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慶尙道慶州府良佐洞에서 실시되었던 洞約의 洞員 명부이다. 양좌동은 조선중기 이래 慶州孫氏와 驪州李氏 두 가문이 정착한 후, 현재까지 그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우리나라 대표 전통 촌락이다. 경주손씨와 여주이씨 두 가문은 일찍이 자신들이 거주하고 있는 양좌동에서 동리 구성원 간 상부상조와 결속력 강화를 위해 각종 공동체 조직을 결성하였는데, 동약 역시 그 중 하나이다. 양좌동에서 동약이 언제부터 시행되었고,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양좌동에 보존되어 있는 촌락 운영 관련 다른 자료로 보아 늦어도 17세기 초반부터는 동약이 시행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開墾, 灌漑, 禁葬 및 신분 또는 계층 간 질서 유지 등이 주된 운영 목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리에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 양좌동의 동원들이 공동으로 대응함과 동시에, 향약의 제 규범을 동약에 적용시킴으로써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를 유지하는데 활용했던 것이다. 한편, 동약과 병행하여 양좌동에서는 이와 성격을 달리하는 香約이라는 공동체 조직이 실시되고 있었다. 香約은 사족인 上人과 더불어 하층민인 下人, 그리고 庶孼까지도 참여하는 공동체 조직이었다. 또한 香約은 동약과는 달리 葬禮와 喪禮 때의 상호부조가 주된 운영 목적이었다. 지금까지 양좌동에는 17~18세기에 작성된 동안 10여 종이 전해지고 있다. 본 동안은 그 중에서도 1769년에 작성된 것이다.
양좌동에서 작성된 여러 편의 동안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嫡庶를 엄격히 구분해 놓았다는 것이다. 본 동안 역시 엄격한 적서의 구분이 이루어진 채 작성되었다. 적손 계열의 사족들이 동약을 주도하였으나, 같은 혈손이었던 양좌동의 서손들도 동약에 참여시켰던 것이며, 이들을 같은 동안에 수록하였다. 비록 공동체 구성원이었지만 양좌동의 적손들은 동안 작성 방식의 차이를 둠으로써 서손들과 신분 관계를 명확히 하려 한 것이다. 이에 따라 동안의 좌목은 적손을 먼저 기재한 후 말미에 서손을 기재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울러 서손은 적손에 비해 한 줄 내려 기재하였다. 또한 서손은 성명만 기재하였으나 적손은 字와 출생 간지를 세주로 함께 기재해 놓았다. 좌목에 수록된 적손에게 좀 더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세주로 이력을 조금 더 부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본 동안에는 모두 316명의 동원이 나이 순서대로 기재되어 있다. 좌목 가장 서두의 李德祉는 甲子(1684) 생으로 동안 작성 당시 좌목의 최연장자인 86세였다. 반면, 적손 계열 좌목 가장 말미에는 최연소자인 孫鼎實이 기재되어 있다. 孫鼎實은 癸酉(1753) 생으로 동안 작성 당시 17세였다. 서손의 기재 순서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적손과 마찬가지로 나이 순서대로 기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나이 순서대로 좌목을 작성하는 것은 조직 내 老少를 구분하겠다는 의도이다. 즉, 양좌동에서는 동안 작성을 통해 적서 간의 구분과 더불어 老少의 구분도 엄격히 하여 향촌질서를 간접적으로 명시화하려 했던 것이다.
입록자 가운데 老職 등 고령으로 인한 명예직 수여자와 과거 급제자는 출생 간지 아래에 세주로 급제 간지와 과거 종류 및 入仕 유무를 부기해 놓았다. 그 기록 중 상당수는 동안 작성이후 추가 기재된 것이다. 이 중에서 大耋, 즉 고령으로 同中樞, 僉中樞, 그리고 老職으로 僉樞 등의 명예직을 부여 받은 인물은 좌목 가장 서두에 수록되어 있는 李德祉를 비롯하여 모두 9명이다. 가장 서두의 李德祉와 더불어 순서대로 기재되어 있는 李愼中, 孫三杰, 孫應杰도 여기에 해당된다. 庚申年에 大耋로 僉中樞가 된 孫新杰은 9명 중 유일하게 서손이었다.
과거시험 급제자는 모두 15명이다. 이 중 文科 급제자는 2명으로 李憲默이 庚午年(1750) 文科에, 李鼎揆가 戊子年(1768) 문과에 급제한 것으로 나타난다. 나머지 13명은 모두 司馬試 합격자인데, 이씨 8명, 손씨 5명이다. 과거 급제자 중 入仕 경력이 있는 인물은 4명으로 모두 이씨이다. 李範中이 辛酉年(1741) 사마시 급제 후 丙寅年(1746) 入仕, 李憲默이 경오년 문과 급제후 入仕, 李憲洛이 甲子年(1744) 사마시 급제 후 庚辰年(1760) 入仕, 李憲儒가 癸未年(1763) 사마시 급제 후 甲申年(1764) 入仕, 李鼎揆가 무자년 문과 급제 후 入仕 했음이 기재되어 있다. 과거 급제 사실과 入仕 유무의 표기 또한, 동안 내 적손 계열에 대하여 권위를 부여하겠다는 의도가 일정부분 반영된 것이다. 한편, 동안 말미에 기재된 좌목 작성 날짜 ‘己丑三月二十九日’ 아래에는 당시의 洞任 성씨와 그들의 署押이 기재되어 있다. 당시 동임은 이씨 2명인 것으로 나타난다.
본 동안에 입록된 인물은 모두 316명인데, 이는 지금까지 확인되는 17~18세기의 양좌동 동안 가운데 가장 많은 입록 규모이다. 대체로 17세기의 동안은 100명 미만의 동원이 수록되어 있으나, 점차 양좌동의 외향적 규모가 커짐에 따라 1769년의 동안에는 가장 많은 316명이 수록된 것이다. 그리고 본 동안은 현존하는 양좌동 동안 중 가장 늦은 시기에 작성된 것이기도 하다. 1769년 입록자 316명을 성씨별로 분류하면 孫三杰 이하 孫氏 150명, 李德祉 이하 李氏 144명, 崔鳳瑞 이하 崔氏 10명, 鄭涑 이하 鄭氏 5명, 金重采 이하 金氏 4명, 吳氏 1명(吳泰國), 曹氏 1명(曹命龍), 黃氏(黃吉徵) 1명 순이다. 비율별로는 손씨 47%, 이씨 46%, 나머지 6개 성씨가 22명으로 7%를 점유하고 있다. 단연 양좌동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경주손씨와 여주이씨의 비중이 높게 나타난다. 한편, 본 동안의 서손 좌목 가운데 削去된 기록이 두 군데 확인되나, 그 까닭은 밝히지 않고 있다.
입록자를 적손과 서손별로 구분하면 적손이 240명으로 76%, 서손이 76명으로 24%이다. 18세기 중반 이전에 작성되었던 다른 동안에 비해 적손과 서손의 비율 차이가 크게 벌어지고 있음이 나타난다. 이를 다시 성씨별로 분류하면 적손은 이씨 137명, 손씨 103명으로 각각 57%와 43%이다. 서손은 손씨 47명, 최씨 10명, 이씨 7명, 정씨 5명, 김씨 4명, 오씨, 조씨, 황씨 각 1명 순이며, 이들의 입록 비율은 손씨 62%, 이씨 9%, 기타 3개 성씨가 29%인 것으로 나타난다. 전체 입록자 가운데 손씨가 가장 많이 확인되나, 실제 동약을 주도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적손은 이씨 입록자가 더욱 많다. 반대로 서손의 경우 이씨 비율이 매우 낮게 나타난다. 그리고 손씨와 이씨를 제외한 나머지 6개 성씨는 모두 서손으로 수록되어 있음이 주목된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동약 시행의 추이와 재지사족의 향촌지배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16세기 이후 재지사족들은 성리학적 생활규범이 적용되어 있는 향약을 향촌사회에 보급해 나갔다. 그중에서도 동약은 재지사족들이 거주하며 실질적인 지배력이 미치는 동리에서 시행되던 향약이다. 조선중기 이래 사족들이 거주하는 촌락의 구성원이 부계 중심의 혈족으로 고착됨에 따라, 동약 구성원 역시 단일 성씨의 혈족 위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이러한 동약을 시행함으로써 상부상조를 통해 동리에 거주하는 일족 간 결속력을 강화하기도 했다. 또한 재지사족들은 향약의 생활규범이 적용되어 있는 동약을 통해 그들 중심의 향촌지배질서에 대한 성리학적 명분을 제공받으려 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반촌인 양좌동에서도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경주손씨와 여주이씨 두 가문도 이러한 목적 하에 본 동약을 시행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족들은 동약 구성원 명부인 洞案을 작성함으로써 일족 간의 결속력을 명시화하고 동리 내에서의 지위를 표방해 놓기도 하였다.
양좌동에서 작성된 동안의 가장 큰 특징은 적손과 서손을 동일 좌목에 기재하되, 기재 방식을 달리 함으로써 嫡庶의 구분을 엄격히 해 놓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재 방식은 양좌동에서 작성된 17~18세기의 다른 동안에서도 확인되는 방식이다. 적서 모두 양좌동에 거주하며 생활권을 같이하기에 일족 간 결속력 강화를 위해 함께 동약에 참여시키지만, 동안의 기재 방식을 달리함으로써 신분 간 구분을 엄격히 해 놓았다. 즉, 사족과 비사족 간의 향촌질서를 동안을 통해 간접적으로 명시화 한 것이다. 조선후기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 사족 중심의 향촌질서를 더욱 공고히 하겠다는 적손계열 사족들의 의도로 이해 할 수 있다.
한편 본 동안에서 가장 많은 입록자를 배출한 성씨는 손씨이다. 손씨는 이씨에 비해 근소한 차이로 가장 많은 입록자를 수록하였다. 그러나 정작 동약을 주도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적손 입록자는 이씨가 훨씬 많이 수록되어 있다. 이는 양좌동 내에서 이씨의 族勢가 상대적으로 손씨에 비해 높았음을 의미한다. 실제 양좌동의 여주이씨는 조선후기 경상도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 사족으로 성장한 가문이다. 이러한 두 가문 간의 族勢 차이는 동안에 기재되어 있는 과거 급제자의 비중에서도 확인된다.
그리고 동안 입록 자 중 적손에 수록된 자는 모두 손씨와 이씨이다. 반면, 두 성씨를 제외한 타성은 전원 서손으로 확인된다. 18세기 초반까지 작성된 동안에는 蔣氏, 朴氏, 申氏 등이 비록 비중은 적으나 적손으로 수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본 동안에서와 같이 적손은 모두 손씨와 이씨로 채워지게 된다. 이는 17세기 이후 성리학적 예제가 정착함에 따라 양좌동이 경주손씨와 여주이씨 부계 중심의 집성촌으로 고착화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