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및 특징]
조선말기 慶尙道比安縣의 유림들이 鄕約稧를 결성한 뒤 계원들의 명단과 관련 자료들을 엮어 놓은 것이다. 이 자료는 다른 향약 자료와 더불어 比安鄕校에 비치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유실된 상태이다. ‘鄕約稧案’이라는 표제가 있으며 1894년의 鄕約稧帖序, 그리고 1903년의 것으로 여겨지는 節目, 1903년 座目 순으로 엮여져 있다.
가장 서두에 있는 鄕約稧帖序는 본 자료에 수록된 좌목의 서문이다. 1894년 正月 비안현 출신의 유학자 禹熙容이 작성한 것이다. 여기에는 향약계가 결성되는 경위와 과정, 그리고 결성의 목적과 의의 등이 간략히 언급되어 있다. 서문에서는 먼저 藍田의 呂氏가 처음으로 條例를 만들어 향약이 시작되었으며, 朱子가 이를 증손했다고 한다. 北宋의 呂氏兄弟에 의해 향약이 만들어졌고, 南宋의 朱子가 당대 상황에 맞추어 가감하여 이른바 朱子增損呂氏鄕約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풍속이 선하게 되었으니, 이에 우리나라 조정에서도 여러 차례 백성들에게 향약 실시를 반시하여 효과를 보았다고 한다. 우리 嶠南이 이른바 ‘鄒魯之鄕’으로 많은 儒賢이 배출되었고, 禮義가 이루어진 것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근래 풍속이 해이해짐에 따라 향약의 규례도 폐지되는 지경에 이르는데, 이때 마침 李□永(1837~1907)이 慶尙道觀察使로 부임하여 約規를 새롭게 정하고, 鄕飮酒禮를 경상도 列邑에 奉行케 했다고 한다. 이헌영은 경상도관찰사로 부임하던 1891년 경상도 각 고을에 『鄕里約束』을 배포하여 향약 시행을 적극적으로 권장한 인물이다. 『향리약속』에서 언급하고 있는 향약 조직은 고을의 하부행정단위인 面里 조직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향약을 매개로 한 지방관의 원활한 지방 통치 의도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실재 비안현에서도 이헌영의 권유에 의해 지역 유림이 중심이 되어 1891년 향약이 제정되고 이와 관련된 제 규정을 엮은 『鄕里約法』이 편찬되기도 하였다. 鄕約稧의 결성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屛山, 즉 비안현에서도 유림들이 뜻을 모아 향약계를 결성하고, 향약의 규약을 만들자는 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아울러 이때 향약계의 자금도 모으게 되었다고 한다. 31員이 각기 1緡銅을 내어 이것을 取殖해서 자금을 불리고, 봄과 가을 讀約 때의 비용으로 사용하기로 했다며 향약계 결성 과정을 간략히 언급하였다. 이어 계원과 그 후손들에게 향약의 전통을 계승하여 멈추지 말 것을 당부하며 서문을 마치고 있다.
서문 다음의 節目은 모두 8개조로 향약계의 기본 운영 지침이다. 일곱 번째 조항에 "지금 좌목을 수정한 후"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바로 뒤에 1903년의 修正 座目이 수록된 것으로 보아 우희용에 의해 서문이 작성되었던 1894년이 아니라 1903년에 제정된 절목으로 생각된다. 절목의 대략은 다음과 같다. 一, 稧는 향약으로써 이름을 삼았지만 실상 程子의 것을 취한 것이다. 반드시 뜻이 지향하는 바와 향배를 보고 입록을 허락한다. 一, 每員에게 각기 錢文 1緡씩 수합하여 이자를 놓아 각종 제용으로 쓴다. 一, 約法은 여씨의 4조목을 쓰며, 여러 先儒들의 것을 참작하되 마땅히 별도로 책을 베껴 둔다. 一, 두 개의 장부를 두되 선행은 善籍에 과실은 過籍에 기재하여 勸懲하는 뜻을 보여준다. 一, 나이가 實年인 자를 約正으로 擇望하며 또한 부지런하고 공정한 자 2인으로 약정을 보좌하는 直月로 삼는다. 직월은 재물을 담당하며 향약의 사람 가운데 돌아가며 맡는다. 一, 約中의 사람으로 약조를 3회 어기면 約會에서 직접 벌을 내리나, 끝내 불복하면 절교한다. 一, 지금 좌목을 수정한 후에 입록하기를 원하는 約員이 있어도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一, 稧會의 일자는 매년 上巳日로 정한다.
향약계의 계원 명단을 수록한 좌목은 1903년 3월에 수정된 것으로 명기되어 있다. 이를 보아 본 자료도 이때 엮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좌목에는 모두 74명이 입록되어 있는데 직역, 성명, 字, 출생 간지, 본관이 순서대로 수록되어 있다. 직역은 進士가 2명이고 나머지는 모두 幼學이다. 사망자의 경우 ‘仙’이라고 표시하였는데 열 군데에서 확인된다. 사망자 확인은 좌목 작성 후 어느 시점에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입록자 74명의 성관을 열거하면 順天張氏, 善山金氏, 陽城李氏, 屛山朴氏, 咸昌金氏, 延日鄭氏, 草溪卞氏, 密陽朴氏, 金海金氏, 丹陽禹氏, 慶州金氏, 牛峯李氏, 楊根金氏, 星山李氏 순으로 비중이 높다. 『比安邑誌』에 따르면 비안현의 주요 성씨로 토성인 比安朴氏(屛山朴氏)를 비롯하여 密陽朴氏, 草溪卞氏, 順天張氏, 一善金氏(善山金氏), 延日鄭氏, 陽城李氏, 丹陽禹氏 등을 기재하고 있어, 향약계 좌목의 성관별 비중과 거의 일치한다. 한편, 향약계안과 더불어 비안향교에는 鄕案(1623년 작성)이 함께 보관되다 유실되었는데, 이 향안에 기재된 성관의 비중도 이와 비슷하게 나타난다. 즉 17세기 이후 비안현의 향권을 주도하던 재지사족의 후손들에 의해 향약계안이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말기 향약 시행의 추이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향약은 재지사족의 향촌자치 규약으로, 조선중기 이후 자치행정기구인 留鄕所의 鄕規와 접목되어 실시되었다. 재지사족들은 이를 매개로 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에 대한 성리학적 명분을 보장받고, 그 지위를 유지시켜 나가려 했던 것이다. 사족 주도로 운영되던 향약은 조선후기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른 봉건질서에 붕괴와 複雜多技한 향촌사회의 사회적 갈등에 따라 대부분 지역에서 중단되었으며, 오히려 지방관이 원활한 통치를 위해 향약을 주도하는 경우가 많이 등장하였다. 1891년 경상도관찰사였던 이헌영도 경상도 백성들의 교화와 원활한 통치를 목적으로 향약을 제정하여 각 고을에 그 시행을 권장하게 되었다.
이에 경상도 비안현에서도 1891년 이후 향약 제정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조선중기 이후 비안현의 향권을 주도하던 유력한 재지사족의 후손들 주도로, 향약 준수와 상호 간의 결속력 강화를 위한 鄕約稧를 결성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향약계는 조선중기 때의 향약처럼 一鄕을 규제할 수 있는 규약이 아니었다. 이때는 사실상 봉건질서가 붕괴된 시점으로 향약계 결성을 통해 고을의 유력한 전통적 鄕班들은 다른 신분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다. 즉 향약계는 조선말기 비안현의 전통적인 재지사족들이 상호 간 결속력 강화를 통해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결성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