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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경상도(慶尙道) 청도향교(淸道鄕校) 간행 청도향안정명록(淸道鄕案正名錄)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4+KSM-WZ.1911.4773-20120630.Y124080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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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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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정치/행정-조직/운영-향안
작성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교촌리 48
작성시기 1911
형태사항 크기: 28 X 20
판본: 목활자본, 복사본
장정: 선장
수량: 1책(55면)
판식: 半郭 : 16.2×20.8㎝, 四周單邊, 有界, 8行17字, 內向二葉花紋魚尾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학로 280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학로 280

안내정보

1911년 경상도(慶尙道) 청도향교(淸道鄕校) 간행 청도향안정명록(淸道鄕案正名錄)
1911경상북도(慶尙北道)청도군(淸道郡)청도향교(淸道鄕校)에서 간행한 향안(鄕案)이다. 「청도향안정명록(淸道鄕案正名舊錄)」이라는 제목으로 엮여져 있는데, 17세기 청도 지역의 유향소(留鄕所)에서 활약했던 인사 383명의 성명을 수록하고 있다. 향안은 조선시대 지방자치 행정기구라 할 수 있는 유향소의 임원 명단을 뜻한다. 조선시대 각 고을의 유력한 양반들은 유향소를 중심으로 자치규약을 제정하고, 수령이 있는 관청과 협조 또는 견제해가며 자신들과 고을의 이익을 반영해 나갔었다. 즉, 유향소 운영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해당 고을의 유력한 사족임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를 보장하는 것이 바로 향안이었던 것이다.
1911년에 간행되었으나 본 향안이 작성된 것은 17세기였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전자는 「청도향안정명구록(淸道鄕案正名舊錄)」으로 엮여져 있으며, 후자는 「청도향안정명록」이라는 제목으로 엮여져 있는데, 각각 17세기 전반기와 후반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향안 입록자의 기재 방식은 먼저 관직 및 직역(職域)을 기입하고, 이어 성명과 본관(本貫)을 기재해 놓았다. 본 자료에서 특히 많은 입록자를 배출한 성관으로는 밀양박씨(密陽朴氏), 고성이씨(固城李氏), 경주이씨(慶州李氏), 의흥예씨(義興芮氏), 재령이씨(載寧李氏), 김해김씨(金海金氏) 가문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입록 상황으로 보아 이들 양반 가문에 의해 17세기 당시 청도 지역의 여론이 주도되었음을 추정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광우

상세정보

1911淸道鄕校에서 간행한 향안으로 1599년부터 1700년까지 慶尙道淸道 지역의 留鄕所 鄕員 383명의 명단을 수록
[내용 및 특징]
1911慶尙北道淸道郡淸道鄕校에서 간행한 향안이다. 20세기 초반에 간행되었으나 수록된 인물은 1599년부터 1700년까지 淸道郡 留鄕所에서 활동하였던 鄕員들의 명단을 수록하고 있다. 원래 향안은 조선시대 지방자치 행정기구인 유향소의 구성원 명단으로, 당시 재지사족들은 향안 입록을 배타적으로 운영해 나감으로써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 질서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향안은 17세기 중반 이후 사회,경제적 따른 봉건질서에 붕괴와 複雜多技한 향촌사회의 갈등에 따라 중단되거나 폐치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따라 청도 지역에서도 18세기부터 사실상 향안 작성이 폐치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본 자료는 기존의 전통적인 향안 간행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즉 종전의 향안이 고을 내 사족으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담보하기 위해 작성되었던 것이라면, 1911년에 간행된 본 자료는 해당 입록자의 후손들이 과거 선조들의 향촌 내 위치를 재확인함으로써, 신분제가 붕괴된 20세기 초반 전통적인 재지사족 가문임을 확인함과 동시에 이를 통한 일족 간 결속력 강화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 할 수 있다.
본 자료는 크게 「淸道鄕案正名舊錄」과 「淸道鄕案正名錄」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청도향안정명록」 앞뒤로는 향안 작성 경위와 의의를 언급한 誌를 수록해 놓았다. 향촌 질서의 변화에 따라 각각 ‘舊錄’과 ‘正名錄’이라는 이름으로 향안을 작성하였던 것인데, 본 자료가 엮이면서 예전에 있었던 자료를 가급적 그대로 수록하기 위해 명단이 겹치는 부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를 함께 수록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기재된 양식은 동일한데 먼저 입록자의 관직과 직역 등을 기재하고, 이어 성명과 본관을 수록해 놓았다.
「청도향안정명구록」은 1599년부터 1657년까지 11회에 걸쳐 모두 180명의 명단을 수록하고 있다. 입록자 성명을 먼저 기재 한 뒤 말미에는 입록된 시기와 임원인 座首와 別監의 성명 또는 성씨를 함께 기재해 놓았다. 최초 입록은 萬曆 27년(1599)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1599년은 임진왜란이 종식된 이듬해로 전란 이전의 입록자는 본 자료에서 수록되어 있지 않다. 1541청도의 사족 朴鸞에 의해 제정된 鄕規가 있어 늦어도 16세기 중반 이전에 향안에 작성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전란 이전의 명단을 본 자료에서는 수록하지 않고 있다. 다른 고을과는 달리 자료의 소실로 전란 후 향안 중수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앞선 입록 기록은 1599년으로 23명이 등재되어 있다. 성관별로는 固城李氏 8명, 密陽朴氏 4명, 慶州李氏 3명, 載寧李氏 2명이며, 淸道金氏, 金海金氏, 長淵盧氏, 驪興閔氏, 咸安趙氏, 그리고 본관 미상의 崔氏 각 1명이 확인된다. 좌수와 별감은 1599년에 입록된 朴誠李廷郁으로 나타나 있다. 두 번째 입록은 만력 28년(1600)에 이루어졌다. 이때 밀양박씨 4명과 청도김씨, 김해김씨, 義興芮氏, 고성이씨, 全義李氏, 牙山蔣氏, 慶州崔氏 각 1명 등 모두 11명이 입록된 것으로 확인되며, 좌수와 별감은 각각 李洙박성이다. 세 번째 입록은 만력 37년(1609)으로 밀양박씨 7명, 고성이씨 2명이며, 여흥민씨, 竹山朴氏, 재령이씨, 경주이씨 각 1명으로 모두 13명이 입록되어 있다. 좌수는 이름 없이 崔로만 기재되어 있고, 별감은 李氏가 2명이다. 네 번째 입록은 만력 38년(1610)에 이루어졌으며 의흥예씨 1명, 原州元氏 1명만 입록되어 있다. 좌수는 박씨이고 별감은 예씨와 이씨이다. 다섯 번째 입록은 만력 42년(1614)에 있었는데 밀양박씨 3명, 玄風郭氏 2명과 고성이씨, 夏山張氏 1명, 경주최씨 1명 등 모두 8명이 입록되어 있으며, 좌수는 박씨, 별감은 박씨와 이씨 2명이었다. 여섯 번째 입록은 만력 45년(1617)에 있었으며 김해김씨, 高靈金氏, 岐城潘氏 각 1명씩을 수록하고 있다. 당시 좌수는 이씨, 별감은 2명으로 모두 박씨였다. 일곱 번째 입록은 天啓 7년(1627)에 이루어졌다. 경주이씨 4명, 고성이씨와 밀양박씨 각 3명과 제주고씨 1명 등 총 11명을 수록하고 있다. 좌수는 李廷卓이며, 별감은 崔嶂李漑이다. 여덟 번째 입록은 乙酉年(1645)에 이루어졌는데, 「청도향안정명구록」에서 최대 규모인 50명이 입록되어 있다. 성관별로는 고성이씨 17명, 밀양박씨 16명, 경주이씨와 경주최씨 각 3명, 의흥예씨와 재령이씨 각 2명, 청도김씨, 김해김씨, 義城金氏, 기성반씨, 密陽孫氏, 원주원씨, 전의이씨 각 1명 순이다. 당시 좌수는 李稑, 별감은 李珉朴東貞이 맡고 있었다. 아홉 번째 입록은 辛卯年(1651)에 이루어졌으며, 밀양박씨 5명, 고성이씨 4명, 의흥예씨 2명, 기성반씨와 安東孫氏 각 1명 순으로 모두 13명이 입록되었다. 이때의 좌수는 朴東惟, 별감은 1645년과 마찬가지로 박동정과 이민이었다. 열 번째 입록은 乙未年(1655)에 이루어졌다. 모두 23명이 입록되었는데 밀양박씨 9명, 경주이씨 3명, 의흥예씨 2명과 본관 불명의 孫氏 2명, 현풍곽씨, 청도김씨, 김해김씨, 의성김씨, 원주원씨, 고성이씨, 경주최씨 각 1명 순으로 기재되어 있다. 당시 좌수는 朴東悌, 별감은 金鐵堅李光弼이었다. 마지막 열 한번째 입록은 丁酉年(1657)에 있었는데 고성이씨 8명, 밀양박씨 7명, 현풍곽씨 2명, 청도김씨, 김해김씨, 고령김씨, 전의이씨, 하산장씨 각 1명 순으로 모두 22명을 입록하고 있다. 그리고 이때의 좌수는 朴東老, 별감은 孫樹䉨朴東傅로 나타난다.
이상 「청도향안정명구록」에 등재된 180명 중 「청도향안정명록」의 첫 번째 기록인 辛丑年(1661)년 좌목과 동일하게 입록된 인물은 모두 87명인 것으로 확인된다. 이들은 「청도향안정명구록」의 1627년 좌목부터 확인되는 인물들이다. 한편, 등재 인물의 성관을 순서대로 나열하면 밀양박씨 58명, 고성이씨 46명, 경주이씨 14명, 의흥예씨 8명, 현풍곽씨, 청도김씨, 김해김씨, 재령이씨 각 5명, 기성반씨, 원주원씨, 전의이씨 각 3명 제주고씨, 고령김씨, 의성김씨, 여흥민씨, 하산장씨 각 2명, 장연노씨, 죽산박씨, 밀양손씨, 안동손씨, 아산장씨, 함안조씨 각 1명과 본관불명 성씨 3명으로 확인된다. 성관의 비중으로 보아 청도 지역에서 밀양박씨의 족세가 매우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이 가문은 16세기 이래 청도 지역의 대표적인 사림 가문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입록자의 관직과 직역 등을 살펴보았을 때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단연 幼學이나 시기적으로 비중은 약간씩 차이가 난다. 180명 입록자 중 유학은 90명으로 50%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 비중을 입록 시기별로 나누어 보면 1599년 30%, 1600년 64%, 1609년 23%, 1610년 50%, 1614년 75%, 1617년 25%, 1627년 45%, 1645년 40%, 1651년 62%, 1655년 83%, 1657년 59%이다. 굴곡은 있으나 전반적으로 17세기 중반에 가까워질수록 유학이 비중이 높아지는 것으로 확인된다. 비록 고위관직을 역임한 인물은 좌목에서 확인되지 않지만, 17세기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임란공신에 녹훈되거나 지방관과 무관직을 역임했던 인물들이 입록되어 있으며 명예직과 忠義衛와 같은 병종 등 다양한 관직과 직역 등이 나타났지만, 후기로 갈수록 유학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17세기 전반 중앙정권의 벌열화가 고착화되면서 지방 사림의 중앙 진출이 어려워지던 당시의 정치 상황과 맞물려서 나타난 현상으로 이해된다.
「청도향안정명구록」에 이어 수록된 「청도향안정명록」에는 두 편의 誌가 수록되어 있다. 앞선 誌는 1661년 朴東孝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청도향안정명록」 서두에 수록되어 있으며, 「청도향안정명록」이 작성되는 경위와 의의를 간략히 소개해 놓았다. 찬자인 박동효는 「청도향안정명구록」의 만력 45년(1617) 좌목과 「청도향안정명록」의 辛丑年(1661) 좌목에 수록되어 있는 인물이다. 誌에 따르면 榮川李候가 재임한지 5년이 되던 해 여름, 향중에서 별회를 열어 새로운 입록자들에 대한 좌목을 작성하고 이를 보관하게 되었다고 한다. 榮川李候는 당시 淸道郡守를 역임했던 李燦漢으로 1656년부터 1661년까지 5년간 재임했었다. 그리고 좌목의 구성은 ‘在世之員’의 원칙에 따라 작성했다고 나타나 있다. 「청도향안정명구록」에 입록된 인물 중 1661년 당시 생존하고 있던 자들만 추려 내어 새롭게 좌목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誌 바로 다음에 수록된 신축년(1661)의 좌목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신축년 좌목에는 「청도향안정명구록」과 중복된 인물들이 입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어 誌의 말미에는 당시 좌수였던 李球의 노고로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청도향안정명록」에는 세 가지의 좌목이 있다. 첫 번째 좌목은 신축년의 것으로 「청도향안정명구록」 입록자 중 당시 생존해 있던 인물과 그 사이에 새롭게 입록된 인물을 함께 나열한 것이다. 모두 114명이 입록되어 있는데 이를 성관 별로 나열하면 밀양박씨 48명, 고성이씨 27명, 경주이씨 9명, 의흥예씨 5명, 김해김씨 4명이며, 현풍곽씨, 청도김씨, 경주최씨, 성관 불명의 손씨가 각 3명, 의성김씨, 원주원씨, 전의이씨 각 2명, 고령김씨, 기성반씨, 안동손씨, 하산장씨 각 1명 순이다. 114명 중 「청도향안정명구록」과 중복되어 입록된 인물은 모두 87명이다. 신축년 좌목에 새로 입록된 인물은 27명으로 이를 다시 성관별로 살펴보면 밀양박씨 14명, 고성이씨 7명, 김해김씨 2명, 현풍곽씨, 의흥예씨, 재령이씨, 경주이씨 각 1명으로 나타난다. 밀양박씨의 영향력이 매우 높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축년 좌목 작성 당시의 좌수는 이구, 별감은 朴自章朴衛漢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두 번째 좌목은 癸酉年(1693) 2월 6일 것으로 46명이 입록되어 있다. 성관별로는 밀양박씨 16명, 고성이씨 11명, 김해김씨 4명, 의흥예씨 3명, 현풍곽씨, 고령김씨, 재령이씨 각 2명, 청도김씨, 의성김씨, 안동손씨, 경주이씨, 경주최씨, 본관 불명의 김씨 각 1명으로 나타난다. 당시 좌수는 李瑢, 별감은 芮碩薰朴瑞漢이다. 마지막 세 번째 좌목은 庚辰年(1700) 2월 3일 것으로 53명이 입록되었다. 성관별로는 고성이씨 15명, 밀양박씨 13명, 의흥예씨 7명, 재령이씨 5명, 청도김씨 4명, 김해김씨 2명, 고령김씨, 죽산박씨, 밀양손씨, 안동손씨, 원주원씨, 하산장씨, 본관 불명의 이씨 각 1명으로 나타난다. 당시 좌수는 예석훈, 별감은 李光時로 기재되어 있다.
이상 「청도향안정명록」에 기재된 213명을 다시 성관별로 분류하면 본관 불명 5명을 제외하고 밀양박씨 75명, 고성이씨 53명, 의흥예씨 15명, 김해김씨, 경주이씨 각 10명, 청도김씨, 재령이씨 각 8명, 현풍곽씨 5명, 고령김씨, 경주최씨 각 4명, 의성김씨, 원주원씨 각 3명, 기성반씨, 안동손씨, 전의이씨, 하산장씨 각 2명, 죽산박씨, 밀양손씨 각 1명 순으로 나타난다. 「청도향안정명구록」과 비교하면 밀양박씨와 고성이씨의 비중이 여전히 강함을 알 수 있으며, 김해김씨와 의흥예씨의 비중 또한 전과 비해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난다. 한편 참여 가문의 수는 이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17세기 전반에 입록되었던 제주고씨, 장연노씨, 여흥민씨, 아산장씨, 함안조씨 등 다섯 가문은 「청도향안정명록」에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17세기 후반 청도 지역 재지사족의 족세에 약간의 변화가 생김을 확인 할 수 있다.
「청도향안정명록」 입록자의 관직 및 직역 역시 이전과 마찬가지로 幼學의 점유율이 높게 나타난다. 총 213명 가운데 169명이 유학으로 79%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이를 다시 세분하면 1661년 좌목에 72명으로 63%이고, 1693년과 1700년 좌목에서는 각각 1명을 제외하고 모두 유학으로 98%의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중앙정권의 벌열화가 심화되면서 관직 진출자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며, 17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청도향안정명록」의 말미에는 壬辰(1712) 7월 1일에 작성한 誌가 수록되어 있는데, 찬자인 李光節1693년의 좌목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이광절의 誌에서는 본 향안 작성의 의의가 간략히 언급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향안은 곧 先父老의 이름을 바르게 기록하는 것임을 전제해 놓았다. 그리고 이를 잘 보관하는 것이 그 자제들의 의무라고 하였다. 더구나 지금 풍속이 어지러워져 예전 같지 않기에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더욱 향안의 바른 기록과 보존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 자료의 가장 말미에는 辛亥(1911) 9월 본 자료가 간행되었다는 刊記가 기재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鄕案 작성의 추이와 임진왜란 이후 경상도청도 지역 재지사족들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향안은 조선중기 이후 재지사족들 중심의 향촌지배질서 유지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배타적인 향안 작성을 통해 사족들은 지방자치행정 기구인 留鄕所 운영을 주도해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향안은 임진왜란을 겪는 동안 대부분 소실되고 마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였다. 청도 역시 왜란으로 이전 향안이 소실된 것으로 생각된다. 「청도향안정명구록」과 「청도향안정명록」은 모두 전란 이후에 작성된 것이나, 17세기 이전의 향안 입록자는 수록하지 않고 있다. 전란으로 피폐해진 향촌사회와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를 재확립하기 위해 청도에서도 새로운 향안 작성이 이루어졌으나, 전란으로 유실된 자료를 상고할 수 없기에 본 자료에는 이후의 입록자만 수록한 것이다.
「청도향안정명구록」과 「청도향안정명록」은 각각 17세기 전반기와 후반기 입록자를 수록하고 있어, 이 시기 청도 지역 향촌 주도 세력의 동향을 살펴 볼 수가 있다. 전반적으로 청도는 토성 보다는 이주한 재지사족의 세가 강한 고을이었다. 청도의 토성으로는 申, 金, 白, 李, 曺氏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본 자료에서는 金氏만 확인되고 있다. 입록자도 10여 명에 불과해 본관지에서의 족세 역시 그리 강한 편이 아니었다. 이와는 반대로 밀양박씨, 고성이씨, 경주이씨, 의흥예씨, 재령이씨, 김해김씨 등 이주 성씨의 족세가 강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가문은 17세기 이전 혼인과 복거 등을 통해 청도에 이거한 사족 가문이었는데, 이들이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16세기 전후 士林의 형성과 맥을 같이한다. 김해김씨 출신의 金馹孫은 무오사화 당시 대표적인 사림으로 피화를 당했던 인물이며, 16세기 전반기 활약한 밀양박씨의 朴河淡朴河澄 등도 청도 지역 사림 세력의 형성에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본 향안에 입록된 인물들은 이들의 후손이거나, 혼인 등을 통해 중첩된 인척관계를 맺은 가문으로 16세기 사림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가문 출신인 것이다.
『嶠南誌』,
『大邱史學』26, 申正熙, 大邱史學會, 1984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민음사, 1990
申正熙, 嶺南大學校 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991
『釜大史學』22, 張東杓, 釜山大學校史學會, 1998
이광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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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경상도(慶尙道) 청도향교(淸道鄕校) 간행 청도향안정명록(淸道鄕案正名錄)
淸道鄕案正名錄
淸道鄕案正名舊錄
僉正李白新載寧
習讀朴誠密陽
僉知李礬固城
僉知李礱固城
進士朴光亨密陽
幼學崔泗源
閔參驪興
盧慶濬長淵
都守金克裕淸道
進士金致三金海
幼學趙成麟咸安
僉正朴譚密陽
忠義李洙固城
李潜固城
息城君李雲龍載寧
忠義李濂固城
李澈固城
幼學李廷翰慶州
李廷郁慶州
忠義李濟固城
幼學朴詳密陽
忠義李淑固城
幼學李廷卓慶州
萬曆二十七年【座首朴諴別監李廷郁
幼學金遇錘淸道
縣監朴慶傳密陽
幼學蔣思孝牙山
僉知朴慶胤密陽
幼學崔汝峻慶州
高嶸濟州
朴諴密陽
參奉李璣玉全義
幼學芮夢辰義興
朴馚密陽
同知李湍固城
萬曆二十八年【座首李洙別監朴諴
幼學李景春載寧
參奉朴瑍密陽
同知朴瑄密陽
參奉朴炯竹山
同知朴璨密陽
朴璘密陽
奉事朴珽密陽
幼學李廷翼慶州
閔止孝驪興
縣監朴瑀密陽
僉知李漑固城
參奉朴瑾密陽
忠義李瑺固城
萬曆三十七年【座首崔別監李李】
萬戶元士彪原州
幼學芮廷馧義興
萬曆三十八年【座首朴別監芮李】
幼學郭永鎭玄風
張翼參夏山
郭永錫玄風
奉事朴琡密陽
幼學朴璜密陽
崔嶂慶州
朴珪密陽
禦侮將軍李玹固城
萬曆四十二年【座首朴別監朴李】
內禁衛潘國海岐城
忠義李潭固城
幼學金善慶金海
僉知金尙輝高靈
萬曆四十五年【座首李別監朴朴】
僉知高崙濟州
生員李瓛固城
幼學李稹慶州
李稑慶州
李秤慶州
朴東秀密陽
李穰慶州
忠義李光仁固城
通德郞朴東孝密陽
忠義李頊固城
宣務郞朴東悌密陽
天啓七年【座首李廷卓別監崔嶂李漑
幼學朴希章密陽
僉知李宗明載寧
縣監李儼載寧
幼學崔逈慶州
朴璣密陽
忠義李{王+殿}固城
訓導崔建慶州
幼學金胤先義城
孫績密陽
參奉李重慶全義
僉知朴東徵密陽
幼學潘溶岐城
忠義李瑜固城
萬戶芮用周義興
幼學朴東賢密陽
崔遠慶州
金濈金海
朴東徽密陽
芮撝謙義興
朴東信密陽
朴東老密陽
通德郞朴東欽密陽
監察李琬固城
忠義李光宇固城
幼學朴東維密陽
忠義李琯固城
李琛固城
李珉固城
宣教郞朴東貞密陽
宣務郞朴東溫密陽
參奉李光義固城
從仕郞元斗興原州
幼學金鐵堅淸道
朴東益密陽
忠義李琰固城
李光元固城
李光禮固城
李珩固城
李光弼固城
幼學朴之茂密陽
忠義李球固城
李功固城
幼學朴東卨密陽
李重毅慶州
李尙毅慶州
宣務郞李處毅慶州
承仕郞朴東稷密陽
忠義李璈固城
李珠固城
宣務郞朴東柱密陽
乙酉年【座首李稑別監李珉朴東貞
幼學潘潤岐城
朴東耉密陽
朴東緯密陽
忠義李光軫固城
幼學朴之慶密陽
同知孫千一安東
忠義李瑢固城
李光世固城
幼學朴東傳密陽
芮俊民義興
忠義李光斗固城
幼學朴衛漢密陽
芮碩蕃義興
辛卯年【座首朴東維別監朴東貞李珉
幼學孫樹䉨
僉知金軷淸道
幼學朴乃章密陽
芮愼謙義興
金潝金海
孫錫
僉使金友仁義城
幼學朴自章密陽
崔慶章慶州
朴東章密陽
李恒毅慶州
朴東耋密陽
朴東奭密陽
府使朴始漢密陽
忠義李光星固城
幼學朴東昱密陽
朴寅漢密陽
李惟毅慶州
郭鴻翰苞山
朴屛漢密陽
芮碩薰義興
元萬始原州
李好毅慶州
乙未年【座首朴東悌別監金鐵堅李光弼
幼學金轉淸道
郭鴻習玄風
張克後夏山
金漾金海
郭壽嶔玄風
朴經漢密陽
朴佑漢密陽
忠義李光啓固城
李光國固城
李光復固城
李天耉固城
幼學朴昌漢密陽
朴賔漢密陽
金重夏高靈
忠義李光廷固城
進士朴泰漢密陽
忠義李光謙固城
李光鼎固城
李光晋固城
幼學朴東彥密陽
李祐徵全義
朴瑞漢密陽
丁酉年【座首朴東老別監孫樹䉨朴東傅
滎川李候之莅此邑五載之夏諭于鄕中設別
會新進之擧冊以錦藏之櫃使之題名此實古
今罕有之盛事在世之員旣參於此而曾仙
父老則獨不登錦冊斯豈無有所歉乎座首
君球採察鄕意粧以錦冊歷考前後年月而書
諸名偕藏于櫃其尊重鄕中之道更振今日而
死生咸沐仁候之澤庸有極乎嗚乎休哉
辛丑歲後學朴東孝謹誌
淸道鄕案正名錄
同知孫千一安東
幼學朴璣密陽
李稑慶州
訓導崔建慶州
幼學金胤先義城
李穰慶州
參奉李重慶全義
僉知朴東徵密陽
僉知金軷淸道
幼學潘溶岐城
通德郞朴東孝密陽
幼學崔遠慶州
宣務郞朴東悌密陽
宣務郞郭鴻翰玄風
幼學朴東徽密陽
朴東信密陽
朴東老密陽
通德郞朴東欽密陽
幼學芮愼謙義興
金轉淸道
朴東維密陽
忠義衛李琛固城
幼學李櫓載寧
宣教郞朴東貞密陽
幼學朴宣章密陽
忠義衛李珉固城
宣務郞朴東溫密陽
幼學朴東耉密陽
朴東緯密陽
元斗興原州
參奉李光義固城
幼學金潝金海
金鐵堅淸道
忠義衛李光元固城
忠義衛李光禮固城
幼學郭鴻習玄風
忠義衛李珩固城
幼學朴興章密陽
張克後夏山
朴之茂密陽
孫錫
忠義衛李球固城
忠義衛李璈固城
忠義衛李光軫固城
幼學李處毅慶州
朴之章密陽
朴彌章密陽
僉使金友仁義城
幼學孫樹䉨
朴東耆密陽
朴自章密陽
金漾金海
李重毅慶州
朴東卨密陽
忠義衛李珠固城
幼學李尙毅慶州
宣務郞朴東柱密陽
幼學崔慶章慶州
朴東章密陽
李恒毅慶州
忠義衛李瑢固城
幼學朴東傅密陽
朴東宰密陽
朴東耋密陽
芮俊民義興
忠義衛李光斗固城
府使朴始漢密陽
幼學朴衛漢密陽
忠義衛李光星固城
幼學李惟毅慶州
芮碩蕃義興
朴經漢密陽
朴東昱密陽
朴佑漢密陽
忠義衛李光啓固城
幼學朴屛漢密陽
朴寅漢密陽
芮碩薰義興
元萬始原州
朴昌漢密陽
李好毅慶州
進士朴泰漢密陽
忠義衛李光國固城
忠義衛李光復固城
忠義衛李天耉固城
幼學朴賔漢密陽
忠義衛李光廷固城
幼學金重夏高靈
忠義衛李光鼎固城
忠義衛李光晋固城
幼學朴東彥密陽
李祐徵全義
朴瑞漢密陽
朴之贇密陽
忠義衛李光春固城
幼學芮碩茂義興
李命毅慶州
朴翼漢密陽
忠義衛李徵耉固城
李光泰固城
李光恒固城
幼學朴蓂密陽
承仕郞朴啓漢密陽
幼學金聲徹金海
忠義衛李殷耉固城
幼學朴東毅密陽
忠義衛李斗回固城
幼學金聲達金海
朴新漢密陽
忠義衛李光履固城
幼學李祐徵全義
孫汝伯
朴齊漢密陽
朴東垶密陽
郭壽岑玄風
辛丑四月二十九日【座首李球別監朴自章朴衛漢
朴崇漢密陽
郭壽巘玄風
李汝馧載寧
李光有固城
朴蔓密陽
李光節固城
金聲呂金海
崔時翰慶州
金聲頀金海
李斗赫固城
金峻行
朴隆漢密陽
朴宜漢密陽
孫必達安東
朴之賀密陽
李光翼固城
朴師古密陽
郭壽天玄風
李景川載寧
芮秀百義興
李光文固城
朴起漢密陽
朴之貫密陽
朴文軾密陽
朴太古密陽
李夏耉固城
金聲大金海
朴來漢密陽
芮秀千義興
李培慶州
朴文泰密陽
金南杓高靈
朴心休密陽
朴心一密陽
朴文謙密陽
金漢章金海
朴心傳密陽
李彭耉固城
出身李光時固城
芮碩蔓義興
金碩夏高靈
李光漸固城
李光咸固城
李億耉固城
金夏兼淸道
金應錫義城
癸酉二月六日【座首李瑢別監芮碩薰朴瑞漢
進士朴尙古密陽
幼學李光馨固城
張時傑夏山
朴之賓密陽
李光璧固城
李光奎固城
金聲韻金海
金英粹淸道
金英績淸道
朴世堂竹山
元日省原州
芮秀三義興
朴文弼密陽
朴重漢密陽
李景洙載寧
芮秀萬義興
李震亨載寧
李景元載寧
金兌一淸道
李景杜載寧
芮秀一義興
李景濂載寧
芮秀億義興
潘後泰岐城
朴肇漢密陽
孫碩麟密陽
芮尙彬義興
朴履漢密陽
芮秀九義興
李啇耉固城
李渭耉固城
李翼耉固城
金南健高靈
李義耉固城
朴文漢密陽
朴文升密陽
朴廷實密陽
李漢耉固城
芮秀五義興
金震一淸道
李斗耉固城
李受耉固城
朴文源密陽
朴樞漢密陽
金世章金海
李儁耉固城
朴文性密陽
李挺百
李望耉固城
李彥耉固城
李德耉固城
朴廷筍密陽
李台耉固城
庚辰二月三日【座首芮碩薰別監李光時
鄕案乃先父老正名之錄也粧以錦繡藏
諸櫃中則尊閣之擧誠爲至矣爲其子弟者
護之當如氈裘愛之亦如圭璧而不幸淳風
一慤鄕習不古偸窃汚衊之變曾出不虞吾
南士禮義之教到此掃矣寧不塞心况且藏
守失所反歸不敬之地其於後生崇奉之道
殊甚不安光節之平居扼腕者是耳忝居憲
席以來首謀典守之宜玆用拈閱櫃藏精曩
新舊名錄留于別處未知僉君子謂之如何
顒竢輿
議悚仄亡
壬辰七月一日後學李光節謹誌
辛亥九月日印刊
淸道鄕案正名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