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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5년 상주(尙州) 도남서원(道南書院)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4+KSM-XF.1835.4713-20120630.Y125010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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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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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강굉흠, 이정환, 권세영, 도남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도남2길 91 (도남동)
작성시기 1835
형태사항 크기: 106.2 X 65.6
판본: 고문서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835년 도남서원에서 옥산서원과 임고서원으로 10월 22일에 있는 우복의 위판봉안례에 참석해 주길 요청하는 통문
이 통문은 우산의 수계소에서 도남서원에 제향된 우복 정경세를 독향하는 사우를 세워서 오는 10월 22일에 봉안례를 거행하니 참석해 주길 청하는 내용이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우복은 일찍이 우산에서 강론하였는데, 우복의 문집 가운데 강론을 했던 우산의 경치를 소재로 한 시 20수가 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아직도 우복의 자취가 여전하여 그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흥취를 느낀다고 하였으며, 또한 선생의 장수처이자 임금이 글을 보내 치제한 곳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땅에 우복의 사우를 세우고 현판을 걸어 경모함을 기리려고 했던 것이 도남서원 선배들의 숭봉하는 통례였지만, 100년이 지나도록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1791년에 우복의 문인과 후예들이 이를 개탄하여 그 계획을 실천하려고 했지만, 40여 년이 지나도록 이루지 못하였다. 사람의 일이 평안하지만은 않고 변화하고 바뀌어 제현들이 늙어 일을 추진하게 어렵게 되었기에 천향하는 일의 책임은 작금에 이르러 자신들에게 이어졌다고 하였다. 하지만, 세력이 부족하여 강당과 사당의 형태만 갖춘 체 낙성례는 흉작과 역병이 있어 수년이 지체되었다고 한탄하였다. 이러던 중 병산서원에서 도남서원으로 글을 보내와 정중히 말하므로, 우리들 역시 큰 일이 지체됨을 항상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이제 사당에 필요한 물품들을 마련하는 등이 일이 순조로워 오는 10월 22일에 위패의 봉안례를 거행하니 참석해달라는 내용이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퇴계학과 유교문화』28, 최재목,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00
『古文書集成』88,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2008
한국국학진흥원 소장(NO. 11513)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우복종가 소장본)
이병훈,이수환

상세정보

1835道南書院에서 玉山書院臨皐書院으로 10월 22일에 있는 愚伏의 位版奉安禮에 참석해 주길 요청하는 通文
[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이 통문은 愚山의 修契所에서 愚伏 鄭經世를 獨享하는 사우를 세워서 오는 10월 22일에 奉安禮를 거행하니 참석해 주길 청하는 내용으로, 道南書院 院長 趙槇 외 55명이 연명하여 보낸 것이다. 우산수계소가 아닌 도남서원에서 통문을 보낸 것은 우복을 제향하고 있는 까닭도 있지만, 상주지역의 首院인 도남서원의 권위를 빌려 우복사당 건립의 당위성과 위상을 확립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愚伏 鄭經世는 일찍이 愚山에서 강론하였는데, 愚伏의 문집 가운데 강론을 했던 愚山의 경치를 소재로 한 詩 20首가 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아직도 愚伏의 자취가 亭, 臺, 巖石에 여전하여 그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흥취를 느낀다고 하였으며, 또한 선생의 藏修處이자 임금이 글을 보내 치제한 곳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땅에 愚伏의 祠宇를 세우고 현판을 걸어 경모함을 기리려고 했던 것이 道南書院 先輩들의 崇奉하는 通例였지만, 100년이 지나도록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 1791년에 愚伏의 문인과 후예들이 이를 개탄하여 그 계획을 실천하려고 했지만, 40여 년이 지나도록 이루지 못하였다. 사람의 일이 평안하지만은 않고 변화하고 바뀌어 제현들이 늙어 일을 추진하게 어렵게 되었기에 薦享하는 일의 책임은 작금에 이르러 자신들에게 이어졌다고 하였다. 하지만, 勢力이 부족하여 講堂과 사당의 형태만 갖춘 체 落成 告由는 흉작과 역병이 있어 수년이 지체되었다고 한탄하였다. 이러던 중 屛山書院에서 道南書院로 글을 보내와 정중히 말하므로, 우리들 역시 大事가 지체됨을 항상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이제 사당에 필요한 물품들을 마련하는 등이 일이 순조로워 오는 10월 22일에 위패의 奉安禮를 거행하니 참석해달라는 내용이다.
통문에서 말하는 愚伏의 사당은 愚山書院를 일컫는다. 우산서원정경세의 主享處로서 1835년에 건립되었으며, 이듬해인 1836년에 鄭宗魯를 배향했다. 이 통문에서는 서원건립 이전부터 우복의 藏修地인 愚山에 그를 제향하는 사당을 건립하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서원 건립 후 그 위패 봉안식에 많은 사림들이 참석해 주길 道南書院에서 적극 나서 추진하고 있었다. 당시 우복을 제향하고 있는 서원은 尙州道南書院, 大邱硏經書院, 慶山孤山書院, 개령德林書院이 있었다. 이들 서원은 모두 여러 賢人들을 合享하고 있었기에 일찍부터 愚伏의 本孫과 급문제자들에 의하여 그의 독향처 건립이 논의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통문에 의하면 일찍이 도남서원 사림들에 의해 우복 독향의 제향처를 건립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이며, 두 번째 시도는 우복의 급문제자들의 後裔들에 의해 추진된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우복 급문제자들의 후예들은 愚山修契를 만들어 우복의 顯揚사업에 적극 나서고 있었기에 당시 상당한 진척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근과 역병으로 인해 일의 추진이 지체 되었고, 1835년에 이르러 그 성과를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풍산화경당 소장 「愚山書院事實」에는 及門諸賢들이 稧를 만들어 祠宇를 건립하였다고 하였으며, 同春堂 宋浚吉老峯 閔鼎重이 그 뒤를 이어 守護하였다고 하였다. 이를 보면 이미 오래전부터 우복의 사당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奉安禮가 열리는 10월 22일을 전후하여 봉안에 참석한 자와 절차 등에 관한 것은 奉安時의 執事錄으로 『奉安敦事錄』이 愚伏宗家에 전래되고 있어서 참고가 된다. 內題는「崇道祠腏享竣事錄」으로 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愚伏의 사당이 ‘崇道祠’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이 자료에는 都有司 鄭象履 등 58명의 奉安時 집사 명단과 85명의 참가 유생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은 우복의 본손과 尙州 사림들이 대다수를 차지하지만, 인근의 安東, 醴泉, 龍宮, 聞慶, 咸昌, 善山, 軍威, 靑松, 順興, 漆谷, 仁同, 沃川, 高靈 등지에서도 사림들이 到來하였다. 특이한 것은 노론계인 興巖書院에서도 참석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愚伏宋浚吉의 관계와 관련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상주의 晉陽鄭氏는 愚伏代에 이르러 그의 사회적, 정치적 위상 강화로 家格의 상승과 더불어 통혼권을 확대해 나갔다. 우복진성이씨李堣(퇴계의 숙부)의 증손녀를 繼配로 맞이하여 안동권으로 혼반을 넓혔으며, 이후 長子 鄭杺경주양동李宜活(회재의 손자)의 딸과 혼인하고, 次子 鄭{木+學}상주의 명문 晉州姜氏 姜淵의 딸과 혼인하였다. 長女는 盧守愼의 증손 盧碩命에게 출가하였다. 특이한 점은 次女를 黨色을 달리하는 宋浚吉과 혼인시켰다는 점에 있다. 물론 여기에는 우복의 정치적 이해가 일정부분 있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송준길우복의 사위가 된 이후 약 10년 동안 상주에서 살았다. 이는 처남 鄭杺(1597~1625)이 29세의 나이로 단명한 것에 기인한 바가 크며, 이 과정에서 그는 우복의 행적을 정리하고 遺文을 수습하여 「愚伏年譜」찬술의 바탕을 마련하였다. 또한 송준길과의 인연은 우복 가문의 정치적 향배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송준길의 가계는 직계뿐만 아니라 외손 가계도 현달하였는데, 숙종비 인현왕후숙종대 노론의 중진 閔鎭遠은 그의 외손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愚山書院事實」에서도 확인된다. 이처럼 우복가문과 노론계와는 송준길을 매개로 한 架橋가 형성되어 있었기에 興巖書院 儒生의 봉안례 참석이 있었던 것이다.
奉安敦事錄』을 통해 봉안례가 있기까지의 준비사항과 진행절차는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0월 10일 都有司 鄭象履와 有司 孫石鍊, 鄭民哀 등이 本所에서 회의하여 절차에 따라 簠簋床卓을 우선 갖추고 籩豆 등은 임시로 道南書院에서 빌린다. 12일 본손 鄭民稷河回參判柳台文에게 奉安文을 받아 왔다. 또한 새로이 현판을 조성하는 것에 대해 都有司가 首鄕老 姜令公(令監)에게 물으니 하루 전까지 題版하면 된다하여 河回에서 글을 보내왔는데 ‘花川社’라고 하였다. 이후 논의를 통해 祠에서 院으로 호칭을 바꾸고 堂은 ‘道存’이라 칭하고, 祠의 명칭은 모두 ‘崇道’로 합의하여 정하였다. 14일에 사당에 도배를 하고, 전사청의 창에 풀칠을 하였다. 15일 酒有司가 釀酒를 감독 하였다. 16일 많은 손님들이 올 것을 예상되어 임시로 가게를 내어 장사꾼으로 하여금 供饋토록 하였다. 회의에 참석하는 많은 손님들에게는 朝夕으로 署印된 標文을 주어 구분 하도록 했다. 17일 廟內에 자리를 줄로 엮고, 綿布를 이어 사방을 꾸몄다. 18일 笏記帖을 고쳤다. 19일 掌饌 2員이 먼저 이르러 諸具와 俎床과 燭臺 등을 살펴보았다. 갖춰지지 않은 것은 老少의 有司가 연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俎豆를 알지 못한 까닭이 그러했다. 저녁에 새로 만든 위판이 왔다. 대개 먼저 櫝을 만들면 길이의 넓고 좁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서로 말하여 開闔시에 다시 고치는 어려움이 없도록 하였다. 다행히 爵臺와 俎床을 얻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工人을 창졸간에 찾아서 빠진 것을 갖추는 것은 어려운 것이다. 이 모든 것을 뒷일에 경계토록 해야 한다.
20일 본향과 이웃 고을의 사람 80여인이 어렵게 왔다. 掌饌이 犧牲과 脯를 만드는 것을 감독했다. 21일 근처에 머물던 자들이 잇달아 도착하였다. 다만 道南書院 院長 趙槇가 늦었다. 오후에 開座하여 曺司(鄭龜洛, 蔡周灝)와 公事員(金璣吉, 趙慕洙)을 선출하였다. 이후 都執禮(趙槇)와 院長(宋奎弼)을 薦出하고, 도집례와 원장이 題版(鄭象晉:冑孫), 奉版(柳厦祚), 奉櫝(李尙晉)과 廟內執事(金道在, 黃浩善)는 회원 중 글이 뛰어난 자로 선출했다. 이 과정에서 여러 의견이 나와 선출이 쉽지 않았다. 자리를 파하지 않고 모든 집사들이 正堂에 이르러 나란히 앉은 후 현판을 걸고 묘내의 椅卓에 院長 宋奎弼이 이르러 神位에 분향하고 모든 사람들이 再拜하였다. 이후 모두 식사를 하고 강당에 촛불을 밝히고 모였다. 현직 관리를 원장으로(道院長)해서 다시 뽑아 천거하고, 또한 諸執事도 선출하였다. 會員이 모두 140여 명인데 멀리에서는 玉山, 陶山, 紹修, 虎溪 등의 여러 서원에서 유생을 보내고 또한 助物하였다. 그런데 선생을 제향하는 硏經, 德林, 孤山에서는 한명도 오지 않았다.
22일 봉안례 당시의 院長은 柳喆祚(郡守)이며, 宗孫은 鄭象晉(參奉)이었다. 헌관은 郡守柳喆祚(初獻)·道南書院 院長 趙㯖(亞獻)·宗孫 鄭象晉(終獻) 순으로 정해졌으며, 陶山·屛山·紹修·虎溪·玉山書院 등에서 유생이 파견하여 執禮를 도왔다. 모든 유생들이 巾服을 갖추고 廟庭에 제물과 제기를 진설하였다. 도중에 簠稻簋黍의 글이 있는데, 그 모나고 둥근 것의 구분이 없다하여 辨說이 분분하자 『禮記』의 定說을 따라 簋圓簠方으로 마땅히 고쳤다. 진설이 끝나고 執禮 절차는 笏記에 따라 진행되었다. 봉안례가 모두 끝난 후 立齋 鄭宗魯의 追享에 관한 일을 논의하였다. 입재의 추향건은 이듬해 봄에 통문을 보내 布告하기로 하고, 도집례는 하회柳參判台文에게 하며 道院長이 遞任했으므로, 鄕院長으로 姜令監을 천거하여 선출하였다.
이상의 「봉안돈사록」은 10월 10일부터 22일까지의 12일간의 奉安禮 준비기록이다. 처음 준비는 본손인 鄭象履가 都有司가 되어 의식을 준비하였다. 대체로 그러하듯 행사의 준비는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진행이 되었다. 이후 19~20일까지 掌饌을 비롯한 본향과 인근 고을의 사림들이 속속히 도착하고 있었다. 이날까지 약 80여 명이 모였다. 행사 준비를 점검하던 중 일부 祭具가 갖춰지지 않아서 다소 미흡한 점이 있었지만, 급하게 구해서 보완하였다. 21일에는 전날부터 날씨가 좋지 않았던 까닭에 인근에 숙박했던 사람들만이 모여서 題版奉安의 임원을 선출하였는데, 도집례와 원장은 전직 관료였던 道南書院 院長 趙槇(前承旨)과 宋奎弼(前正言)이 맡았다. 봉안식 이후 저녁에는 140여 명의 會員들이 모이게 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郡守柳喆祚가 현직에 있으므로 그를 道院長 겸 初獻官으로 선출하고, 執事들을 새로 分定하였다. 22일 奉安告由를 마치고 저녁에 다시 모여 道院長의 체임을 이유로 鄕院長으로 姜令監을 천거하고, 立齋의 追享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그 결과 이듬해 봄에 통문을 돌려 立齋의 추향사실을 告하기로 하였으며, 都執禮로는 河回의 前參判柳台文을 薦出하였다.
자료적 가치
이 통문은 우산서원 건립과정에서 도남서원의 역할이 컸음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실제 도남서원 원장이었던 趙槇는 『奉安敦事錄』에 의하면, 題版奉安時에 都執禮를 맡았으며, 22일의 봉안례에서는 亞獻으로 참석하였다. 현재 우산서원 건립과 관련된 자료는 『봉안돈사록』과 본 통문, 「愚山書院事實」 및 일부 인사들의 문집에 나오는 봉안문 등이 유일하다. 이 통문은 우산서원 건립과정과 도남서원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다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높다.
우산서원1835년 本孫과 士林의 公議로 鄭經世를 獨享하기 위해 건립된 후 1836鄭宗魯를 추향하였다. 1868년 훼철된 후 大山樓만이 남아 현재까지 전해진다. 道存堂은 20세기 초에 복원되었는데, 그 외 건물은 복원되지 못하고 터만 남아있다. 도남서원1606년 지방유림의 공의로 鄭夢周·金宏弼·鄭汝昌·李彦迪·李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1616盧守愼·柳成龍, 1635鄭經世를 추향하였다. 1677년 ‘道南’이라고 사액되었다. 경내의 건물로는 묘우인 道正祠, 동재인 遜學齋, 서재인 敏求齋, 신문인 入德門, 강당인 一貫堂, 누각인 靜虛軒風雩壇·詠歸門 등이 있었다. 1868년에 훼철된 뒤 1992년 상주유림이 힘을 모아 강당 등을 건립하고, 2002년부터 대규모의 복원이 이루어져 원형을 복원하였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퇴계학과 유교문화』28, 최재목,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00
『古文書集成』88,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2008
한국국학진흥원 소장(NO. 11513)
한국학중앙연구원 소장(우복종가 소장본)
이병훈,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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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5년 상주(尙州) 도남서원(道南書院) 통문(通文)
通文
右文爲通諭事伏以愚山之修契所實爲我
愚伏鄭先生本院之奉而設者也 先生盖嘗講道於愚山而文集中二十景題詠卽當日藏修之蹟
也遺芬賸馥愈久不沫亭臺巖石尙爲後人之所受賞 杖屨圖書至入
宸章之所興感則就其地立祠揭處以寓羹墻之慕者卽吾嶺中 諸先輩本院崇奉之通例而此實百年來
未遑之擧也往在 健陵辛亥間 先生門人後裔爲是之慨合謀經紀垂爲四十餘星霜而居然人事變遷諸老零
落集事薦享自是後死之責而弟緣力勢綿薄功役浩大始於年前堂廡粗完 廟貌告成而旋値凶荒及疫癘
㥘界又爲遷就者數年矣此所以自屛院文諭於道院者極其鄭重而鄙等亦以大事之遲稽每懷踧踖者也見今境
落淸夷儀物就緖而衆議果斷將以十月二十二日爲 奉安位版之擧此是斯文之慶士林之行也鄙等玆以齊會道院
飛文輪告伏望 僉君子濟濟臨賁合席商礭克擧縟禮之地千萬幸甚
右文通
慶州 玉山書院
永川 臨皐書院
乙未九月初一日道南書院 院長 前承旨 趙槇
齋任 姜仁永
趙起嵩
公事員 柳家春
趙述孝
曹司 趙奎榮
鄭先八
製通 柳會春
寫通 李鉉衆
會員 柳抃春
琴禎漢
黃獻老
進士 姜肱欽
幼學 金鶴秋
李坤厚
趙述周
進士 李正煥
幼學 黃躋凞
李壕
李埏
金毅秋
趙慕洙
趙述心
生員 權世永
幼學 權廻
進士 柳綽遇
幼學 南魯秉
金鼎五
金鼎受
蔡昌禹
蔡範禹
生員 金顯鐸
蔡光禹
金文相
孫{氵+奭}
幼學 孫鎭圭
孫石鍊
金載崙
金漢翼
金在慎
金佑永
金秀永
金近秋
正言 宋奎弼
幼學 宋啓升
金宗競
金載{忄+百}
正言 宋台霖
幼學 姜最欽
柳鴻遇
南植正
洪大鉉
洪仁標
高夢翊
高世謙
金亮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