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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영양(英陽) 재중(齋中) 회문(回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4+KSM-XF.1894.4776-20120630.Y1211309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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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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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영양 영양향교
작성지역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향교길 22-16
작성시기 1894
형태사항 크기: 31 X 52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양 영양향교 /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향교길 22-16 문중소개
현소장처: 영양 영양향교 /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향교길 22-16

안내정보

1894년 영양의 齋中에서 鄕校 및 각 문중별 扶助를 요청하며 작성한 回文
본 자료는 1894영양의 재중에서 작성된 회문(回文)으로 영양 영양향교를 비롯한 영양의 유력가문에 부조를 요청한 것이다. 회문에는 영산서원(英山書院)의 훼철을 아쉬워하며 선현에 대한 제향을 다시 하려 한다는 목적을 밝히고 영양 영양향교영양의 유력 가문에 부조 요청하고 있다. 영산서원영산서당(英山書堂)이 그 전신으로 1638년에 건립되었으며 이후 영양의 사족들의 노력으로 서원으로 승격된 곳이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서월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서원은 사족의 활동근거지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곳이었다. 따라서 서원의 철폐는 사족들에게 큰 위협이었으며 이에 사족들은 서원이 아닌 재실(齋室)과 같은 제향공간의 건립을 통해 서원의 기능을 대체하고 그들의 새로운 근거지로 삼고자 하였다. 영산서원의 훼철 후 영양에서도 또다른 제향공간을 마련하려한 것으로 보인다.
부조를 요청한 문중을 보면 영양 영양향교를 비롯하여 조씨, 오씨, 권씨, 정씨 등 영산서원의 건립과 운영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가문들이다. 그리고 이 가문은 영양 영양향교의 운영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한 가문들이었다. 이는 당시 영양의 사족들이 향교와 서원을 장악하고 일향의 향론을 주도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본 자료는 조선후기 영양의 향론을 주도하였던 사족의 모습과 서원철폐령 후 사족의 대응은 어떠하였는지를 알려주는 자료이다.
『慶北鄕校資料集成』(1),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18世紀 書堂硏究』, 丁淳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박소희,유기선

상세정보

1894영양의 齋中에서 英陽鄕校 및 각 문중별 扶助를 요청하며 작성한 回文
[내용 및 특징]
본 자료는 1894英陽의 齋中에서 작성된 回文으로 영양 영양향교를 비롯한 영양의 각 문중에게 발송된 문서이다. 회문의 내용은 英山書院의 훼철 후 이를 안타까워하며 선현의 위패를 향사할 수 있는 공간을 다시 만들 것을 결의하고 이를 위해 영양 영양향교와 각 문중의 부조액을 기재하여 회문하고 있다. 그리고 부조의 활용방법 또한 제시하고 있는데 향교 및 각 문중이 갹출한 금액을 식리하여 이윤을 얻고, 경작지에서 나오는 수세를 식리에 보태도록 하고 있다. 이에 대한 관리는 재중에서 선출한 도감이 맡을 것을 규정하고 있다.
영산서원이황김성일을 향사하는 영양의 대표적인 서원이었다. 그러나 興宣大院君의 書院撤廢令으로 훼철 당하게 되자 영양의 사족들은 이를 안타까워 하며 선현의 향사를 위한 공간(재실 또는 재사)을 다시 재건하고자 하였다. 이에 향교와 영양의 유력문중에 회문하여 부조를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부조를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식리를 통해 이윤을 얻고자 하였다. 이러한 식리를 통한 이윤획득은 당시 흔한 활동이었다. 그리고 경작지에서 수취하는 세금을 식리에 보태어 활용함으로써 더 큰 이윤을 획득하고자 하였다. 경작지의 경우 어떠한 경작지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영산서원의 훼철시 영산서원이 보유하고 있던 토지라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서원의 훼철시 서원이 보유하고 있던 토지나 노비는 관에서 회수하거나 수령의 재량으로 향교에 지급되는 경우가 많았다. 위의 문서에 나오는 경작지도 영산서원이 보유하고 있던 토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토지를 경작하는 자에 대한 자격도 규정되어 있는데 野人이 임의로 경작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여기서의 야인은 ‘宮墻內外’로도 표현되고 있는데 향교의 액내외 교생, 즉 향교에 적을 두지 않는 자의 경작을 금지하는 것이라 추측된다.
위의 내용에 이어 회문의 수신처, 즉 부조를 요청하는 곳과 부조금액을 기재하고 있다. 향교를 비롯하여 霖山書堂, 月麓書堂을 비롯하여 지역별 문중을 기록하고 있다. 문중의 경우 趙씨문중 4개소, 吳씨문중 3개소, 權씨문중 2개소, 鄭씨문중 1개소, 朴씨문중 1개소, 南씨문중 2개소, 金씨문중 1개소, 具씨문중 1개소, 李씨문중 2개소, 尹씨문중 2개소, 琴씨문중 4개소, 黃씨문중 1개소, 沈씨문중 1개소이며, 총 28개소의 부조참여를 요청하고 있다. 요청액은 각 기관 및 문중마다 차별적으로 부과하였으며 총금액은 40兩 5戔이다.
부조를 요청받은 문중(霖山書堂, 月麓書堂은 모두 영양의 漢陽趙氏의 집성촌인 주실마을에 위치한다. 따라서 이 기관은 조씨 문중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 기관이라 할 수 있다.)인 趙, 吳, 權, 鄭, 南, 朴, 金, 具, 李씨는 당시 영양의 향촌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사족이었으며 회문에 언급된 영산서원의 건립에 있어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한 가문들이었다. 또한 이상의 가문들은 영산서원을 대체할 새로운 제향공간의 건립에 있어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한 가문들이다. 영산서원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면, 영산서원의 前身은 英山書堂으로 宣祖 11년(1578) 進士金璡(1500~1580)에 의해 처음 발의되었고 서당의 건립의 재정 확보와 운영은 영양지역 사족의 공동보조에 의해 이루어졌다. 건립시 참여한 문중은 英陽南氏를 중심으로 義城金, 英陽南, 咸陽吳, 漢陽趙, 安東權, 英陽金, 樂安吳, 野城鄭, 潘南朴, 載寧李, 綾城具씨가 참여하였으며 이는 회문에 나타난 문중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영산서당의 서립 건립후 孝宗년간 李時明寧海府 石保村에서 영양 首比山中에 은거하여 書堂長을 역임하고, 영산서원으로 개창하였다. 肅宗 9년영양의 復縣이 이루어지고 이에 따라 타군현과의 위상 정립과정에서 서원의 사액이 필요함에 따라 영양의 의성김씨 문중과 한양조씨를 비롯한 영양거주 사족의 노력으로 사액된다. 서원사액시 참여한 영양의 사족은 한양조씨, 영양남씨, 안동권씨, 함양오씨, 봉화금씨, 재령이씨, 단양우씨, 月城孫씨, 야성정씨, 熊川朱씨, 寧海辛씨 등이다. 영산서당의 창건과 사액, 그리고 현 문서에 부조참여를 요구하는 문중을 보면 몇 몇 가문의 새로운 추입과 탈락이 보이지만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이는 16세기에게 19세기 말까지 영양지역 향촌지배세력의 변화가 그리 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으며 영산서원의 훼철이라는 위기 속에 새로운 제향공간의 마련을 통해 사족간의 단결을 결의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위의 문중은 영산서원의 운영을 비롯하여 향교의 운영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는 현재 영양 영양향교에 남아있는 執綱案, 奉安時執事分定記 및 校案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영산서원의 운영 및 회문에 부조한 성씨들은 향교의 기록에서도 대부분 확인할 수 있는 성씨이다. 이러한 연유로 향교 또한 부조에 참여하고 있으며 영산서원 및 향교의 운영에 참여하였던 영양의 사족들은 그들의 활동근거지였던 영산서원의 훼철을 안타깝게 여기고 종래 선현의 제향을 위한 방법을 도모하였다.
[자료적 가치]
본 자료는 19세기 말기 영양의 재중에 의해 작성된 회문으로 영산서원 훼철 후 선현의 제향을 위한 방안을 도모하며 각 문중의 부조를 협조한 것이다. 이 문서는 흥선대원군의 서원훼철 후 서원에 관계하였던 영양사족들의 대응과 더불어 당시 영양의 향론을 주도하던 문중에 대해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다.
英山書院1638년에 세운 英山書堂1655년 石溪 李時明(1590∼1674)이 堂長으로 있을 때 서당을 서원으로 승격시킬 것을 주창하여,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승격 당시 영산서당을 일부 수리하고 후면에 묘우만 새로 세우고 서당은 종전의 것을 사용하게 되었다. 승격 당시 영산서당에 보관된 서적 재산까지 서원으로 인계하였으며 숙종 20년에 賜額되었다. 영양현이 복현된 1683년까지 영양에는 향교가 없었기에 영양 향내 선비들의 修學處로는 영산서원 뿐이었으나 숙종 9년에 복현이 되고 영산하에 관아를 영건하고 객사를 신축할 때 서원의 위치가 그 중간에 있어 관사가 가깝고 지세가 본래 협소하여 한적하지 못하고 건물이 퇴락하므로 부득이 현리로 이건 하게 되었다. 이건 과정은 관련자료의 부족으로 詳考할 수 없으나 복현한 1683년에 서원으로 승격한지 28년째라는 기록으로 보아 이 때를 전후하여 이건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영산서원은 主享으로 退溪 李滉의 위패를 모시고 從享으로는 鶴峯 金誠一을 제향하였다. 1871흥선대원군의 서원철거령이 공포되어 철거된후 복설하지 못하고 현재는 옛터만이 남아있다.
霖山書堂영양군 청기면 정족리에 있던 서당으로 滄州精舍가 그 前身이다. 창주정사1796朱子武夷精舍를 모방하여 건립되었다. 1806년 玉川 趙德鄰의 위패를 모셔 제향하려 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무산되자 1890년 八架 강당을 지어 공부하는 곳으로 삼았다.
月麓書堂영양군 일월면 주곡리에 있는 서당이다. 1764년 건립이 결정되고 9년 후인 1773년에 완성되었다. 당시 서당의 설립은 官의 지원없이 당시 영양의 유력문중들에 의해 이루어졌고, 서당이 운영 또한 漢陽趙氏 一門의 자치권 하에 이루어졌다. 설립 당시 모두 8칸으로 강당 4칸, 좌우 각 2칸의 東齋와 西齋로 이루어져 있다.
月潭軒영양군 영양읍 하원리에 위치하고 있는 한양조씨의 종택이다. 월담헌1602趙任이 지은 것이다. 조임(1573~1644)은 조검의 동생으로 임란시 형과 함께 곽재우의 휘하에서 적과 싸웠다. 1597년 의병의 해산 시 곽재우가 그에게 沙月이라는 號를 지어 주었다. 1627년 丁卯胡亂이 일어나자 觀察使를 방문하여 사재를 털어 軍糧米를 지원하였으며, 후에 이 일로 知中樞府事에 임명되고 三代가 追贈되었다. 국가적 난이 있던 와중에도 英山書堂에서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에 힘썼으며, 和議를 극력하게 배척하는 斥和疏를 짓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사월문집』 2권 1책이 있다. 水月軒영양군 일월면 도계리에 있는 정자로 水月 趙儉선생의 후손들이 선생의 효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것이다. 한양조씨인 조검은 임란시 郭再祐의 휘하에 종군하였고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수월헌은 세 칸 겹집으로 좌우에 서실이 있다. 본 자료에 나타난 수월헌 조씨문중은 영양에 거주하던 조검의 문중을 이르는 것이다.
三秀堂조선효종 때 한양조씨인 영양進士趙頍가 세운 제택과 묘우를 가리키는 것으로 삼수당조규의 號이기도 하다. 본 자료에 나타난 삼수당 조씨문중은 영양에 거주하던 조규의 문중을 이르는 것이다. 삼수당은 현재 소유주가 바뀌면서 鶴樵亭으로 바꾸어 부르고 있다.
『慶北鄕校資料集成』(1),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編, 경상북도, 1991.
『朝鮮後期 鄕校硏究』, 尹熙勉, 일조각, 1989.
『18世紀 書堂硏究』, 丁淳佑,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5
박소희,유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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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영양(英陽) 재중(齋中) 회문(回文)
廻文
右文爲輪告事伏以一自英山掇
享之後過其墟不無春風燕麥之感今
於 釋尊齊罷之日舊日從事之家
相與齋咨謀所以寓慕羹墻之意自各
門出若干鋼以爲便殖成所之方且其宮
墻內外不可委之於野人之任意耕作自
齋中薦出尋檢都監以爲逐春秋收
貰隨助便殖之道幸願各自惕念俾有
成緖之地千萬望甚
甲午二月十日齋中
鄕校 五兩
霖山書堂 二兩
月麓書堂 一兩
水月軒趙氏門中 二兩五戔
月潭軒趙氏門中 二兩五戔
三秀堂趙氏門中 二兩五戔
注谷趙氏門中 二兩五戔
靑杞吳氏門中 二兩五戔
大川吳氏門中 二兩五戔
道谷吳氏門中 一兩
?浦權氏門中 一兩
釜谷鄭氏門中 二兩五戔
首比朴氏門中 一兩
剡村南氏門中 一兩
?洞南氏門中 五戔
新村權氏門中 二兩五戔
靑杞金氏門中 五戔
釜谷具氏門中 五戔
道谷李氏門中 一兩
沂里李氏門中 五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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首比尹氏門中 一兩
剡村琴氏門中 五戔
桂洞黃氏門中 一兩 不入
道谷琴氏道谷宅 一兩 浮浦來
曲江琴氏門中 一兩
浦頭沈氏門中 五戔
道溪琴氏美洞宅 五戔 五川來
剡溪尹氏縣洞宅 五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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