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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9년 경주부(慶州府) 양좌동(良佐洞) 동안(洞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4+KSM-WZ.1769.4713-20120630.Y1240606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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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계문서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작성시기 1769
형태사항 크기: 38 X 28
판본: 필사본, 복사본
장정: 선장
수량: 1책(46면)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양동 경주손씨 서백당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학로 280

안내정보

1769년 경주부(慶州府) 양좌동(良佐洞) 동안(洞案)
지금의 경상북도(慶尙北道)경주시(慶州市)에 위치한 양동(良洞)마을에서 실시되었던 동약(洞約)의 구성원 명부이다. 이 마을은 조선중기에 형성된 양반 집성촌으로, 일명 양좌동(良佐洞)이라고도 부른다. 지금까지 경주손씨(慶州孫氏)와 여주이씨(驪州李氏) 두 가문이 세거해 오고 있으며, 양반 전통마을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우리나라 대표 전통 촌락이다. 경주손씨와 여주이씨 두 가문은 조선중기 이래 동리 구성원의 결속력 강화를 위한 각종 공동체 조직을 운영해 왔었다. 동약 역시 이러한 의도로 결성된 공동체 조직이다. 동약은 동리 단위로 시행되었던 향약을 지칭하는 것으로, 조선시대 양반들은 성리학적 생활규범이 반영된 동약을 거주지 일대에 시행함으로써, 상부상조를 통한 구성원 간 결속력 강화와 더불어 양반 중심의 향촌지배질서 확립에 대한 성리학적 명분을 제공받으려 했다. 동약에 제정되어 있는 생활규범의 운영을 양반들이 주도함으로써, 스스로 올바른 생활 윤리를 실천하고 권장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이 규정을 통해 동리의 하층민을 통제해 나가기도 했던 것이다. 양동마을에서 실시된 동약도 이러한 의도에서 시행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구성원 명부인 동안이 작성된 것이다.
현재까지 양동마을에는 17~18세기 작성된 동안 10여 종 전해지고 있다. 그 중에서 본 자료는 1769년에 작성된 동안으로, 모두 316명을 수록하였다. 여기에 수록되어 있는 인물들을 성씨별로 나열하면 손씨(孫氏) 150명, 이씨(李氏), 최씨(崔氏) 10명, 정씨(鄭氏) 5명, 김씨(金氏) 4명, 오씨(吳氏), 조씨(曹氏), 황씨(黃氏) 각 1명 순이다. 양동마을에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는 경주손씨와 여주이씨의 비율이 단연 높게 나타난다. 이러한 양동마을 동안의 가장 큰 특징은 적손(嫡孫)과 서손(庶孫)을 엄격히 구분해 놓은 기재 방식이다. 적손을 먼저 나이 순서대로 기재한 후, 이어서 서손을 한 줄 내려 후미에 기재하여 적손과 서손을 구별해 놓은 것이다. 그리고 적손에게만은 출생 연도와 자(字), 과거 급제 기록도 기재하였다. 비록 한 혈손이지만 양동마을 내에서 양반과 서얼에 대한 신분적 구분을 동안을 통해 명확히 명시화 하여, 적손들이 전통적인 양반임을 표방하려 한 것이다.
이광우,이수환

상세정보

1769慶尙道慶州府良佐洞에서 실시되었던 洞約의 洞員 명부로 총 316명을 수록
癸未七月日 洞案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慶尙道慶州府良佐洞에서 실시되었던 洞約의 洞員 명부이다. 양좌동은 조선중기 이래 慶州孫氏와 驪州李氏 두 가문이 정착한 후, 현재까지 그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우리나라 대표 전통 촌락이다. 경주손씨와 여주이씨 두 가문은 일찍이 자신들이 거주하고 있는 양좌동에서 동리 구성원 간 상부상조와 결속력 강화를 위해 각종 공동체 조직을 결성하였는데, 동약 역시 그 중 하나이다. 양좌동에서 동약이 언제부터 시행되었고,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양좌동에 보존되어 있는 촌락 운영 관련 다른 자료로 보아 늦어도 17세기 초반부터는 동약이 시행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開墾, 灌漑, 禁葬 및 신분 또는 계층 간 질서 유지 등이 주된 운영 목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리에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 양좌동의 동원들이 공동으로 대응함과 동시에, 향약의 제 규범을 동약에 적용시킴으로써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를 유지하는데 활용했던 것이다. 한편, 동약과 병행하여 양좌동에서는 이와 성격을 달리하는 香約이라는 공동체 조직이 실시되고 있었다. 香約은 사족인 上人과 더불어 하층민인 下人, 그리고 庶孼까지도 참여하는 공동체 조직이었다. 또한 香約은 동약과는 달리 葬禮와 喪禮 때의 상호부조가 주된 운영 목적이었다. 지금까지 양좌동에는 17~18세기에 작성된 동안 10여 종이 전해지고 있다. 본 동안은 그 중에서도 1769년에 작성된 것이다.
양좌동에서 작성된 여러 편의 동안에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嫡庶를 엄격히 구분해 놓았다는 것이다. 본 동안 역시 엄격한 적서의 구분이 이루어진 채 작성되었다. 적손 계열의 사족들이 동약을 주도하였으나, 같은 혈손이었던 양좌동의 서손들도 동약에 참여시켰던 것이며, 이들을 같은 동안에 수록하였다. 비록 공동체 구성원이었지만 양좌동의 적손들은 동안 작성 방식의 차이를 둠으로써 서손들과 신분 관계를 명확히 하려 한 것이다. 이에 따라 동안의 좌목은 적손을 먼저 기재한 후 말미에 서손을 기재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울러 서손은 적손에 비해 한 줄 내려 기재하였다. 또한 서손은 성명만 기재하였으나 적손은 字와 출생 간지를 세주로 함께 기재해 놓았다. 좌목에 수록된 적손에게 좀 더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세주로 이력을 조금 더 부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본 동안에는 모두 316명의 동원이 나이 순서대로 기재되어 있다. 좌목 가장 서두의 李德祉는 甲子(1684) 생으로 동안 작성 당시 좌목의 최연장자인 86세였다. 반면, 적손 계열 좌목 가장 말미에는 최연소자인 孫鼎實이 기재되어 있다. 孫鼎實은 癸酉(1753) 생으로 동안 작성 당시 17세였다. 서손의 기재 순서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적손과 마찬가지로 나이 순서대로 기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나이 순서대로 좌목을 작성하는 것은 조직 내 老少를 구분하겠다는 의도이다. 즉, 양좌동에서는 동안 작성을 통해 적서 간의 구분과 더불어 老少의 구분도 엄격히 하여 향촌질서를 간접적으로 명시화하려 했던 것이다.
입록자 가운데 老職 등 고령으로 인한 명예직 수여자와 과거 급제자는 출생 간지 아래에 세주로 급제 간지와 과거 종류 및 入仕 유무를 부기해 놓았다. 그 기록 중 상당수는 동안 작성이후 추가 기재된 것이다. 이 중에서 大耋, 즉 고령으로 同中樞, 僉中樞, 그리고 老職으로 僉樞 등의 명예직을 부여 받은 인물은 좌목 가장 서두에 수록되어 있는 李德祉를 비롯하여 모두 9명이다. 가장 서두의 李德祉와 더불어 순서대로 기재되어 있는 李愼中, 孫三杰, 孫應杰도 여기에 해당된다. 庚申年에 大耋로 僉中樞가 된 孫新杰은 9명 중 유일하게 서손이었다.
과거시험 급제자는 모두 15명이다. 이 중 文科 급제자는 2명으로 李憲默이 庚午年(1750) 文科에, 李鼎揆가 戊子年(1768) 문과에 급제한 것으로 나타난다. 나머지 13명은 모두 司馬試 합격자인데, 이씨 8명, 손씨 5명이다. 과거 급제자 중 入仕 경력이 있는 인물은 4명으로 모두 이씨이다. 李範中이 辛酉年(1741) 사마시 급제 후 丙寅年(1746) 入仕, 李憲默이 경오년 문과 급제후 入仕, 李憲洛이 甲子年(1744) 사마시 급제 후 庚辰年(1760) 入仕, 李憲儒가 癸未年(1763) 사마시 급제 후 甲申年(1764) 入仕, 李鼎揆가 무자년 문과 급제 후 入仕 했음이 기재되어 있다. 과거 급제 사실과 入仕 유무의 표기 또한, 동안 내 적손 계열에 대하여 권위를 부여하겠다는 의도가 일정부분 반영된 것이다. 한편, 동안 말미에 기재된 좌목 작성 날짜 ‘己丑三月二十九日’ 아래에는 당시의 洞任 성씨와 그들의 署押이 기재되어 있다. 당시 동임은 이씨 2명인 것으로 나타난다.
본 동안에 입록된 인물은 모두 316명인데, 이는 지금까지 확인되는 17~18세기의 양좌동 동안 가운데 가장 많은 입록 규모이다. 대체로 17세기의 동안은 100명 미만의 동원이 수록되어 있으나, 점차 양좌동의 외향적 규모가 커짐에 따라 1769년의 동안에는 가장 많은 316명이 수록된 것이다. 그리고 본 동안은 현존하는 양좌동 동안 중 가장 늦은 시기에 작성된 것이기도 하다. 1769년 입록자 316명을 성씨별로 분류하면 孫三杰 이하 孫氏 150명, 李德祉 이하 李氏 144명, 崔鳳瑞 이하 崔氏 10명, 鄭涑 이하 鄭氏 5명, 金重采 이하 金氏 4명, 吳氏 1명(吳泰國), 曹氏 1명(曹命龍), 黃氏(黃吉徵) 1명 순이다. 비율별로는 손씨 47%, 이씨 46%, 나머지 6개 성씨가 22명으로 7%를 점유하고 있다. 단연 양좌동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경주손씨와 여주이씨의 비중이 높게 나타난다. 한편, 본 동안의 서손 좌목 가운데 削去된 기록이 두 군데 확인되나, 그 까닭은 밝히지 않고 있다.
입록자를 적손과 서손별로 구분하면 적손이 240명으로 76%, 서손이 76명으로 24%이다. 18세기 중반 이전에 작성되었던 다른 동안에 비해 적손과 서손의 비율 차이가 크게 벌어지고 있음이 나타난다. 이를 다시 성씨별로 분류하면 적손은 이씨 137명, 손씨 103명으로 각각 57%와 43%이다. 서손은 손씨 47명, 최씨 10명, 이씨 7명, 정씨 5명, 김씨 4명, 오씨, 조씨, 황씨 각 1명 순이며, 이들의 입록 비율은 손씨 62%, 이씨 9%, 기타 3개 성씨가 29%인 것으로 나타난다. 전체 입록자 가운데 손씨가 가장 많이 확인되나, 실제 동약을 주도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적손은 이씨 입록자가 더욱 많다. 반대로 서손의 경우 이씨 비율이 매우 낮게 나타난다. 그리고 손씨와 이씨를 제외한 나머지 6개 성씨는 모두 서손으로 수록되어 있음이 주목된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동약 시행의 추이와 재지사족의 향촌지배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16세기 이후 재지사족들은 성리학적 생활규범이 적용되어 있는 향약을 향촌사회에 보급해 나갔다. 그중에서도 동약은 재지사족들이 거주하며 실질적인 지배력이 미치는 동리에서 시행되던 향약이다. 조선중기 이래 사족들이 거주하는 촌락의 구성원이 부계 중심의 혈족으로 고착됨에 따라, 동약 구성원 역시 단일 성씨의 혈족 위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이러한 동약을 시행함으로써 상부상조를 통해 동리에 거주하는 일족 간 결속력을 강화하기도 했다. 또한 재지사족들은 향약의 생활규범이 적용되어 있는 동약을 통해 그들 중심의 향촌지배질서에 대한 성리학적 명분을 제공받으려 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반촌인 양좌동에서도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경주손씨와 여주이씨 두 가문도 이러한 목적 하에 본 동약을 시행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족들은 동약 구성원 명부인 洞案을 작성함으로써 일족 간의 결속력을 명시화하고 동리 내에서의 지위를 표방해 놓기도 하였다.
양좌동에서 작성된 동안의 가장 큰 특징은 적손과 서손을 동일 좌목에 기재하되, 기재 방식을 달리 함으로써 嫡庶의 구분을 엄격히 해 놓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재 방식은 양좌동에서 작성된 17~18세기의 다른 동안에서도 확인되는 방식이다. 적서 모두 양좌동에 거주하며 생활권을 같이하기에 일족 간 결속력 강화를 위해 함께 동약에 참여시키지만, 동안의 기재 방식을 달리함으로써 신분 간 구분을 엄격히 해 놓았다. 즉, 사족과 비사족 간의 향촌질서를 동안을 통해 간접적으로 명시화 한 것이다. 조선후기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 사족 중심의 향촌질서를 더욱 공고히 하겠다는 적손계열 사족들의 의도로 이해 할 수 있다.
한편 본 동안에서 가장 많은 입록자를 배출한 성씨는 손씨이다. 손씨는 이씨에 비해 근소한 차이로 가장 많은 입록자를 수록하였다. 그러나 정작 동약을 주도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적손 입록자는 이씨가 훨씬 많이 수록되어 있다. 이는 양좌동 내에서 이씨의 族勢가 상대적으로 손씨에 비해 높았음을 의미한다. 실제 양좌동의 여주이씨는 조선후기 경상도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 사족으로 성장한 가문이다. 이러한 두 가문 간의 族勢 차이는 동안에 기재되어 있는 과거 급제자의 비중에서도 확인된다.
그리고 동안 입록 자 중 적손에 수록된 자는 모두 손씨와 이씨이다. 반면, 두 성씨를 제외한 타성은 전원 서손으로 확인된다. 18세기 초반까지 작성된 동안에는 蔣氏, 朴氏, 申氏 등이 비록 비중은 적으나 적손으로 수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본 동안에서와 같이 적손은 모두 손씨와 이씨로 채워지게 된다. 이는 17세기 이후 성리학적 예제가 정착함에 따라 양좌동이 경주손씨와 여주이씨 부계 중심의 집성촌으로 고착화되었기 때문이다.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민음사, 1990
『良佐洞硏究』, 嶺南大學校 人文科學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判部, 1990
『民族文化論叢』15, 李樹健, 李樹煥, 鄭震英, 金容晩,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4
『嶺南學』17, 김현영,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0
이광우,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769년 경주부(慶州府) 양좌동(良佐洞) 동안(洞案)
己丑三月日洞案
洞案
李德祉【成之甲子癸未大耋陞同中樞
李愼中【聖徽戊辰壬辰大耋陞僉中樞
孫三杰【兼之庚子大耋陞同中樞
孫應杰【景彙甲戌癸巳大耋陞僉中樞
孫命祿【玄賚丙子
李稱中【叔平己卯
李憲成【相甫壬午
李憲天【堯則癸未
李憲國【萬甫癸未
李度中【明兼甲申
李經中【聖行甲申
孫胤九【源甫乙酉
李憲淳【萬式乙酉
李郁中【若文庚辰
孫是樹【達卿庚辰
李憲河【道南辛巳
李憲周【長文辛巳
李毅中【叔行壬午
李碩中【斐如壬午
李承中【聖胤壬午
李憲邦【君式丙戌
孫是{木+蓂}【天老丁亥
孫範九【必松戊子
李範中【彜卿戊子辛酉司馬丙寅入仕】
孫聖九【行兼戊子
李憲徵【獻汝己丑
孫郁九【述卿己丑
孫重杰【厚伯戊子
孫命勗【勉汝己丑
李憲濂【彙茂己丑
孫命述【賛甫庚寅庚戌大耋陞僉中樞
孫是橒【文卿庚寅
孫夙發【仲祥辛卯
李憲淵【正源辛卯
李湜中【士澄辛卯
孫賢九【逸兼辛卯
李憲點【景興壬辰
李憲世【爾準壬辰
孫命沃【啓彥壬辰
李憲沉【晦叔壬辰
孫遠杰【仲運壬辰
李維中【聖振】
孫能杰【台仲癸巳
孫翰九【士聞癸巳
李沂中【正甫甲子
李憲復【善初甲子甲寅大耋陞僉中樞
李憲鐸【振甫甲子甲寅大耋陞中僉樞
李憲默【伯容甲子庚午文科入仕】
孫命純【士厚乙未
孫雄杰【英甫丙申
孫萬杰【士一丙申
孫鳳杰【岐伯丙申
孫叙九【子常丙申
李命中【性吾丙申
孫夙杰【季興丁酉
李憲健【元則丁酉
李憲魯【聖淵丁酉
孫是櫶【彙卿丁酉
孫振九【季方戊戌
李憲述【大式戊戌
李憲洛【景淳戊戌甲子司馬庚辰入仕】
李憲稷【堯輔戊戌
李憲謙【讓伯戊戌
李憲七【汝觀戊戌
孫運杰【仲道戊戌
孫鳳九【季心己亥庚子司馬】
李叙中【彜叔己亥
孫崇九【興仲己亥
孫玄九【承彥庚子
李憲晦【希祖庚子
孫憲九【達兼庚子
李憲道【士由庚子
孫思九【仲叔辛五
李憲晢【乃興辛丑
李憲履【汝安辛丑
李鼎燮【元理辛丑
李憲光【汝顯辛丑
李憲燾【仲穆壬寅甲戌司馬】
李憲涑【景溫壬寅
李憲夔【堯卿壬寅
孫赫九【顯卿壬寅
孫垕九【孝培壬寅
李憲熹【子敬壬寅
孫晋杰【仲進辛丑
李憲璣【杜甫癸卯
李憲說【用汝癸卯
孫象九【趾彥癸卯
孫斗杰【季瞻癸卯
李憲烈【仲賛甲辰
孫龍九【元若甲辰丁酉司馬】
孫承九【君述甲辰
李憲郁【光甫甲辰
李鼎宅【大有甲辰
李憲穆【伯深甲辰
李鼎梅【松卿乙巳
李鼎福【亨五乙巳
李鼎元【公燮丙子
李憲吉【直叔丙午
孫是檉【以新丙子
孫星精【孝一丙子
李憲奎【文瞻丙子
李憲奭【汝宣丁未
李憲紘【大則戊申
孫雲九【景彥戊申
李憲斗【七應戊申
孫增祿【而聞己酉
李鼎赫【國章己酉
李憲卨【勲卿己酉
李憲矩【仲烈庚戌
李憲常【天徑庚戌
李元述【伯仁庚戌
李鼎宇【多度辛亥癸未司馬】
孫鼎九【國寶辛亥庚子司馬】
孫應龜【元休辛亥
孫增九【成如辛亥
李鼎祿【綏甫壬子
李憲相【仲輔壬子
李憲聃【耳老癸丑
李憲儒【景珎癸丑癸未司馬甲申入仕】
孫師杰【剛應癸丑
李憲白【汝淸癸丑
李鼎周【休仲癸丑
李鼎勲【銘于甲寅丙子司馬】
李鼎翊【宅而甲寅庚子司馬】
孫星斗【孝三甲寅
李憲聖【淸一甲寅
李憲純【文則甲寅
孫應馹【儀甫甲寅
孫應斗【季精甲寅
孫孝九【成彥甲寅
孫應駿【大汝乙卯
李鼎揆【公宅乙卯戊子文科入仕】
李憲斌【士章丙辰
李憲華【仲恊丙辰
孫星漢【孝仁丙辰
孫星震【寅叔丙辰
孫增績【景賛丙辰
李鼎弼【仲擧丙辰
李鼎莘【孟任丙辰
李憲思【士述丙辰
李鼎寅【多亮丁巳
孫儒杰【士眞丁巳
孫應樞【極老丁巳
李鼎和【汝燮丁巳
李鼎臣【藎卿丁巳
李鼎老【仲安丁巳
孫英九【子兼丁巳
孫星玉【子衡丁巳
孫鳴九【大而戊午
孫容九【乃正戊午
李憲贇【士兼戊午
孫增萬【會一戊午
孫繼九【有承戊午
孫星宅【德五戊午
孫鼎杰【乃實己未
李鼎說【國叟己未
孫增烈【孟溫己未
李憲參【宗應己未
李鼎漢【星應己未
李鼎鎭【雅安庚申
孫增慶【善福庚申
李鼎調【乃燮庚申
李鼎理【乃運庚申
李鼎容【孟涵庚申
李憲勲【銘老庚申
李憲愚【景顏庚申甲午司馬】
孫應奎【雅文庚申
李鼎祜【以處庚申
孫星翼【君纘庚申
孫星東【乎淑庚申
孫星極【景樞庚申
孫星緯【子紀戊子
孫鼎玉【孟鉉辛酉
孫星岳【精五辛酉辛酉司馬】
李鼎受【夢興辛酉
李鼎猷【大允辛酉
孫克九【伯幹辛酉
李鼎鎬【周應辛酉
孫迪九【文益辛酉
李憲顥【土純辛酉
孫星璧【拱五辛酉
孫咸杰【貞應壬戌
孫弘九【乃遠癸亥
孫星鐸【振五癸亥
李鼎凝【命安癸亥
李鼎興【而盛癸亥
孫來九【通彥癸亥
李鼎錫【重卿甲子
孫增遠【來彥甲子
李鼎涵【孟容甲子
李憲師【希聖甲子
李鼎泰【魯瞻甲子
李鼎祚【景綏甲子
孫有九【乃亨甲子
李鼎喆【子明甲子
李鼎器【孟安甲子
孫星燦【章彥甲子
孫星運【復五己未
孫星德【漢五乙丑
李憲模【仲範乙丑
孫增纘【肎夭乙丑
李鼎鉉【仲玉乙丑
李鼎有【汝實丙寅
李鼎殷【汝說丙寅
李鼎瑞【漢應丙寅
孫烈九【乃承丁卯
孫星洛【朙應丁卯
李鼎植【子固丁卯
李鼎扶【支國丁卯
孫增顯【時晦丁卯
孫衡九【季權丁卯
李箕祥【伯休丁卯
李鼎立【士定丁卯
孫星喆【雅明丁卯
孫星瓊【景瞻戊辰
孫星五【國瑞戊辰
李鼎述【祖應戊辰
李鼎安【鎭應戊辰
李鼎樸【汝純戊辰
孫增履【景綏己巳
李憲教【敬五己巳
李鼎五【漢應己巳
李鼎衡【禹寶己巳
孫世勲【國老己巳
李鼎蓍【孟圓庚子
孫世觀【國見庚子
李鼎鑌【士剛庚子
李鼎采【仲亮庚子
孫亨九【亨彥庚子
孫星祿【瑞元辛未
李河祥【龍瑞壬申
李獜祥【爾振壬申
李憲敏【雅行壬申
李鼎台【鉉甫壬申
李國祥【士興壬申
李鼎溥【孟淵癸酉
李鼎任【耕道癸酉
孫應說【君弼癸酉
孫星說【天弼癸酉丙午司馬】
孫鼎實【光彥癸酉癸未老職僉樞
崔鳳瑞
孫是枰
鄭涑
鄭{氵+奭}
孫聖升
孫是檀
孫是奎
崔日省
孫是樀
孫廷杰
孫玄升
金重采
崔日昌
孫夏升
孫是厚
孫是重
崔垕
孫尹杰
金重世
孫是儉
孫命熈
孫命聃
李洪中
孫龍著
鄭相宣
李溥中
孫克升
孫世九
孫道著
孫是昌
孫是橝
崔聖臣
孫國著
孫是淸
鄭相顯
黃吉徵
孫命常
曹命龍
孫命成
孫鳳著
李憲龜
李憲龍
孫廷榦
孫昌九
孫福升
鄭相運
削去
削去
崔光宙
崔聖復
崔聖時
孫命宅
孫周九
孫進升
金重祿
金聲遠
孫弘著
孫新杰庚申大耋陞僉中樞
孫是堅
孫是光
孫命邦
崔光宇
孫弼九
孫星七
孫命國
孫翼萬
李憲安
李鼎禧
孫廷翰
孫廷禹
崔光寶
孫廷郁
孫星八
孫胄九
孫仍九
孫義九
李鼎鑑
呉泰國

己丑三月二十九日洞任【李[署押]李[署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