撕하여 함께 菁莪(興學)의 化를 입고 모두 棫檏(良材)의 材가 되어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蔚然히 세상에 소용이 될 것이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니 諸生들은 힘써야 할 것이다.
라는 靑衿錄 序文에서 알 수 있듯이 상주지역 또한 점차 타 지역과 마찬가지로 점차 평민·서얼층의 교생입학이 확대되고 있었으며 그로 인한 교생의 지위하락이 심각해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내에서 향교에 출입하였던 상주의 양반사족들은 청금록의 작성을 통해 향교에 입교한 평민·서얼층에 대한 신분적 우위를 확보하고자 하였으며 청금록작성과 더불어
一. 校生으로 失體乖理者가 있으면 上齋 都有司가 輕 즉 禁罰하고 重 즉 報官할 것. 一. 校生으로 完議에 있지 않고 恣行하여 기탄이 없는 자는 鄕堂에 통고하여 賤任에 差定할 것. 一. 校生으로 番에 빠진 자는 官家에서 비록 혹 不問하더라도 生齋 都有司가 禁罰을 사용하고 두 번 빠진 즉 官에 告한다. 一. 校生은 나이 50으로 한정한다.
와 같은 完議을 제정함으로써 이를 통해 평민·서얼층으로 이루어진 교생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현전하고 있는 상주향교의 『청금록』은 모두 2책으로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에, 壬申年(1692)부터 戊午年(1738)까지 46년간 22회에 걸쳐 작성되었고 총 1441명이 입록되어 있다. 본 자료는 그 가운데 하나로 1692년부터 1718년까지의 청금록이다. 작성주기는 6개월에서 6년으로 다양하나 대체로 1~2년을 주기로 加錄되고 있다. 중복된 경우 없이 매번 새로운 인물이 입록되고 있으며 입록인원은 19명에서 265명까지 다양하게 입록되고 있다. 이는 양반사족의 명부로 청금록과 동일안 성격의 사족명부인 『교안』과 같이 『청금록』의 입록에 있어서도 定額의 개념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성씨별 입록상황(1692년부터 1738년까지 2책으로 작성된 전체 청금록자료를 대상으로 한다. 후술하는 청금록 또한 마찬가지임을 밝혀둔다.)을 보면, 총 40개의 성씨가 입록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50명이상 입록성씨는 金씨가 297명, 李씨 187명, 趙씨 144명, 黃씨 103명, 洪씨 71명, 高씨 59명으로 이상의 6개 성씨가 861명으로 전체 『청금록』 입록인원의 약60%를 차지하고 있다. 이외에도 康씨 49명, 蔡씨 46명, 康씨 44명, 柳씨 44명, 成씨 43명, 鄭씨 39명 등의 입록이 활발하며 이상의 성씨는 『교안』 입록에 있어서도 타 성씨에 비해 우위를 보이는 성씨들이다. 작성시기별 입록현황에서도 위의 성씨들은 격심한 증감현상 없이 매번 입록수에 있어 꾸준한 우위를 보이고 있다.
『청금록』과 향안과의 관계를 살펴보도록 한다. 두 案에 중복 입록된 성씨를 분석해 보면, 金씨의 경우 『청금록』 입록자 297명 중 145명이 향안에 중복 입록되어 있으며 李씨는 187명 중 102명, 趙씨는 144명 중 65명, 黃씨는 103명 중 44명, 高씨는 59명 중 44명, 洪씨는 71명 중 42명이 중복 입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鄭씨, 康씨, 蔡씨, 姜씨, 柳씨, 成씨 등이 『청금록』과 향안 중복 입록에 수적 우위를 보이고 있다. 가장 많은 중복입록을 보이는 5개 성씨들의 『청금록』과 『향안』의 중복 등재율은 51%에 이르고 『청금록』 전체 입록자로 보면 총 1441명 중 703명, 약 49%가 향안에도 중복으로 입록되어 있다.
金·李·趙·黃·高·洪·蔡·鄭·姜·柳·成씨가 『청금록』 입록에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 성씨들의 상당수는 향안에도 동시에 입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상 성씨들의 17·18세기 향안등재 현황만을 보아도 타 가문에 비해 월등한 수적 우위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청금록』과 향안이 독립적으로 작성·운영된 것이 아니라 두 案 모두 양반사족의 권위를 상징하는 명부로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당시 향교에 출입하였던 청금유생은 향안의 운영에도 동시에 참여하였던 상주의 사족층이었다.
향안에 이어 『청금록』과 서원과의 관계를 살펴보도록 한다. 우선 상주지역 서원의 현황을 간단히 살펴보면, 상주에서는 남인계 서원인 道南書院1607년 건립되었고 1702년 서인계 서원인 興巖書院이 건립됨에 따라 18세기 이후 상주지역사회는 남인과 서인세력이 공존하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서원을 중심으로 남인과 서인세력으로 분리된 이후에도 이들의 향교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으로 유지되었으며 이러한 관심은 교임의 역임과 『청금록』 입록으로 나타났다.
먼저 상주향교도남서원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도남서원상주에 세워진 최초의 서원으로 1605년 상주사림의 발의 이후 약2년의 준비기간을 거쳐 1607년 12월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 도남서원은 문묘에 모셔진 東方五賢을 배향하였고 이후 정경세의 노력으로 柳成龍이 배향됨에 따라 도남서원은 퇴계에서 서애로 이어지는 상주지역 퇴계학파의 구심점이 되었다.
도남서원의 설립은 불과 약2년의 준비기간이 소요되었고 官의 재정적 지원없이 상주지방 전체 사족의 협력으로 창건되었다. 이것은 지방수령의 적극적인 지원하에서도 5·6년 또는 10년 이상의 기간이 소요되었던 일반적인 서원건립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상주사족들의 서원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가와 함께 상주지역 남인 사족의 향촌지배력을 보여주는 일면이라 하겠다.
상주향교 청금유생의 도남서원 출입 여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도남서원의 院生을 기록한 院生案과 같은 자료가 필요하나 현전하는 도남서원의 자료는 『도남서원창설계안』과 『도남서원사실하』와 같은 17세기 중반까지의 기록만이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청금록』이 작성된 1692년 이후의 도남서원과의 관계는 서원자료가 현전하지 않아 직접적인 비교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18세기 이후 작성된 일기류나 족보를 통해 일부를 유추할 수 있다.
조선후기 영남 퇴계학파의 대표적인 학자인 權相一이 남긴 『청대일기』가 대표적인 예로써 일기를 통해 당시 도남서원상주향교와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우선 권상일도남서원에 출입하였던 상주지역 남인의 대표적 인사로 도남서원 뿐만 아니라 향교의 대소사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향교의 接會나 大祭에 참석하거나 향교의 稟目을 검수하기도 하였으며, 향교에서도 제례 후 권상일에게 鄕校致膰을 보내는 등 『청대일기』의 전반에 걸쳐 향교출입 기사가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일기 가운데 道南齋任인 金景淵이 방문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김경연1707년의 『청금록』에 입록되어 있는 인사로 당시 도남서원에 출입하던 인사들은 향교에도 동시에 참여하고 있었음을 단편적이나마 알 수 있다.
그리고 도남서원 창설과 향안 중수에 깊이 관여하였던 상주의 사족들의 후손이 향교에도 꾸준히 출입하고 있었음은 興陽李氏의 예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흥양이씨는 大司憲과 光州府尹을 역임하였던 李垠이 고려멸망 후 상주에 은거하며 상주에 재지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던 韓哲中(淸州人)의 사위가 되면서 상주에 기거하게 되었다. 이은상주 정착 후 검차 기반을 확대하여 갔던 흥양이씨는 李㙉李埈 형제가 당시 尙州牧使로 부임하였던 西厓 柳成龍에게 수학하고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음으로써 상주사회를 영도하는 재지사족으로 성장하였다. 이들 형제는 유성룡에게 수학하였을 뿐만 아니라 유성룡의 高弟인 愚伏 鄭經世와 긴밀히 교류함으로써 상주지역 퇴계학맥을 대표하는 인사로 성장하였고 임란 당시에는 활발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李埈은 문과급제를 통해 향촌사회내 가문의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이들은 임난 후 향촌재편성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향안 중수 당시 李㙉은 座長으로 鄭經世와 함께 향안 중수를 주도하였으며 李埈은 그의 一子인 李大奎와 함께 향안을 직접 작성하였다. 道南書院 창건에 있어서도 이전이준은 창설회원으로 참여하였고 이전의 손자인 李在完이준의 손자인 李在雅도남서원 명륜당 중창시 有司의 역임을 수행하며 도남서원 운영에 깊이 관여하였다.
이렇듯 임란을 전후하여 상주의 대표적인 재지사족으로 성장하였던 흥양이씨는 서원 뿐만 아니라 향교의 운영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李㙉辛酉年(1621) 향교에서 거행된 秋享에 老儒로 제례에 참석하였고 그의 二子인 李德奎와 三子인 李身奎 또한 향교의 제례에 참석한 것이 현재 상주향교에 현전하고 있는 『駿奔錄』에서 확인된다. 李埈의 一子인 李大奎, 二子 李元奎, 三子 李文奎 또한 『준분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덕규이신규, 그리고 이문규는 향교의 제례시 有司를 역임하는 등 향교운영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이신규甲辰年(1664) 『靑衿錄完議』를 작성할 당시 「靑衿錄序文」을 직접 작성하였으며, 전술한 이재완이재아도남서원 명륜당 중창 당시 有司로 활동하였을 뿐만 아니라 『校案』에도 입록되어있다. 그리고 이후의 흥양이씨 자손들도 『靑衿錄』이 작성된 18세기 중반까지 지속적으로 청금유생으로 입록하고 있다. 『靑衿錄』과 흥양이씨 족보를 비교해 보면 총 56명이 확인되며 『청금록』 뿐만 아니라 『교안』(10명) 및 『임원록』(3명)을 통해서도 흥양이씨들의 활발한 향교운영의 참여모습이 확인된다.
이상과 같이 조선후기 류성룡의 문인으로 상주지역 퇴계학맥을 대표하였던 흥양이씨 이전이준의 가문은 상주지역 남인의 중심 근거지인 도남서원의 운영에 깊이 관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청금유생으로 향교에 출입하거나 교임직을 역임하는 등 향교의 운영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다. 그리고 흥양이씨 뿐만 아니라 진주정씨, 개성고씨, 한양조씨 등 당시 상주의 남인사회를 영도하였던 재지사족들 또한 꾸준히 향교운영에 참여하였음을 『청금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도남서원에 이어 상주지역 서인의 대표적인 서원인 흥암서원과 향교와의 관계를 검토해 보도록 한다. 1702년 상주지역에는 宋浚吉을 배향하는 흥암서원이 창건되었다. 흥암서원의 건립은 17세기 중엽 이후 영남지역 서인계의 핵심으로 부상한 창녕성씨 成濫계열을 핵심으로 하는 영남지역 노론계의 입장과 이를 측면 지원함으로써 영남지역에 자신들의 세력 확산을 시도한 노론세력의 의도가 접목되어 나타난 결과였다.
흥암서원은 영남에서 최초로 서원건립에 성공한 서인계 賜額書院이었으며 특히 1716肅宗이 병신처분의 정치적 의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華陽·흥암 兩院에 친필 편액을 내림으로써 흥암서원화양서원에 버금가는 위상을 획득함과 동시에 영남 노론계의 구심점으로 확고부동한 지위를 굳히게 되었다. 그리고 흥암서원을 중심으로 결집했던 상주지역 노론세력의 입지도 더욱 강화되었다.
흥암서원을 중심으로 결집하였던 상주지역내 노론세력들은 향교의 운영에 있어서도 점차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고 있었다. 이는 도남서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교임의 역임과 청금유생으로의 입록으로 나타났다.
흥암서원에 출입하였던 인사들과 상주향교의 관계는 甲申年(1704)부터 乙酉年(1729), 그리고 庚寅年(1770)부터 壬辰年(1772)까지 작성된 흥암서원의 『院錄』과 향교자료의 비교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원록』은 당시 흥암서원에 출입하였던 인사들의 명단으로 24회에 걸쳐 작성되었으며, 총 434명이 입록되어 있다.
『원록』과 향교기록을 비교해 보면, 특히 校任 역임을 통한 항교운영 참여가 두드러진다. 『원록』의 작성시기와 일치하는, 1726년부터 1727년까지 작성된 『焚香錄』에는 당시 향교에 焚香하였던 교임과 恩謁한 儒生 등이 기재되어 있다. 都有司를 비롯한 掌議, 齋任을 역임하였던 교임 6명이 중복 기재되어 있는데 이들은 모두 흥암서원의 『원록』에도 입록되어 있는 인사들이었다. 『준분록』이 작성되었을 당시, 교임의 대부분이 도남서원의 인사였던 사실과는 대조적으로 『분향록』이 작성된 1726년 당시의 교임은 대부분이 흥암서원 인사로 구성되어 지고 있다. 18세기 후반에도 흥암서원 인사의 교임 역임은 유지되고 있는 경향을 보인다.
향교가 校任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교임직을 놓고 鄕戰이 발생할 만큼 향촌내 향교의 중요성이 커지는 시대적 상황에서 흥암서원 인사의 교임장악은 상주지역내 노론세력의 확장을 의미하는 동시에 향촌사회내 鄕權이 점차 이들 세력으로 이동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교임의 장악 외에 노론계 인사들의 청금유생으로의 입록 또한 증가하는 현상을 보인다. 흥암서원의 『원록』과 校籍을 비교해 보면, 1661년 이전의 『교안』에 입록된 金漢相을 시작으로 1738년의 『청금록』까지 흥암서원 인사들의 校籍 입록이 확인된다. 입록수에 있어서는 『교안』의 경우, 1661년 이전 1명, 1663년 4명, 1667년 2명, 1673년 1명, 1676년 3명이 확인되며 『청금록』 작성시기의 경우, 1694년 1명, 1697년 2명, 1701년 1명, 1703년 1명, 1707년 4명, 1708년 4명, 1711년 17명, 1714년 6명, 1716년 5명, 1728년 26명, 1731년 13명, 1732년 3명, 1738년 1명이 확인된다.
흥암서원 원생의 『청금록』입록상황에서와 같이 흥암서원이 건립된 1702년 이전에도 노론세력들은 유생안에 입록되고 있었으며 특히 흥암서원의 건립 후 청금유생으로의 입교가 증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당시 흥암서원 주도세력의 향교에 대한 관심이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도남서원이 창건 될 당시 상주의 남인 사족들은 교임의 역임 또는 청금유생으로의 입록을 통해 향교의 운영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흥암서원의 창건 이후 노론계 인사가 교임을 장악하는 경우도 발생하였고 『청금록』의 입록에 있어서도 흥암서원 관련 인사의 입록 증가 현상이 나타났다. 그러나 노론계 인사의 향교 영향력이 증대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도남서원 인사들의 향교 참여 또한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현상은 안동이나 경주지역과는 대비되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상주향교 『교안』은 17세기 이후 상주향교의 인적구성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이를 통해 당시 청금유생의 입록현황을 파악할 수 있으며 서원자료와의 비교를 통해 상주의 향촌사회내 사족의 동향과 향교와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Ⅲ),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朝鮮時代嶺南書院資料集成』, 李樹健 外, 國史編纂委員會, 1999.
유기선,박소희

이미지

원문 텍스트

상주향교(尙州鄕校) 청금록(靑衿錄)
加錄
蔡允中
趙重呂
蔡允箕 改疇
趙世休
趙夏收
徐胤錫 未疫 文科
曺景汶
李敏遂 改錫祐
朴承后
姜文遇
柳后益
趙世雄
權重時 移居
金始慶
曺景沈
姜文載
金萬績
申龜齡
申斗齡
全近 改浩 故
趙自敬 未疫
趙自愼 未疫
洪道涵 進士
洪道達 進士 文科
李日成
李寅秀 改受 未疫 生員
趙彦衡
趙彦鎭
洪道任
權䌖
李應望 反武
趙東賢 反武
趙重濂(?)
鄭之釴 移居 龍宮
金壽泰 未疫
申百齡
삭제 ??
蔡允亨
高師錫
宋之馥 改光
金萬祐
金光烈
柳后卨
金善最
趙世達
姜文輔
趙世一

壬申八月初九日上齋李 手決
掌議 金 手決
李 手決
加錄
金汝兌
趙世榮 反武
姜碩宗
姜碩亮
李栻
高雲驥
金台輝
金玉輝
蔡三甲 未疫
呂以臨生員
黃沇
李寅賓
高雲五
黃鍾準 未疫
洪道寬
柳休
金永基
康經楷 改宇楷
趙勳

甲戌二月七日都有司宋 手決
成 手決
加錄
朴準世 生員 文科
李師蕃 生員
蔡相徵
金振兌
成德徵 巡士
韓始泰
金守憲
金是浹
金龍紀
尹善教
金以鼎 未疫
李墀 改基聖
趙世樞
金命采 未疫
趙世仁 未疫
柳萬齡
李好謙 移居咸昌進士
南圖萬 移居咸昌進士
趙彦準
趙彦輔 普改?
蔡夢徵
黃瑞河
金是淙 故 改涵
蔡允文 改欽
金錫來
趙愿
成起寅
洪道明 改?
柳千齡
鄭錫三
鄭?虎
黃受河
趙恁 未疫
鄭錫祚 未疫
李增曄 未疫 進士
金琛 改益昌
金始大
趙世義
河浣 微疾???
丘泰升
張世雄
柳時楨
高師說
高雲馹
權昱
趙世焃
洪處溟
趙慜
蔡一徵
李宏至
李增薫
鄭之粲(?)
宋之淵

丁丑八月十日上齋孫 手決
掌議洪 手決
韓 手決
加錄
仙 李玾 生員
蔡命龜
李增萊 改運
趙耘經
康萬楨
金萬紀 未疫
洪壽義 未疫
金景㳺
郭師聖
趙玧 改允綱 未疫
趙玹 改允紀
蔡允恭 移居咸昌
金鳳紀
金聖來 未疫
姜碩龜
趙彦轍 未疫
趙彦䓽
鄭泰承
黃鍾燮
高師聖
高師相 未疫
曺夏翊 未疫 改益 故

庚辰二月二日上齋李 手決
掌議李 手決
金 手決
加錄
康萬迪
姜碩來 改?
洪壽範
金格 未疫
金來兌
李時華 改雨 生員
洪壽九 未疫
康胤楷
趙畬經
徐慶海
康萬甲
姜碩遇
姜碩弼
康俊楷
趙自脩
洪壽海
金彬
金垍
高漢望
權渭 改潚
趙得胤 ??
高師訓 未疫
徐圭錫 未疫 故
趙彦曙 改肅 未疫
李南至 改允至 未疫
李堉 改??
金象仁
洪道與 未疫
邊大遂 未疫
權澣
金是澈 未疫
趙世獜 反武
黃泌 未疫
康萬勲
黃灝 未疫
康萬遂
趙景澹 改?
高雲九 移居龍宮
成摯徵
洪壽元
洪壽亨
蔡允範
金命來 未疫
洪慶沇
金正道
金應龜 故 未疫
李應天
李增秀
李增彬
李麟至 生員
宋孝甲 改???
權愼樞 改?一 文科
李誠至 未疫
金极
李增春
呂以觀 未疫V
盧聖龜 未疫
趙永錫 改命?
黃浚 生員 文科

辛巳二月九日上齋洪 手決
掌議趙 手決
蔡 手決
加錄
洪壽錫 未疫
洪道淇 反武
洪道泳
李增馣
姜暹 改?
金橉紀
姜錫興
姜錫輔 改佐
李錫祿 未疫
蔡允?
宋文甲 未疫
金在範 移居善山
郭師賢 未疫
鄭泰時
趙偲 未疫
高漢經
高師健
高師文 未疫
李增祿 文科
洪道三
洪聖衍 改名聖益
李寅協
李增沃
柳時樞
高命傳
金相龍
成允徵
康萬煦
孫雲燁(?)
盧思義
成爾溟
河應漢
高師道
高雲瑞 未疫
金道錫 未疫

癸未八月三一上齋洪 手決
掌議韓 手決
高 手決
金在一 未疫 改鎰 生員
李斗煥
洪壽聖 反武
全澍
洪聖緖
金泰紀 未疫
趙允瑞 改重 未疫
康敏楷 ??
洪道萬 未疫 故
康萬亨 改元
金守義
金㙫 文科
金有鉉
高師周 未疫
郭師文 ??
金德鉉
李仁源
姜橈 未疫 故
蔡獜徵
趙應奎
金景洛 未疫
丁道大 ???欽
金昌甲
金景洵
金命興 未疫 移居善山
尹光道 未疫
金命天 未疫
鄭之鍾
金益紀
金景兌 未疫 故
河大成
柳浚謙 未疫
黃瀗
趙守經
趙彦脩 未疫

甲申二月七日上齋金 手決
加錄
金相萬
黃淳
黃泰河
權集 未疫
高命賢
金命海 改昌運
姜碩範
黃一河
高師愼
李思馨
李益華
李益芳
金淂基
金德基 ??
趙國賓 改? 如?
安忱
李宗圭 改元著
全五彩
鄭之鋼
李龜齡
全梃三
黃混 未疫
柳時喆 改哲 故
黃澣 未疫
趙世舟
丘泰來
曺夏宗
申思運
蔡允協
金萬祐
柳緯河 未疫
李仁浩
李仁潤
李齊顔
蔡允諶 移居醴泉
申再應 未疫
宋道隆 改邦泰

丙戌二月八日上齋李 手決
掌議李 手決
王 手決
加錄
趙? 未疫 故
洪道謙
洪道準 移居??
洪聖績
洪聖潤 未疫?????
成淑 未疫 進士
李時迪
黃㶅
黃滿 進士
宋光馥
黃鎭國
金以復 進士 承茅
金胤輝
金鎰輝
黃溟 未疫
趙世采
孫雲傑
成煥寅
成燦寅
蔡允燾
康以玄 未疫
黃鎭石
成汣
黃鎭玉
金瀾
金昌孫 改洙
趙允泰
金雲紀
金寅紀 未疫
金景淵
金麗兌 未疫 反武
姜{扌+賢} 進士
姜碩耆
金景涵 未疫
郭師憲
孫雲爀
康萬達
李寅垕 未疫
金學曾
申濬 進士
金象天

丁亥八月七日上齋洪 手決
掌議鄭 手決
蔡 手決
加錄
曺景晦 未疫 改光稷
洪聖揆 未疫
金應運
金春紀
全潝
康萬選 未疫 故
金履兌 未疫
趙彦慱 未疫
金昌景
申玉鉉
趙認
金道標
柳浚謙 未疫 疊書
王夢良
成爾漢 進士
康萬通
趙允祐
申啓宗
申鎭華
金元標 未疫
柳祥晉
盧夏鎭
金必鋧
趙允光
李寅建
金䖏琮
高師禹 未疫
蔡允命
洪道成 改迪

戊子八月三日上齋洪 手決
掌議趙 手決
柳 手決
加錄
李增億
呂用賓 未疫 改?周
韓大壽
金得胄
金相一
金相勛 未疫
鄭泰基
金國采
高師述
趙世厦
金南標 未疫
金相殷
趙世璭 移居善山
李鵬齡
金準海
韓國泰
金是溫 未疫
李齊閔
李時聖
金鼎紀
河瑞龍 未疫 生員
趙允哲 未疫 故
金相益 未疫
金相白 未疫
黃{氵+奭}
高台瑞 未疫 故

己丑二月六日上齋高 手決
掌議金 手決
安 手決
加錄
孫雲弼
鄭胄源 未疫 參奉
金萬玉
金聖興
黃沈 生員 文科
黃濂
金昌運
?...? 反武V 宋邦翰 未疫
黃爾檝 改斗玄
康萬準 未疫 改烈 入格
鄭達源 未疫
李增垓
金重紀
郭師儀
金憲紀 未疫
洪壽五 改相朝 進士 文科 戊申別試

庚寅二月二日上齋洪 手決
掌議宋 手決
蔡 手決
加錄
柳後潤 未疫 仙
金景濬
李楨遠
李行遠
金始聲 改成
金以鉀
金振鐸 未疫
金振玉
趙全經 改演
黃潛
申鎭允
李國春
申鎭遠
河大臨 未疫
河大進
金弘紀 未疫
李斗光
申光周 未疫
李錫奎
李錫命
黃壽聃 未疫
黃壽望
李廷賓
李廷沃 改?
韓德淵
洪壽甲 入格 改??
洪聖錫
金命新
金處敬
兪彦經
申光夏
申鎭嶠 移居??
李鳳至
金邦采
趙尙經
趙敍經
金邦標
金以恒
金弘器 改致文
金弘鼎 改??
金世萬
洪聖澤 未疫
崔嵩 ?
金以謙
崔夏鍾
崔嶔
柳祥復 改???
趙時經
趙重台 生員
金玉鉉
河大觀
丘泰臨
成爾浩 未疫
成爾湜
趙允秀
成爾洙
河大升 未疫
河大一
成昌徵
成徯徵
成爾潝

辛卯二月六日上齋洪 手決
掌議趙 手決
蔡 手決
加錄
李坦 移居善山
金衆百
徐玄錫 移居聞慶
黃壽漢
李胄遠 入格
河大容
高師舜
金相玉
柳後晠 未疫 故
高師哲
金在重
李尙遠
趙天經 未疫 進士
趙璜
金相旲
呂光周
趙演經 疊入
金夢興
李應東 改師中
金慶興
河大明 改名大淵 文科
金應文
李應棹 生員
柳時柱
高師德
黃澯
王夢弼
趙文經 改順 入格
金守千 改千守爲範
孫命錫
黃鍾建 未疫
孫命三
李增祐
金再濂 改名夢河
曺景沆 改遠泰
金學閔
李齊聖
金相獜
金弘國 改致垕
申彦休 移居
李寅夏
趙欽經
金弘胄
金昌鏵 改?
金恒兌
趙世雲 反武
柳絢
康胤初
金在三
黃益胄
李增穆 入格
金相文
趙允明
黃道河
康萬照 移居善山
趙命漢
成爾涉 改?一
金象秋
金之鎰
金相采
黃壽峻 未疫
黃浹
權相五
韓德容
韓德壽
孫雲發
李寅澓
金昌鈗
申思運
河自岷 改自達
黃鍾亨 改彦
金始鳴 未疫
金䖏琦 未疫
金世鍵
金兌曄
朴敍五
朴行五 反武 未疫
李墩
甲午八月初八日上齋丁 手決
掌議鄭 手決
蔡 手決
加錄
柳祥翼 文科
金瑾
宋治明 改紀
도할
宋之浚
全濈 未疫 改夢源
金之鏡 改鎬
黃龍河 生員
趙守光 未疫
趙允章
蔡允佐
黃潚
李知聖 文科 己亥增廣
高雲驌
李增幹 進士
李增昌
李継遠
金東紀
李增芳
洪聖敍
洪聖緯
洪聖紀
趙世翼
黃瀷
成爾演 未疫
金汝興
도할
金守鼎
宋璠 改琬瑋
宋道興
成爾混
金之鉀
金德標
趙允祐
邊自原 改垣 未疫
黃㵓
金昌鍵
南道天
孫雲述
李聃齡
黃溍
黃洽 反武
金極標
李泰蕃
韓泰東
金斗采
韓必壽
韓箕錫
宋邦俊
金相華
申植
黃翼達 移居
宋道宗
韓德光 改愈
柳祥履
申以悌
趙命星
高師賢
金重洛
金宗洛
尹商衡
孫雲采
康萬宗
도할
金萬斗 未疫
宋道燮 未疫
宋之沆
柳後暻 未疫 改玭
金時采 移居
李芳圭 改性著
姜必孝 未疫
金萬重 未疫
金近聖 移居
丙申二月五日上齋洪 手決
掌議康 手決
趙 手決
加錄
全聖三
李增寅
呂載賓
高師近
鄭泰興 未疫
孫纘
金利國
康萬錫 移居善山
李和聖 未疫
金瑎
成龜徵
許琮
曺景稷 進士
康萬宜
成爾淳
金世采 未疫 入格
李嗣遠 移居善山
康萬福
金萬甲 未疫
李之莢 咸昌居 改夢協
孫景祚
黃斗天
李增馥 未疫
鄭緯相
金殷標
李增茂
高命承
郭師尙
高師栻
金喜遠
金萬胄 柱 未疫 移居黃澗
尹商賓
趙彦載 未疫
李龜至 入格
洪世泰
丁樂愼 入格
李增綏
柳時楷
李宗老 改廷著
趙命復
王夢說
李梃
蔡浻
高奎瑞
金亨國
李增潤
趙守抃
鄭泰明
姜榰
申啓文
金翼來 移居
宋道錫 未疫
韓德隣 反武

丙申八月初九日都有司 手決
掌議宋 手決
高 手決
加錄
黃鎭中
도할 未疫 生員 知情結業减死島配
黃翼再
黃涑 入格
黃渻
蔡游蓮 改允元
趙大經 入格
郭師宗
康錫祿
金守行
金淂紀
姜槿
洪聖疇
金以紀
李始遠
黃沁
李定遠
金瑞烱 入格
黃澹
河大益
申彦修
高師弼
金聖紀
韓泰相
趙允祉
柳時吉
丘命弘
全始孝 移居
高師逸
高箕瑞

戊戌八月一日都有司姜 手決
掌議鄭 手決
高 手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