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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5년 서악서원(西岳書院) 통문(通文)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4+KSM-XF.1785.4713-20120630.Y125010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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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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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통문 고문서 유형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통문
작성주체 서악서원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2길 23 (서악동)
작성시기 1785
형태사항 크기: 111 X 66
판본: 고문서
수량: 1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문중소개
현소장처: 경주 옥산서원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안내정보

1785년 서악서원에서 원임의 천거를 옥산서원에 청하는 통문
1785년 경주의 서악서원에서 유안에 있는 유림들이 나이가 많고 그 수도 5~6명뿐이어서 임사를 천거하기 어려운 형편이기에 옥산서원에 요청하여 임사를 천거해 달라는 내용이다. 서악서원에서는 천거 받은 유림을 자신들이 임사로 선출하여 춘추향사에 문제가 없기 바라고 있다. 실제, 경주부내의 유림들은 남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오래전부터 廣川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유림을 나눠 북쪽은 옥산서원이, 남쪽은 서악서원이 중심이 되어 유림을 천거하여 이후 두 천거안을 합쳐 각 서원의 임사를 선발하여 왔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17세기 중반까지 북쪽의 유림들 중 여주이씨와 경주손씨들이 서악서원의 원장과 유사에 선출된 사례가 많이 나타난다. 그러나 18세기 이후부터는 북쪽의 유림들은 옥산서원과 개별 문중원사를 통해 활동하고, 남쪽의 유림들은 18세기 초 건립과 사액이 된 용산서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상대적으로 서악서원의 위상은 추락해 갔다. 이외에도 새롭게 양반이 된 신향세력과 노론계 사족들이 서악서원 운영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이들 역시 노론계 인산서원과 문중원사의 건립으로 점차 서악서원의 운영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 18세기 말에 이르러 통문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서원의 임원이 없어 춘추향사를 지내지 않거나, 못 지내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일부 사림들이 연명하여 옥산서원서악서원 임사를 추천해주길 부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향교의 교임을 선발할 때는 남북의 유림을 구분치 않고 추천하여 선발하는 것과 같이 옥산서원에서도 서악서원 임사를 천거하는 일은 도리에 어긋나지 않다고 보았다. 또한 용산서원을 비롯한 여타 다른 서원들이 있음에도 옥산서원에 부탁한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옥산서원서악서원이 나눠 추천하는 규약이 있었기 때문이며, 나아가 비록 활동이 미흡하지만 경주를 대표하는 사액서원이었던 서악서원의 위상을 고려한 조처였던 것이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龍山書院』, 이수환, 집문당, 2005.
『신라문화』20, 최효식, 동국대신라문화연구소, 2002.
『경주사학』16, 이수환, 경주사학회, 1997.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이병훈,이수환

상세정보

1785경주西岳書院에서 廣南지역의 士林들도 任司에 薦望되길 바란다는 내용으로 玉山書院에 보낸 통문
[내용 및 특징]
내용 및 특징
이 통문은 1785경주서악서원에서 儒錄에 있는 儒林이 적어 任司를 천거하기 어려운 형세이니, 옥산서원에서 任司를 천거하여 서악서원에 薦案을 보내면 이를 圈點하여 선발하겠다는 내용이다. 또한 옥산서원에서 서악서원 임사를 천거하는 일은 향교의 교임을 천거하여 뽑을 때에도 남북을 구분치 않는 것과 같으며, 또한 남북으로 分薦하고 合錄하던 일은 두 서원의 거리가 멀어서 그리한 것이기에 옥산서원에서 남북 유림을 합쳐 천거하는 일은 도리에 어긋나지 않다고 하였다. 이처럼 통문에서 말하는 바는 거리가 멀어서 부득이 廣川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나눠 활동하던 儒林들이 18세기 이래로 향교의 任員을 선발할 때를 제외하고는 각 지역의 서원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운영주체가 불분명하였던 서악서원은 더 이상 儒生들의 출입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중반까지는 여주이씨와 경주손씨 등 경주를 대표하는 가문의 인물들이 서악서원의 任司를 역임하였지만, 이후 거리가 멀어 廣川以北의 유림들은 옥산서원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以南의 유림들은 서악서원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서악서원은 경주최씨를 중심으로 豊川任氏, 谷山韓氏, 慶州李氏, 瑞山柳氏, 慶州金氏, 英陽南氏 등이 연합하여 운영하였지만, 이들도 각 문중별 院祠가 건립되면서 점차 이탈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18세기 이후 새롭게 나타난 新鄕들이 노론계 수령의 지원 하에 서악서원에 참여한 것도 기존 유림들의 이탈을 가속화 한 것으로 짐작된다. 실제, 1700崔震立을 주향하는 龍山書院이 건립되면서 서악서원 운영을 실질적으로 담당하였던 경주최씨들이 대거 이탈하고, 이후 新鄕내지 노론계 유림들이 仁山書院(宋時烈)와 문중원사를 건립하여 그곳의 운영에 집중하는 가운데 서악서원은 자연 유림들의 관심 밖의 대상이 되어갔던 것이다.
이후 서악서원은 몇몇 유림들에 의하여 그 명맥을 이어오던 중 任司를 선출할 여력도 남지 않아 春秋闕享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기에 오래전부터 경주지역을 분할해온 옥산서원에 任司 薦擧를 부탁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통문에 연명한 崔柱一 외 35명을 보면 경주최씨·이씨·손씨·김씨, 영양남씨, 풍천임씨, 新安朱氏, 迎日鄭氏, 서산류씨, 곡산한씨 등으로 경주토성인 4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주해온 성씨들이었다. 최씨 8명, 이씨 10명을 제외한 나머지 성씨는 1~3명만이 연명하고, 院長이나 有司들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 서악서원의 형세가 매우 어려움을 짐작케 한다. 실제 통문에서도 이와 같은 상황을 "薦擧하는 일이 오래도록 폐지되어 廣川以南의 사람 가운데 儒錄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 70~80세 이상된 노인 5~6명에 불과해 천거하는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토로하고 있다.
옥산서악서원은 16세기 중엽에 건립된 이래로 18세기 이전까지 경주지역 사림들의 중심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옥산서원1572년 말에 건립하여 이듬해인 1573년 2월 西岳精舍에 別廟 형태로 봉안되어 있던 회재의 위판을 移安하고, 같은 해 12월 監司金繼輝의 啓達로 賜額을 받았다. 또한 주향자인 회재1610년 東方5賢의 한 분으로 文廟에 종사되자 그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서악서원1563경주부윤李楨과 사림들의 공의에 의하여 仙桃山 아래에 지어졌다. 처음에는 西岳精舍로 불렸는데, 임란이후 중건하여 1623西岳書院으로 사액되었다. 이처럼 서악서원옥산서원이 건립되기 전까지 경주지역 사론을 주도해 갔다. 그러나 옥산서원 건립 후 서악서원보다 먼저 사액이 되고, 이언적이 문묘에 종사됨으로써 이후 안동陶山, 진주德川(山)書院과 함께 영남학파의 3대 서원으로서 경주권 사림사회를 실질적으로 대표하게 되었다.
옥산서악서원은 16세기 중반 경주부의 대표적인 사족들이 공동으로 참여하여 서원운영의 기본 규약이 되는 院規를 같이하고, 院案을 合錄하면서 17세기까지 경주지역의 남북을 대표하면서 향론을 주도해 갔다. 당시 경주부의 대표적인 각 문중들은 여기에 원임, 원생 및 公事員 등으로 참여하면서 이 두 서원을 중심으로 한 향촌사회의 운영에 실질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西岳書院考往錄謄草』(1561~1639)에 의거 원장과 유사를 통계하면 李氏 9인, 金氏 5인, 鄭氏 4인, 韓․吳․郭․崔氏 2인, 孫․白․南․徐․黃․朴氏 1인으로 나타난다. 초창기에는 주로 당시 경주사족을 대표했던 鄭克後, 韓克孝 등이 이 시기 서악서원을 주도하였는데, 孫李兩姓이 크게 성장하기 시작한 17세기부터는 李宜澍, 李宜潛, 孫魯 등이 원장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옥산서원의 경우는 설립초기부터 손이 양성 및 府北 출신의 사림들이 주도하였는데, 이들은 서악옥산을 번갈아 가면서 원임에 참여하고 있었다.
실제로도 당시 양동의 손이양성은 門閥이나 地望에서 여타 가문에 비하여 압도적이었다. 조선시대 향촌사회에 있어서 문벌의 우열은 顯祖 및 문과와 생진과 합격자로 나타나는 과거와 仕宦을 가지고 평가하였다. 이렇게 볼 때 중종이조판서를 역임한 손중돈과 문묘 배향의 영광을 누린 이언적을 배출한 손이 양성은 타 가문에 비해, 우위에 설 수 있었으며, 또한 대․소과 합격자와 仕宦에 있어서도 양 가문이 타 가문을 압도하였다. 조선시대 경주출신 문과급제자는 모두 59명인데 손씨가 8명, 이씨가 29명으로 전체의 절반을 차지했으며, 生進科 출신(文科 제외)은 모두 87명인데 손씨가 11명, 이씨가 24명이었다. 이렇게 볼 때 옥산서원을 중심으로 한 경주권 사림의 실질적인 주도세력은 이들 양 가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서악․옥산서원의 입원생은 백록동서원규의 "司馬(生員․進士) 또는 司馬試의 초시 입격자를 우선으로 한다"는 규정을 적용하였다. 실제 옥산서원의 유생선발에 있어서 먼저 才學之士를 簡選하여 考講을 畢한 후 薦主의 천거를 받아 儒籍에 入錄한다는 엄격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17세기까지 두 서원의 院生으로 경주부 내 전 사족이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대부분이 이 시기 鄕案에 등재된 인사였다. 한편, 17~18세기 옥산서원의 入學記, 儒案, 薦案에 나타난 入院生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입학기에 나오는 30명 중 성씨별로는 洪1, 蔣1, 崔3, 李9, 柳1, 黃1, 陳2, 權4, 金1, 孫1명이 있다. 1669년 儒案에는 陳1, 金6, 楊2, 李25, 孫6, 權11, 吳5, 崔14, 朴1, 黃3, 任5, 鄭4, 郭1, 柳3, 徐5, 申2, 蔣1, 朱2, 韓1, 曺1명이 나온다. 1734년의 新薦案에는 李18, 孫4, 陳1, 權3, 蔣2, 徐1, 黃1, 洪1, 鄭1명이며, 1771년 薦案에는 徐4, 李84, 權24, 崔5, 孫13, 蔣2, 曺1, 辛2, 洪1, 金4, 黃3, 柳3, 鄭2, 南1명으로 나타난다. 주목되는 점은 시대가 내려올수록 李氏의 비중이 커진다는 점이다.
이상에서 보면, 17세기까지 경주유림의 중심은 서악․옥산서원에서, 17세기말~18세기 초에 오면 崔震立 후예들이 그 조상의 영광과 종족적 기반을 갖고 그들의 세거지인 이조에 용산서원을 세워 사액 받음으로써 이후 부남을 대표하면서 풍천임씨, 영양남씨, 谷山韓氏 등과 연계하여 부북의 옥산서원에 맞서 독자적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이처럼 경주지역 사림들은 18세기 이후부터 각 지역별, 문중별, 파계별, 당색별로 그 분립이 확산되어 갔다. 그 결과 경주지역 재지사족들의 향촌지배체제는 당색간, 신분계층(적서)간의 극한 대립으로 향론이 분열되면서 점차 무너져갔다. 그 분열의 대표적 폐단이 서악서원의 사례라 볼 수 있다. 비록 대원군 훼철시에 미훼철 원사로 남게 되어 다시, 부남 유림들의 중심처가 되었지만 과거의 성세와는 많은 차이가 있게 되었다. 또한 용산서원을 비롯한 여타 다른 서원들이 있음에도 옥산서원에 부탁한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옥산서원서악서원이 나눠 추천하는 규약이 있었기 때문이며, 나아가 비록 활동이 미흡하지만 경주를 대표하는 사액서원이었던 서악서원의 위상을 고려한 조처였던 것이다.
자료적 가치
경주의 사림들은 남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부득이 하게 廣川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나눠 각기 옥산서원서악서원에 이름을 올리고 후에 合錄하는 형식을 취하여 이 중 任司를 선발하여 두 서원의 각 종 祭儀와 운영에 참여하였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지역, 문중, 파계, 당색별로 사림들의 분립이 확산되면서 비록 사액서원이었지만, 사림들의 외면으로 서악서원의 운영이 어려워졌다. 주향인 중 최치원의 후손인 경주최씨들이 번성하였지만, 이들도 18세기 초 용산서원 건립과 사액으로 주 활동처를 옮기게 되어, 서악서원은 신향 내지 노론계가 주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도 문중원사와 인산서원 건립으로 서악서원 출입을 단절하게 되어 결국, 유생의 발길이 끊기고 나아가 서원운영을 담당할 任司를 선출하기도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일부 사림들이 당시 가장 번성한 옥산서원에 古規를 근거로 서악서원 任司를 천거해주기를 요청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이 통문은 경주지역 향촌지배세력의 분열과 그로 인한 폐단의 구체적 사례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玉山書院誌』,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영남대출판부, 1992
『龍山書院』, 이수환, 집문당, 2005.
『신라문화』20, 최효식, 동국대신라문화연구소, 2002.
『경주사학』16, 이수환, 경주사학회, 1997.
『조선후기 서원연구』, 이수환, 일조각, 2001.
이병훈,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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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5년 서악서원(西岳書院) 통문(通文)
通文
右文爲通諭事西岳玉山兩院之分薦而合錄者實由於南北稱遠會同最難故其所設規只從使近也非
使南北士林分而二之也不幸岳院薦事擴廢己久廣川以南之人年至七十而名不在儒錄舊儒之見存不過
隆老五六員而己則本院雖欲設行古規誰可主張薦事乎玆故本院今無任司之人至於齋席久擴之境與
非但廣南士林之憫然抑亦一鄕之久事也到今矯捄之策必有 貴院院儒之主薦然後本院更有儒錄
而 先父兄舊規庶可遵行乃者自本院啇議薦出任司於 貴院院儒至於四圈而隨圈隨遞終無共同收
刷之道士林之名錄無托己無可論而其奈 國學之擴任何哉窃伏念一鄕之人固無㝎限於南北則廣南士
林亦玉院士林也本院永無薦事而 貴院獨有薦錄則廣南士類終爲院外之人可乎到此事勢咸以爲
合薦於 貴院實不悖於南北薦合錄之古規故玆以通告望須
僉尊諒此合薦於 貴院後一件膽置于本院而圈出任司使本院無至春秋闕 享之地千萬幸甚
右文通
玉山書院 乙巳正月初四日西岳書院士林 崔柱一
任萬綱
李憲銓
崔達純
南景栻
鄭宗煥
崔柱崑
李憲錫
朱珏
崔瑺
孫儒杰
柳在溵
南景樞
韓國奎
崔柱墩
李復仁
崔璞
李天煥
李基仁
黃升玄
任尙淵
韓國禎
柳在溥
朱光漢
李憲鑰
李復春
李基賢
柳汝轍
李彦奎
鄭宗魯
鄭周彦
崔思健
李翼煥
金應奎
孫采九
崔思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