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이 통문은 1785년 경주의 서악서원에서 儒錄에 있는 儒林이 적어 任司를 천거하기 어려운 형세이니, 옥산서원에서 任司를 천거하여 서악서원에 薦案을 보내면 이를 圈點하여 선발하겠다는 내용이다. 또한 옥산서원에서 서악서원 임사를 천거하는 일은 향교의 교임을 천거하여 뽑을 때에도 남북을 구분치 않는 것과 같으며, 또한 남북으로 分薦하고 合錄하던 일은 두 서원의 거리가 멀어서 그리한 것이기에 옥산서원에서 남북 유림을 합쳐 천거하는 일은 도리에 어긋나지 않다고 하였다. 이처럼 통문에서 말하는 바는 거리가 멀어서 부득이 廣川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나눠 활동하던 儒林들이 18세기 이래로 향교의 任員을 선발할 때를 제외하고는 각 지역의 서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운영주체가 불분명하였던 서악서원은 더 이상 儒生들의 출입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중반까지는 여주이씨와 경주손씨 등 경주를 대표하는 가문의 인물들이 서악서원의 任司를 역임하였지만, 이후 거리가 멀어 廣川以北의 유림들은 옥산서원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以南의 유림들은 서악서원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서악서원은 경주최씨를 중심으로 豊川任氏, 谷山韓氏, 慶州李氏, 瑞山柳氏, 慶州金氏, 英陽南氏 등이 연합하여 운영하였지만, 이들도 각 문중별 院祠가 건립되면서 점차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18세기 이후 새롭게 나타난 新鄕들이 노론계 수령의 지원 하에 서악서원에 참여한 것도 기존 유림들의 이탈을 가속화 한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 1700년 崔震立을 주향하는 龍山書院이 건립되면서 서악서원 운영을 실질적으로 담당하였던 경주최씨들이 대거 이탈하고, 이후 新鄕내지 노론계 유림들이 仁山書院(宋時烈)와 문중원사를 건립하여 그곳의 운영에 집중하는 가운데 서악서원은 자연 유림들의 관심 밖의 대상이 되어갔던 것이다.
이후 서악서원은 몇몇 유림들에 의하여 그 명맥을 이어오던 중 任司를 선출할 여력도 남지 않아 春秋闕享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기에 오래전부터 경주지역을 분할해온 옥산서원에 任司 薦擧를 부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통문에 연명한 崔柱一 외 35명을 보면 경주최씨·이씨·손씨·김씨, 영양남씨, 풍천임씨, 新安朱氏, 迎日鄭氏, 서산류씨, 곡산한씨 등으로 경주토성인 4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주해온 성씨들이었다. 최씨 8명, 이씨 10명을 제외한 나머지 성씨는 1~3명만이 연명하고, 院長이나 有司들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 서악서원의 형세가 매우 어려움을 짐작케 한다. 실제 통문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을 "薦擧하는 일이 오래도록 폐지되어 廣川以南의 사람 가운데 儒錄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 70~80세 이상된 노인 5~6명에 불과해 천거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토로하고 있다.
옥산․서악서원은 16세기 중엽에 건립된 이래로 18세기 이전까지 경주지역 사림들의 중심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옥산서원은 1572년 말에 건립하여 이듬해인 1573년 2월 西岳精舍에 別廟 형태로 봉안되어 있던 회재의 위판을 移安하고, 같은 해 12월 監司金繼輝의 啓達로 賜額을 받았다. 또한 주향자인 회재가 1610년 東方5賢의 한 분으로 文廟에 종사되자 그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서악서원은 1563년 경주부윤李楨과 사림들의 공의에 의하여 仙桃山 아래에 지어졌다. 처음에는 西岳精舍로 불렸는데, 임란이후 중건하여 1623년 西岳書院으로 사액되었다. 이처럼 서악서원은 옥산서원이 건립되기 전까지 경주지역 사론을 주도해 갔다. 그러나 옥산서원 건립 후 서악서원보다 먼저 사액이 되고, 이언적이 문묘에 종사됨으로써 이후 안동의 陶山, 진주의 德川(山)書院과 함께 영남학파의 3대 서원으로서 경주권 사림사회를 실질적으로 대표하게 되었다.
옥산과 서악서원은 16세기 중반 경주부의 대표적인 사족들이 공동으로 참여하여 서원운영의 기본 규약이 되는 院規를 같이하고, 院案을 合錄하면서 17세기까지 경주지역의 남북을 대표하면서 향론을 주도해 갔다. 당시 경주부의 대표적인 각 문중들은 여기에 원임, 원생 및 公事員 등으로 참여하면서 이 두 서원을 중심으로 한 향촌사회의 운영에 실질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西岳書院考往錄謄草』(1561~1639)에 의거 원장과 유사를 통계하면 李氏 9인, 金氏 5인, 鄭氏 4인, 韓․吳․郭․崔氏 2인, 孫․白․南․徐․黃․朴氏 1인으로 나타난다. 초창기에는 주로 당시 경주사족을 대표했던 鄭克後, 韓克孝 등이 이 시기 서악서원을 주도하였는데, 孫李兩姓이 크게 성장하기 시작한 17세기부터는 李宜澍, 李宜潛, 孫魯 등이 원장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옥산서원의 경우는 설립초기부터 손이 양성 및 府北 출신의 사림들이 주도하였는데, 이들은 서악과 옥산을 번갈아 가면서 원임에 참여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당시 양동의 손이양성은 門閥이나 地望에서 여타 가문에 비하여 압도적이었다. 조선시대 향촌사회에 있어서 문벌의 우열은 顯祖 및 문과와 생진과 합격자로 나타나는 과거와 仕宦을 가지고 평가하였다. 이렇게 볼 때 중종조 이조판서를 역임한 손중돈과 문묘 배향의 영광을 누린 이언적을 배출한 손이 양성은 타 가문에 비해, 우위에 설 수 있었으며, 또한 대․소과 합격자와 仕宦에 있어서도 양 가문이 타 가문을 압도하였다. 조선시대 경주출신 문과급제자는 모두 59명인데 손씨가 8명, 이씨가 29명으로 전체의 절반을 차지했으며, 生進科 출신(文科 제외)은 모두 87명인데 손씨가 11명, 이씨가 24명이었다. 이렇게 볼 때 옥산서원을 중심으로 한 경주권 사림의 실질적인 주도세력은 이들 양 가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악․옥산서원의 입원생은 백록동서원규의 "司馬(生員․進士) 또는 司馬試의 초시 입격자를 우선으로 한다"는 규정을 적용하였다. 실제 옥산서원의 유생선발에 있어서 먼저 才學之士를 簡選하여 考講을 畢한 후 薦主의 천거를 받아 儒籍에 入錄한다는 엄격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17세기까지 두 서원의 院生으로 경주부 내 전 사족이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이 이 시기 鄕案에 등재된 인사였다. 한편, 17~18세기 옥산서원의 入學記, 儒案, 薦案에 나타난 入院生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입학기에 나오는 30명 중 성씨별로는 洪1, 蔣1, 崔3, 李9, 柳1, 黃1, 陳2, 權4, 金1, 孫1명이 있다. 1669년 儒案에는 陳1, 金6, 楊2, 李25, 孫6, 權11, 吳5, 崔14, 朴1, 黃3, 任5, 鄭4, 郭1, 柳3, 徐5, 申2, 蔣1, 朱2, 韓1, 曺1명이 나온다. 1734년의 新薦案에는 李18, 孫4, 陳1, 權3, 蔣2, 徐1, 黃1, 洪1, 鄭1명이며, 1771년 薦案에는 徐4, 李84, 權24, 崔5, 孫13, 蔣2, 曺1, 辛2, 洪1, 金4, 黃3, 柳3, 鄭2, 南1명으로 나타난다. 주목되는 점은 시대가 내려올수록 李氏의 비중이 커진다는 점이다.
이상에서 보면, 17세기까지 경주유림의 중심은 서악․옥산서원에서, 17세기말~18세기 초에 오면 崔震立 후예들이 그 조상의 영광과 종족적 기반을 갖고 그들의 세거지인 이조에 용산서원을 세워 사액 받음으로써 이후 부남을 대표하면서 풍천임씨, 영양남씨, 谷山韓氏 등과 연계하여 부북의 옥산서원에 맞서 독자적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이처럼 경주지역 사림들은 18세기 이후부터 각 지역별, 문중별, 파계별, 당색별로 그 분립이 확산되어 갔다. 그 결과 경주지역 재지사족들의 향촌지배체제는 당색간, 신분계층(적서)간의 극한 대립으로 향론이 분열되면서 점차 무너져갔다. 그 분열의 대표적 폐단이 서악서원의 사례라 볼 수 있다. 비록 대원군 훼철시에 미훼철 원사로 남게 되어 다시, 부남 유림들의 중심처가 되었지만 과거의 성세와는 많은 차이가 있게 되었다. 또한 용산서원을 비롯한 여타 다른 서원들이 있음에도 옥산서원에 부탁한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옥산서원과 서악서원이 나눠 추천하는 규약이 있었기 때문이며, 나아가 비록 활동이 미흡하지만 경주를 대표하는 사액서원이었던 서악서원의 위상을 고려한 조처였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경주의 사림들은 남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부득이 하게 廣川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나눠 각기 옥산서원과 서악서원에 이름을 올리고 후에 合錄하는 형식을 취하여 이 중 任司를 선발하여 두 서원의 각 종 祭儀와 운영에 참여하였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지역, 문중, 파계, 당색별로 사림들의 분립이 확산되면서 비록 사액서원이었지만, 사림들의 외면으로 서악서원의 운영이 어려워졌다. 주향인 중 최치원의 후손인 경주최씨들이 번성하였지만, 이들도 18세기 초 용산서원 건립과 사액으로 주 활동처를 옮기게 되어, 서악서원은 신향 내지 노론계가 주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도 문중원사와 인산서원 건립으로 서악서원 출입을 단절하게 되어 결국, 유생의 발길이 끊기고 나아가 서원운영을 담당할 任司를 선출하기도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일부 사림들이 당시 가장 번성한 옥산서원에 古規를 근거로 서악서원 任司를 천거해주기를 요청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 통문은 경주지역 향촌지배세력의 분열과 그로 인한 폐단의 구체적 사례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