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이 통문은 愚山의 修契所에서 愚伏 鄭經世를 獨享하는 사우를 세워서 오는 10월 22일에 奉安禮를 거행하니 참석해 주길 청하는 내용으로, 道南書院 院長 趙槇 외 55명이 연명하여 보낸 것이다. 우산수계소가 아닌 도남서원에서 통문을 보낸 것은 우복을 제향하고 있는 까닭도 있지만, 상주지역의 首院인 도남서원의 권위를 빌려 우복사당 건립의 당위성과 위상을 확립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愚伏 鄭經世는 일찍이 愚山에서 강론하였는데, 愚伏의 문집 가운데 강론을 했던 愚山의 경치를 소재로 한 詩 20首가 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아직도 愚伏의 자취가 亭, 臺, 巖石에 여전하여 그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흥취를 느낀다고 하였으며, 또한 선생의 藏修處이자 임금이 글을 보내 치제한 곳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땅에 愚伏의 祠宇를 세우고 현판을 걸어 경모함을 기리려고 했던 것이 道南書院 先輩들의 崇奉하는 通例였지만, 100년이 지나도록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1791년에 愚伏의 문인과 후예들이 이를 개탄하여 그 계획을 실천하려고 했지만, 40여 년이 지나도록 이루지 못하였다. 사람의 일이 평안하지만은 않고 변화하고 바뀌어 제현들이 늙어 일을 추진하게 어렵게 되었기에 薦享하는 일의 책임은 작금에 이르러 자신들에게 이어졌다고 하였다. 하지만, 勢力이 부족하여 講堂과 사당의 형태만 갖춘 체 落成 告由는 흉작과 역병이 있어 수년이 지체되었다고 한탄하였다. 이러던 중 屛山書院에서 道南書院로 글을 보내와 정중히 말하므로, 우리들 역시 大事가 지체됨을 항상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이제 사당에 필요한 물품들을 마련하는 등이 일이 순조로워 오는 10월 22일에 위패의 奉安禮를 거행하니 참석해달라는 내용이다.
통문에서 말하는 愚伏의 사당은 愚山書院를 일컫는다. 우산서원은 정경세의 主享處로서 1835년에 건립되었으며, 이듬해인 1836년에 鄭宗魯를 배향했다. 이 통문에서는 서원건립 이전부터 우복의 藏修地인 愚山에 그를 제향하는 사당을 건립하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서원 건립 후 그 위패 봉안식에 많은 사림들이 참석해 주길 道南書院에서 적극 나서 추진하고 있었다. 당시 우복을 제향하고 있는 서원은 尙州의 道南書院, 大邱의 硏經書院, 慶山의 孤山書院, 개령의 德林書院이 있었다. 이들 서원은 모두 여러 賢人들을 合享하고 있었기에 일찍부터 愚伏의 本孫과 급문제자들에 의하여 그의 독향처 건립이 논의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통문에 의하면 일찍이 도남서원 사림들에 의해 우복 독향의 제향처를 건립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이며, 두 번째 시도는 우복의 급문제자들의 後裔들에 의해 추진된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우복 급문제자들의 후예들은 愚山修契를 만들어 우복의 顯揚사업에 적극 나서고 있었기에 당시 상당한 진척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근과 역병으로 인해 일의 추진이 지체 되었고, 1835년에 이르러 그 성과를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풍산화경당 소장 「愚山書院事實」에는 及門諸賢들이 稧를 만들어 祠宇를 건립하였다고 하였으며, 同春堂 宋浚吉과 老峯 閔鼎重이 그 뒤를 이어 守護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이미 오래전부터 우복의 사당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奉安禮가 열리는 10월 22일을 전후하여 봉안에 참석한 자와 절차 등에 관한 것은 奉安時의 執事錄으로 『奉安敦事錄』이 愚伏宗家에 전래되고 있어서 참고가 된다. 內題는「崇道祠腏享竣事錄」으로 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愚伏의 사당이 ‘崇道祠’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이 자료에는 都有司 鄭象履 등 58명의 奉安時 집사 명단과 85명의 참가 유생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은 우복의 본손과 尙州 사림들이 대다수를 차지하지만, 인근의 安東, 醴泉, 龍宮, 聞慶, 咸昌, 善山, 軍威, 靑松, 順興, 漆谷, 仁同, 沃川, 高靈 등지에서도 사림들이 到來하였다. 특이한 것은 노론계인 興巖書院에서도 참석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愚伏와 宋浚吉의 관계와 관련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상주의 晉陽鄭氏는 愚伏代에 이르러 그의 사회적, 정치적 위상 강화로 家格의 상승과 더불어 통혼권을 확대해 나갔다. 우복은 진성이씨李堣(퇴계의 숙부)의 증손녀를 繼配로 맞이하여 안동권으로 혼반을 넓혔으며, 이후 長子 鄭杺은 경주양동의 李宜活(회재의 손자)의 딸과 혼인하고, 次子 鄭{木+學}은 상주의 명문 晉州姜氏 姜淵의 딸과 혼인하였다. 長女는 盧守愼의 증손 盧碩命에게 출가하였다. 특이한 점은 次女를 黨色을 달리하는 宋浚吉과 혼인시켰다는 점에 있다. 물론 여기에는 우복의 정치적 이해가 일정부분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송준길은 우복의 사위가 된 이후 약 10년 동안 상주에서 살았다. 이는 처남 鄭杺(1597~1625)이 29세의 나이로 단명한 것에 기인한 바가 크며, 이 과정에서 그는 우복의 행적을 정리하고 遺文을 수습하여 「愚伏年譜」찬술의 바탕을 마련하였다. 또한 송준길과의 인연은 우복 가문의 정치적 향배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송준길의 가계는 직계뿐만 아니라 외손 가계도 현달하였는데, 숙종비 인현왕후와 숙종대 노론의 중진 閔鎭遠은 그의 외손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愚山書院事實」에서도 확인된다. 이처럼 우복가문과 노론계와는 송준길을 매개로 한 架橋가 형성되어 있었기에 興巖書院 儒生의 봉안례 참석이 있었던 것이다.
『奉安敦事錄』을 통해 봉안례가 있기까지의 준비사항과 진행절차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0월 10일 都有司 鄭象履와 有司 孫石鍊, 鄭民哀 등이 本所에서 회의하여 절차에 따라 簠簋床卓을 우선 갖추고 籩豆 등은 임시로 道南書院에서 빌린다. 12일 본손 鄭民稷이 河回의 參判柳台文에게 奉安文을 받아 왔다. 또한 새로이 현판을 조성하는 것에 대해 都有司가 首鄕老 姜令公(令監)에게 물으니 하루 전까지 題版하면 된다하여 河回에서 글을 보내왔는데 ‘花川社’라고 하였다. 이후 논의를 통해 祠에서 院으로 호칭을 바꾸고 堂은 ‘道存’이라 칭하고, 祠의 명칭은 모두 ‘崇道’로 합의하여 정하였다. 14일에 사당에 도배를 하고, 전사청의 창에 풀칠을 하였다. 15일 酒有司가 釀酒를 감독 하였다. 16일 많은 손님들이 올 것을 예상되어 임시로 가게를 내어 장사꾼으로 하여금 供饋토록 하였다. 회의에 참석하는 많은 손님들에게는 朝夕으로 署印된 標文을 주어 구분 하도록 했다. 17일 廟內에 자리를 줄로 엮고, 綿布를 이어 사방을 꾸몄다. 18일 笏記帖을 고쳤다. 19일 掌饌 2員이 먼저 이르러 諸具와 俎床과 燭臺 등을 살펴보았다. 갖춰지지 않은 것은 老少의 有司가 연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俎豆를 알지 못한 까닭이 그러했다. 저녁에 새로 만든 위판이 왔다. 대개 먼저 櫝을 만들면 길이의 넓고 좁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서로 말하여 開闔시에 다시 고치는 어려움이 없도록 하였다. 다행히 爵臺와 俎床을 얻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工人을 창졸간에 찾아서 빠진 것을 갖추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뒷일에 경계토록 해야 한다.
20일 본향과 이웃 고을의 사람 80여인이 어렵게 왔다. 掌饌이 犧牲과 脯를 만드는 것을 감독했다. 21일 근처에 머물던 자들이 잇달아 도착하였다. 다만 道南書院 院長 趙槇가 늦었다. 오후에 開座하여 曺司(鄭龜洛, 蔡周灝)와 公事員(金璣吉, 趙慕洙)을 선출하였다. 이후 都執禮(趙槇)와 院長(宋奎弼)을 薦出하고, 도집례와 원장이 題版(鄭象晉:冑孫), 奉版(柳厦祚), 奉櫝(李尙晉)과 廟內執事(金道在, 黃浩善)는 회원 중 글이 뛰어난 자로 선출했다. 이 과정에서 여러 의견이 나와 선출이 쉽지 않았다. 자리를 파하지 않고 모든 집사들이 正堂에 이르러 나란히 앉은 후 현판을 걸고 묘내의 椅卓에 院長 宋奎弼이 이르러 神位에 분향하고 모든 사람들이 再拜하였다. 이후 모두 식사를 하고 강당에 촛불을 밝히고 모였다. 현직 관리를 원장으로(道院長)해서 다시 뽑아 천거하고, 또한 諸執事도 선출하였다. 會員이 모두 140여 명인데 멀리에서는 玉山, 陶山, 紹修, 虎溪 등의 여러 서원에서 유생을 보내고 또한 助物하였다. 그런데 선생을 제향하는 硏經, 德林, 孤山에서는 한명도 오지 않았다.
22일 봉안례 당시의 院長은 柳喆祚(郡守)이며, 宗孫은 鄭象晉(參奉)이었다. 헌관은 郡守柳喆祚(初獻)·道南書院 院長 趙㯖(亞獻)·宗孫 鄭象晉(終獻) 순으로 정해졌으며, 陶山·屛山·紹修·虎溪·玉山書院 등에서 유생이 파견하여 執禮를 도왔다. 모든 유생들이 巾服을 갖추고 廟庭에 제물과 제기를 진설하였다. 도중에 簠稻簋黍의 글이 있는데, 그 모나고 둥근 것의 구분이 없다하여 辨說이 분분하자 『禮記』의 定說을 따라 簋圓簠方으로 마땅히 고쳤다. 진설이 끝나고 執禮 절차는 笏記에 따라 진행되었다. 봉안례가 모두 끝난 후 立齋 鄭宗魯의 追享에 관한 일을 논의하였다. 입재의 추향건은 이듬해 봄에 통문을 보내 布告하기로 하고, 도집례는 하회의 柳參判台文에게 하며 道院長이 遞任했으므로, 鄕院長으로 姜令監을 천거하여 선출하였다.
이상의 「봉안돈사록」은 10월 10일부터 22일까지의 12일간의 奉安禮 준비기록이다. 처음 준비는 본손인 鄭象履가 都有司가 되어 의식을 준비하였다. 대체로 그러하듯 행사의 준비는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진행이 되었다. 이후 19~20일까지 掌饌을 비롯한 본향과 인근 고을의 사림들이 속속히 도착하고 있었다. 이날까지 약 80여 명이 모였다. 행사 준비를 점검하던 중 일부 祭具가 갖춰지지 않아서 다소 미흡한 점이 있었지만, 급하게 구해서 보완하였다. 21일에는 전날부터 날씨가 좋지 않았던 까닭에 인근에 숙박했던 사람들만이 모여서 題版奉安의 임원을 선출하였는데, 도집례와 원장은 전직 관료였던 道南書院 院長 趙槇(前承旨)과 宋奎弼(前正言)이 맡았다. 봉안식 이후 저녁에는 140여 명의 會員들이 모이게 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郡守柳喆祚가 현직에 있으므로 그를 道院長 겸 初獻官으로 선출하고, 執事들을 새로 分定하였다. 22일 奉安告由를 마치고 저녁에 다시 모여 道院長의 체임을 이유로 鄕院長으로 姜令監을 천거하고, 立齋의 追享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그 결과 이듬해 봄에 통문을 돌려 立齋의 추향사실을 告하기로 하였으며, 都執禮로는 河回의 前參判柳台文을 薦出하였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우산서원 건립과정에서 도남서원의 역할이 컸음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실제 도남서원 원장이었던 趙槇는 『奉安敦事錄』에 의하면, 題版奉安時에 都執禮를 맡았으며, 22일의 봉안례에서는 亞獻으로 참석하였다. 현재 우산서원 건립과 관련된 자료는 『봉안돈사록』과 본 통문, 「愚山書院事實」 및 일부 인사들의 문집에 나오는 봉안문 등이 유일하다. 이 통문은 우산서원 건립과정과 도남서원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