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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하양향교(河陽鄕校)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4+KSM-XF.1867.4729-20120630.Y1210805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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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하양향교
작성시기 1867
형태사항 크기: 45 X 70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산 하양향교 /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교리 하양향교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산 하양향교 /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 교리 하양향교

안내정보

1867년 하양향교(河陽鄕校) 통문(通文)
1867년 7월, 만동묘풍천재(萬東廟風泉齋)의 유회소(儒會所)에서 하양향교(河陽鄕校)에 보낸 통문(通文)이다. 이 통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양오당(養吾堂)송공(宋公)의 집안은 임진왜란 당시에 충절을 다한 집안으로 유명하였다. 그 집안의 종손 되는 이가 자신이 거주하는 하양청천리(河陽靑川里)에 송공을 위한 사당을 짓고 제사를 올리고자 하였다. 그런데 원계(遠溪)에 사는 송공의 지손(支孫)이 종손의 계획을 반대하여 모임을 열고 자신들이 사는 원계(遠溪)에 사당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유림의 시각으로 보면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질서를 문란하게 만드는 강상(綱常)파괴의 행위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강상파괴의 행위를 인식하지 못하고 도리어 일부 유림이 이에 동조하는 듯한 모양새를 보였으므로 이러한 그릇된 행위를 비판하는 한편, 유림에 죄를 짓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강력한 경고의 내용을 통문으로 하여 전한다고 하였다. 이 통문은 만동묘풍천재(萬東廟風泉齋)의 유회소(儒會所)에서 발송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말미의 서명을 보면, 도유사 박남현과 장의 이원석이규세 이하 4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民族文化硏究所, 경상북도, 1991
남민수

상세정보

1867년 7월, 萬東廟風泉齋에서 河陽鄕校에 보낸 通文.
내용 및 특징
1867년 7월, 萬東廟風泉齋의 儒會所에서 河陽鄕校에 보낸 通文이다. 본 통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養吾堂宋公의 一門은 임진왜란시 忠節을 지킨 집안으로 유명하였다. 이에 그 宗孫되는 이가 자신이 거주하던 河陽靑川里에 몇 간의 堂宇를 짓고 祭享을 올리고자 하였다. 그런데 遠溪에 사는 支孫되는 이가 자신들의 숫자가 많다고 여겨 社宇를 河陽靑川里에 짓겠다는 宗孫의 뜻을 무시하고, 社宇를 반드시 遠溪에 지어야 하며 그 소임도 자신들 支孫이 맡겠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綱常문란의 행위에 대해 지역의 士林이 응당 이를 막아야 하겠지만 도리어 일부 士林은 이에 동조하여 지손들이 주장하는 일의 소임을 맡겠다고도 하였다. 이에 萬東廟風泉齋의 儒會所에서는 儒會를 열어 그 그릇된 점을 지적하고, 또한 支孫들의 잘못된 행위에 지역 儒林이 동조하는 것은 儒林의 오점이 될 수 있으므로 각 향교와 서원에서는 이에 동조하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이 문서의 말미에는 萬東廟風泉齋의 都有司 朴南鉉과 掌議 李源奭李圭世 및 儒會에 모였던 회원 4명의 서명이 첨부되어 있다.
자료적가치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봉건질서의 영향이 강하여 長子가 우대받는 반면, 次子나 서자는 상대적으로 천대받을 수밖에 없는 신분적 위계질서가 존재하였다. 어떻게 보면 一門의 祠宇건립에 불과한 사소한 문제로 보이지만,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萬東廟風泉齋에서 儒會를 열고 支孫들의 행위에 대해 강력하게 聲討한 것은 이러한 문제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長幼有序라는 유교의 綱常질서가 깨질 수 있는, 斯文의 위험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조선시대후기에는 신분제질서가 많이 동요하던 시기였지만 儒林을 중심으로 하는 향촌사회에는 여전히 견고한 신분질서의식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出版部, 1992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경상북도, 1991
남민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67년 하양향교(河陽鄕校) 통문(通文)
通文
往在壬辰之亂養吾堂宋公一門三節千古罕儔其後孫刱數間屋於宗孫所居靑川
養吾堂額於中堂以寓春雨之思而其立祠崇奉者則將以待異日公論矣不意其所
謂支孫之居遠溪者以其家戶多數蔑視宗派之殘劣盛設酒饌會宗族士友請
立祠于遠溪而不從者驅逐之更爲開會分任云則非直其支孫之妄擧可罪
所謂一邊儒林亦不能直言公決反爲之助而分任其事亦豈非一邊之羞恥耶
今其後孫以此質于其本校則已發立祠之通又有宗通及大東斯文會之通以
其宗孫所居河陽靑川斷案立言其在各校各院獨何異議於其間哉望須
僉公辦得公心直理極加精論以正名分以重世道而無以一時私意取笑於各校各
院之之千萬至要
崇禎紀元後五丁卯七月七日
萬東廟風泉齋儒會所
右▣通于
河陽鄕校僉座下
都有司朴南鉉
掌議李源奭
李奎世
會員鄭雲弘
朴東植
宋祖憲
金文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