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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년 군위향교(軍威鄕校)·남계서원(남계서원)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4+KSM-XF.1839.4713-20120630.Y125010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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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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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이정우, 군위향교 / 남계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 동서2길 17-28 /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 대북길9
작성시기 1839
형태사항 크기: 97.2 X 51.5
판본: 고문서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군위향교와 남계서원에서 향학사 수리를 위한 자금을 옥산서원에 요청하는 통문
이 통문은 군위향교 도유사 홍택겸, 남계서원 원장 홍우영 외 22명이 학사 수리비용이 많이 들어가니 옥산서원에서 5민문을 보태주길 청하는 내용이다. 본문에서는 ‘향학사’라 나오고 있어 향교인지 남계서원의 학사인지, 아님 두 곳 모두의 학사인지 불분명하다. 하지만, 통문 앞면의 ‘군위향교통문’이라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향교에서 중심이 되어 통문을 작성하고 남계서원에서 동참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짐작컨대 학사는 향교의 것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통문에서는 옥산서원에 배전 5민문을 받기 위하여 이전의 화재로 옥산서원 건물이 전소되어 이를 중건하기 위한 원근 사림들의 협력이 컸음을 들고 있다. 또한 그러한 조력에 자신들도 비록 통문을 받지는 않았지만 미리 부조금을 준비해두었다가 보냈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아울러 옥산서원 건물 중건시에 공사의 전후로 들어간 돈이 많았었지만, 자신들의 학사를 수리하는 비용은 타읍과 비교하여 그 금액이 많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5민문의 아주 작은 금액이면 족하니 원컨대 납부해주면 고맙겠다고 하였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軍威의 鄕脈』, 군위군, 군위군, 1983.
이병훈,이수환

상세정보

1839軍威鄕校南溪書院에서 鄕學舍 수리를 위한 排錢을 옥산서원에 요청하는 통문
[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이 통문은 軍威鄕校 都有司 洪宅謙, 南溪書院 院長 洪宇寧 외 22명이 學舍 修理비용이 많이 들어가니 옥산서원에서 5緡文을 보태주길 청하는 내용이다. 본문에서는 ‘鄙鄕學舍’라 나오고 있어 군위향교인지 남계서원의 학사인지, 아님 두 곳 모두의 학사인지 불분명하다. 하지만, 통문 앞면의 ‘軍威鄕校通文’이라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향교에서 중심이 되어 통문을 작성하고 남계서원에서 동참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짐작컨대 學舍는 향교의 것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통문에서는 옥산서원에 排錢 5緡文을 받기 위하여 이전의 화재로 옥산서원 건물이 전소되어 이를 중건하기 위한 遠近 사림들의 협력이 컸음을 들고 있다. 또한 그러한 조력에 자신들도 비록 통문을 받지는 않았지만 미리 부조금을 준비해두었다가 보냈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아울러 옥산서원 건물 重建시에 공사의 전후로 들어간 돈이 많았었지만, 자신들의 學舍를 수리하는 비용은 타읍과 비교하여 그 금액이 많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5緡文의 아주 작은 금액이면 족하니 원컨대 納付해주면 고맙겠다고 하였다.
실제, 이 시기 옥산서원의 화재로 전소된 건물은 求仁堂이 있다. 『玉山書院攷往錄』(1816~1873)에 의하면 1839년 1월 28일에 강당인 求仁堂이 소실되었다. 그러나 바로 重修에 착수하여 화재 직후인 2월 1일에 鄕內校院에 통문을 내어 13일에 西岳書院에서 수백 인이 참석한 鄕會를 개최하였다. 강당 중건에는 총 16,000여 명이 동원되었으며, 소요된 막대한 비용은 후손들의 각출과 道內 永川·興海·義城·安東·靑松·東萊·玄風·昌寧·密陽·善山·軍威 등 35개 고을의 각 校院·祠와 門中 등의 기부로 충당되었다. 당시 수합된 총 금액은 2,616냥 2전이었다. 1839년 12월 13일에 致祭하고, 다음해인 1840년 3월 6일에 告由祭를 행하고, 7일에 揭額板하였다. 이때 御製致祭文板도 같이 걸었는데, 이날의 낙성식에는 監司를 비롯하여 慶州府尹·永川·靑松·淸道·義城·新寧·淸河·盈德·慈仁·河陽·興海·迎日·長鬐 등 경주인근 13개 지역의 지방관이 참가하였다. 이처럼 옥산서원 강당중건은 향내의 관심사일 뿐만 아니라 도내의 관심사로 부각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서원이 가문 중심적으로 변모한 이 시기에 이러한 거도적인 관심은 당시 영남에 있어서 옥산서원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통문에서 옥산서원의 화재가 빈번한 것이 斯文의 불행이라고 한 것과 遠近의 章甫들이 마땅히 重建의 일에 힘을 합쳤다는 것도 이러한 옥산서원의 위상을 재확인시켜준다.
군위향교의 통문이 작성되기 2일전에 옥산서원에서 致祭가 있었으며, 치제일 당시 군위의 사림들도 참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통문에서는 옥산서원구인당의 중수가 끝나고 단장을 마친 모습이 장대하고 아름답다고 탄성을 자아내며, 중건한 것을 모두가 경사롭게 여기는 뜻이 거리가 먼 바깥에 있다고 홀로 다르겠는가라고 하였다. 또한 前後의 경비가 많이 들기에 비록 자금을 요청하는 글이 오지는 않았지만 미리 이를 헤아려 준비해놓은 바가 있다고도 하였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각 서원, 향교, 사우 등에서 건물의 중수와 수리시에 소요되는 경비를 각 처에 요청하여 일정부분을 보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건물의 수리 등에는 많은 비용이 들어가므로 주로 향교내지 一鄕이나 道內에 명망있는 분을 제향하는 곳에서는 필요한 물력을 각처의 교원에 요청하거나, 요청이 들어오면 형편에 따라 돕는 것이 관례였다. 이러한 모습을 각종 都錄, 置簿記, 重修·重建日記, 考往錄 등을 통해 알 수 있으며, 그 개개처의 구체적인 내용은 이처럼 통문을 통해서 알 수 도 있다. 이런 점에서 이 통문은 조선후기 각 처의 校院간의 상부상조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통문에 나오는 南溪書院은 현재 군위읍대북2리(現 書院里) 산기슭에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 柳成龍(1542~1607)과 李好閔(1553~1634)을 배향하고 있다. 『西厓集』의 年譜에는 "1581년(45세) 3월 남계서당이 완성되었다. 서당은 군위 先塋(서애의 祖父 산소)의 남쪽에 있다. 전에 관찰공(서애의 부친)이 재실을 지으려다 짓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비로소 완성한 것이다. 堂은 霜露堂, 齋는 永慕齋라 하여 재실로 삼고, 동쪽에는 玩心齋, 鳶魚軒을 만들어 공부하는 여러 학생들을 거처하게 하고, 북쪽에는 三靜齋를 만들어 중을 데려다가 거처하여 수호하게 하였다. 상로당 앞에는 愛蓮堂, 연어헌 밖에는 養魚池가 있으며, 서쪽산 기슭 밑에는 招陰臺가 있고, 동쪽 바위에는 咏歸臺가 있다. 영귀대 아래 흐르는 큰 냇물은 歎逝라 하고 연어헌 동쪽의 작은 냇물은 倚笻이라 하고는 합쳐 南溪精舍라는 현판을 달았다. 南溪12詠과 여러 작품이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서애의 부친 류중영이 재실을 지으려다 짓지 못하였다가 1581년 3월에 완성되었다. 위치는 군위에 있는 서애의 조부 산소의 남쪽에 있다. 또 당시 이 精舍의 규모가 매우 컸는데, 風流를 즐기고 風致를 아름답게 꾸며 자연을 玩賞할 수 있도록 한 것을 알 수 있겠다. 서애영의정으로 있으면서도 여러 번 이곳에 와서 성묘도 하고 講學도 하였다. 서애 사후인 1621년에 후진들이 이 서당을 重修하여 군위지방의 유림들이 詩會 등의 장소로 사용하여오다가, 1624년에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627류성룡의 위패를 모시고 서원으로 승격시켰다. 1787년에 이호민을 추향하여 봄, 가을로 봉향해 왔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8흥선대원군이 전국의 미사액 서원을 철폐하자 위패를 하회로 옮겼으며 일부 건물만 남아 서당으로 사용되었다. 6.25 전쟁으로 불탔으나, 1990년에 영천이씨, 남양홍씨, 경주이씨, 연안이씨, 해평김씨, 풍산류씨 등 7개 문중의 후손들이 서애의 뜻을 추모하기 위하여 현재의 위치에 남계서당을 복원하였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軍威의 鄕脈』, 군위군, 군위군, 1983.
이병훈,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39년 군위향교(軍威鄕校)·남계서원(남계서원) 통문(通文)
通文
右文爲奉告事伏以 貴院鬱攸之灾係是斯文之厄遠近章甫固當齊力於重建之役而幸賴 僉君子坐在裏許竭蹶
彈誠塗墍垂畢輪煥改觀以至於 息額之重宣其在同慶之義豈可以地遠而自外哉至若前後經費之許多雖無 來諭之
鄭重固有所預自虞度而芽鄙鄕學舍之凋弊更無與他邑比數者僅以 來通所排之五緡文因便付呈涓埃塵刹寧足爲
萬一之報補哉只自抱羞騂顔而惟伏冀 僉君子俯諒而開納之幸甚
右文通
玉山書院
己亥十二月十五日軍威鄕校都有司幼學 洪宅謙
齋任 李德在
崔宅坤
南溪書院院長 洪宇寧
齋任 洪宅凞
李魯祚
會員生員 李廷佑
幼學 洪宇正
李寅鳳
李魯瞻
洪宇燮
洪宅宬
南漢秀
尹益勳
柳相佑
洪宅鎬
洪胤遠
金集一
李鼎淵
李龍淵
洪志遠
洪履遠
都運龍
殷禹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