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이 통문은 全州崔夫人의 孝烈을 褒賞하여 풍속을 장려하자는 내용이다. 그 내용을 보면, 최씨는 琳의 后人 崔基榮의 딸로서 退溪의 12대손 李中時의 아들 李有鎬의 妻이다. 일찍부터 덕성을 있었는데, 유호에게 시집을 가서 시부모를 봉양하고, 婦道를 지키며 맛난 음식을 대접하고, 저축하고, 겨울에는 밤이 깊어도 거듭 잠자리가 차가운지 따듯한지 시중을 들었으며, 눈물은 보이지 않았다. 이웃의 부름에 따라 길을 나섰던 有鎬가 불행하게도 오래된 병이 도져서 그곳의 藥房에서 소식을 전하길 靑松 주위의 房에 들었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병이 났다고 하였다. 이에 최씨는 후원에 壇을 쌓아 매일 밤 우물물을 떠놓고 하늘에 기도하였다. 그리고 매월 반드시 책을 찾아 읽어 병에 좋은 것을 찾았기를 수년이 흘렀다. 이에 근심은 쌓여 마음이 다 타들어가서 껍질만 남은 형편이었지만, 시부모 앞에서는 한 터럭의 근심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간혹 소식이 전해왔다. 고통이 심한 환자가 오히려 집에 한번 다녀가길 청하여 12월 9일에 生舅 中直이 그 마음을 가엽게 여겨 病者의 손을 잡고 이끌어 추운 눈길을 무릅쓰고 걸어서 밤에 도착하니 숨이 끊어지기 직전이었다. 부모형제들이 그의 손을 잡고 둘러앉아서, 최씨는 홀로 손을 모으고 아들 옆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그 용색을 가렸다. 그날이 곧 本家의 先祖의 忌日이었다. 최씨는 혼자 제사음식을 준비하고 개울가에서 목욕을 한 후 물을 길어 넣고 기도하였다. 前日의 屛處堂을 따라 오른쪽의 허벅지 살을 베고, 다시 왼쪽의 허벅지를 베려는 찰라 시누이가 열려있는 침실 문틈으로 방안에 피가 낭자한 것을 보고 놀라 소리를 질렀다. 시부모가 그 소리에 놀라오자, 최씨는 담담히 허벅지를 싸매고 시부모를 달래며 자신의 죄에 할 말이 없지만, 다만 그렇게 한 것은 남편을 사랑하여 치료를 이어서 하지 않으면 회복이 불가능하기에 환자의 옆에 머물며 작은 시험을 할 수 있도록 청하기 위해서였다고 하였다. 허락을 받고 최씨는 病者의 앞에 앉아 그릇을 병자에게 내밀면서 백약이 무효하니 이는 군자의 恨이 깊어서다. 하물며 生死의 榮辱은 사람이 따라야할 명이라고 하면서, 그를 아랫목에 이불을 깔고 눕게 하였다. 그가 땀을 배출한 후 얼마간이 지나 눈을 떠서는 먹을 것을 달라고 하여 粥飯을 가리지 않고 먹은 후 내가 죽은 사람이 아니지만 죽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칼로 살을 잘랐냐고 묻자. 처음에는 생선으로 그렇게 한 후 허벅지를 베려고 한 것인데, 마침 시누이가 발견하여 허벅지를 자르려는 순간 그치게 되었다고 하였다. 중요한 것은 병을 고치는 것이지 殺身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어느 부녀자가 이처럼 유연히 처신하고, 천고에 이와 같은 烈丈夫가 있겠는가며 감탄하고 있다. 나아가 殺身한 것은 아니지만 높이 살만하고, 맥을 이은 것을 생각하면 그녀의 견식이 멀고도 높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러한 이야기가 민멸되도록 두지 말고 모두 같은 뜻으로 돌려 교육하면 좋겠다고 하였다.
이 통문은 유교적인 三綱의 윤리가 일제강점기까지도 남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풍속교화를 위하여 충·효·열에 대해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포상하는 정책을 폈다. 조선후기 정려의 취득과정은 『大典通編』에 의하면, 孝行과 烈行이 旌閭와 復戶에 합치되는 자는 모든 道에서 뽑아서 보고하고, 式年(3년)의 연초 마다 禮曹의 세 堂上이 모여 상세히 살펴서, 의정부로 이송한 뒤에 별단으로 왕에게 보고토록 하고 있다. 이는 조선 초기의 『經國大典』에서 1년에 한번씩 薦擧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이들에 대한 혜택은 관직을 상으로 주거나, 물건을 상으로 주고, 더욱 뛰어난 자는 旌門을 내리고 復戶(세금면제)하였으며, 妻로서 절개를 지킨 경우 즉 烈女인 경우에는 復戶한다고 하였다. 나아가 정려·증직·給復 등과 관련된 모든 일은 승정원에서 承傳을 받들어 謄書하여 頒布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復戶의 특혜와 효자, 열녀가 국가로부터 공인 받기까지 지역사회의 광범위한 지지가 필수적으로 요구된다는 점이다. 復戶의 특혜는 양반들이 軍役으로부터 자유로운 계층으로서 그 사회적 지위가 한층 우월해 짐을 나타낸다. 지역사회의 광범위한 지지도 역시 사회적 지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명확한 행적이 들어나는 忠臣과는 달리 효자와 열녀의 행적은 국가에서 파악하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속성으로 인해 효자나 열녀의 행적은 다른 사람들의 公議에 의해 인정되고 그들의 추천에 의해 국가에서 파악할 수 있었다. 결국, 효자나 열녀의 추천은 지역 士林의 公論에 의한 추천을 해당 고을의 수령이 받아서 이를 각 도의 관찰사가 수합하여 예조에 올렸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돌이켜보면 孝烈의 실적에 대한 지역 사회의 公議가 없다면, 효자나 열녀의 表彰이나 旌閭을 취득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하였으며, 결국 孝烈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들을 배출한 집안이 지역사회에서 일정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거나, 여타 사족들과 폭넓은 교유관계를 형성하고 있어야만 가능하였던 것이다. 즉 이들에게 門閭를 내려주고 또 復戶 등으로 무거운 戶役을 면제해 주고, 그 자손에게 부역을 감해주기도 하였던 것이다. 또한 향촌사회에서 이러한 효자, 열녀 등을 찾아 널리 알리고 중앙에 보고하여 旌表하도록 하게 하는 일은 대개 향교나 서원에서 하였다. 두 기관에서 사림의 公議를 모으거나 확인한 후 그러한 내용을 수령에게 넘기면, 수령이 이를 감사에게 천거하였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貞烈人에 대한 국가적 襃賞이나 추천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서원, 향교를 중심으로 한 유림 사회에서는 三綱의 윤리의식이 만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全州崔氏는 退溪의 후손의 妻라는 점에서 그를 배향하는 陶山書院에서 통문을 내었던 것이다. 또한 이들은 최씨의 逸話를 두루 알려서 교화의 방책으로 삼기를 바라고 있었는데, 전통적인 여인상을 재확립하려는 의도는 당시 여성들의 의식변화와 연관이 있다. 그것은 식민지 초기 일제의 문화통치정책에 의해 진행된 전통에 대한 부정과 신식교육을 받은 여성들의 自我 형성에 말미암은 것이다.
1880년대부터 시작된 근대 여성교육은 가정 안에만 갇혀 지내던 여성들을 밖을 불러내고 더불어 여성의 ‘自我’를 일깨우는 역할을 하였다. 초기의 여성교육운동은 국민들의 호응을 얻지 못한 채 일부 개화된 양반 관료층의 부녀들이나 기생, 천민층의 孤兒·棄兒들을 대상으로 하여 극히 제한적으로 운영되었다. 여성교육 또한 裁縫, 유교경전 등 소위 여성의 전통적 기본교양교육과 家事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점차 여성교육에 대한 일반의 인식이 호전되면서, 광범위한 계층의 여성들이 新敎育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1908년 대한제국은 한성여학교를 설립하고, ‘高等女學校令’을 공포하여 여성교육을 위한 법적·제도적 기반을 마련하고, 여성교육을 공식화하였다. 이러한 신교육의 경험은 단순히 새로운 지식습득의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남녀의 평등을 강조하는 서구의 사상과 본격적으로 접함으로써 새로운 여성의 사회적 지위 및 구실에 눈을 뜨게 하였다.
일제에 강점된 1910년부터 국내에서 상급학교에 갈 수 없었던 여성들은 유학을 떠나기 시작하였고 대부분은 일본으로 향했다. 이들은 일본에서 경험한 근대문화와 신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여성의식과 행동양식을 드러내면서 ‘新女性’의 특징이 되었다. 유학을 통해 고등교육을 받은 최고 엘리트인 이들 ‘新女性’은 존재자체가 한국 사회의 新文化 현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新文化를 이끌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기회는 극소수의 여성에게만 열려 있었다. 이는 유학비용의 부담과 좋은 혼처를 찾기 위해 딸을 교육시키는 상황에서 혼기가 찬 여성을 유학 보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사회적 인식은 여학교를 다니면 행실이 나빠지고, 건방지게 되고, 집안살림살이는 모른 체한다고 보았기에 딸을 여학교에 보내는 것도 주저하게 만드는 형편이었다.
한편으로는 여성의 교육을 통해 여성들의 역할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1910년대 중반이후 한국 사회에는 ‘근대화’문제가 화두로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시대사조의 생산자는 남성지식층이었는데, 이들은 한국 사회의 근대화 문제가 민족의 생존과 직결된다고 보았다. 이들은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남성지식인들은 한국여성이 ‘민족의 어머니’, ‘민족의 아내’로서 남성을 보조하는 역할에 머물기를 기대했으며, 여성교육이 그 역할창출을 담당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근대교육을 경험한 ‘신여성’들이 민족의 어머니, 아내가 아닌 개인과 自我를 말한다는 사실에 당황하며, ‘참된 신여성’의 담론을 거듭하며 그녀들을 ‘죄인’으로 몰아붙였다. 즉, 남성지식인들은 여성의 역할로서 ‘賢母良妻’론을 들고 나온 것이다. 이들은 여성이 가정에서 민족발전에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자식들을 키워서 그들이 근대화를 이끌어나가게 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현모양처 자화상은 일제의 의해 조장된 측면도 강화다. 일제는 조선 내에서의 고등교육을 제한하고 일부 고등교육기관의 교육수준은 일본에 비하여 현저히 낮게 추진하였다. 이는 신교육을 받은 지식층들이 조선사회의 중간계층을 형성하여 보다 수월히 조선을 지배하는데 이용할 목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여성들에게 가사와 재봉, 수예를 중심으로 여성의 지식교육을 억제하고 여성의 전통적인 역할을 교과목화한 기예교육을 중시하였다. 이는 기능자로서의 여성을 양성하는 것과 여성의 역할을 가정 내로 한정하고 이들에 의해 성장한 자녀들이 부모를 통해 온순한 식민지인으로 성장토록 하려는 목적이었다. 즉, 사회의 가장 기본단위인 가정에서부터의 의식 변화를 계획하였던 것이다.
이상에서 舊韓末부터 1910년대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이 신여성층의 형성기였다. 1920년대는 일제의 문화통치정책에 의해서 조장된 관념상의 자유주의적인 분위기가 사회를 풍미하던 시기였다. 일제는 조선의 전통에 대한 부정의식을 부식시키고 한편으로는 일본의 근대화 내지 선진성을 부각시켜 민족의 자긍심을 말살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 결과 전통에 대한 부정의식이 사회일반에 팽배해 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 시기는 신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하여 사회의 이목을 모으던 시기기도 했다. 향촌사회는 이러한 사회적·문화적 변화로 큰 혼란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이에 양반계층들은 열녀와 효자를 전면에 내세워 유교윤리를 강조함으로써 가족윤리의 확립과 안정을 꾀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는 1910년대 후반부터 20년대까지 전국적으로 當代 혹은 이전 시기의 효자, 열녀에 대한 襃獎 사업이 서원, 향교를 통해 꾸준히 발생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조선시대 유교윤리를 강조함으로써 철저한 가부장적 가족윤리의 확립과 나아가서 정치질서와 사회 안정을 꾀하기 위한 조처로 시행된 旌表政策이, 일제강점기에도 그 유제가 남아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