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향교 통고문
본 자료는 1909년 영양 영양향교에서 고자(庫子=고지기)에게 보낸 통고문으로 빚 錢 74兩 5戔 1分을 아직 알리지 않은 고로 섬촌원의 밭 8두락지를 잠시 팔려하나 향중의 뜻을 살펴보니 하나 같지 않음으로 전에 향교에서 매입한 토지에 대한 문서를 환수하여 보낼 것이며, 밭을 팔았던 집의 문기를 찾아 가져오라 하고 있다.
위의 문서를 보면 당시 영양 영양향교가 상당량의 빚을 지고 있으며 이의 해결을 위해 토지를 매매하고자 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위의 자료만으로 당시 토지를 팔고자 하는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문서가 작성된 1909년 당시는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이 신학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시기로 성균관을 비롯한 향교에 대한 지원은 거의 단절되어 가고 있었다. 이미 1907년 향교의 업무를 전담하는 부서가 없어졌고 1908년에는 학무국내 하위부서에 향교업무를 다른 부대업무로 처리하였다. 이로 인해 아무런 지원없이 성균관 및 향교는 무관심과 방치속에 그 기능을 점차 잃어가게 되었다.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마찬가지로 점차 열악한 상황에 처해졌으며 이러한 상황 하에 영양 영양향교는 향교가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던 교전의 방매를 통해 이를 해결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향교의 사회적, 경제적 지위 저하는 이 시기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이 문서는 위와 같은 당시 영양 영양향교의 열악한 상황을 유추할 수 있게 해준다.
『慶北鄕校資料集成』(1),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박소희,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