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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3년 경주부(慶州府) 양좌동(良佐洞) 동안(洞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4+KSM-WZ.1763.4713-20120630.Y1240606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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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계문서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작성시기 1763
형태사항 크기: 38 X 28
판본: 필사본, 복사본
장정: 선장
수량: 1책(40면)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양동 경주손씨 서백당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학로 280

안내정보

1763년 경주부(慶州府) 양좌동(良佐洞) 동안(洞案)
지금의 경상북도(慶尙北道)경주시(慶州市)에 위치한 양동(良洞)마을에서 조선시대 때 실시되었던 동약(洞約)의 구성원 명부이다. 양동마을은 조선중기에 형성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양반 집성촌으로, 일명 양좌동(良佐洞)이라고도 부른다. 지금까지 경주손씨(慶州孫氏)와 여주이씨(驪州李氏) 두 가문이 세거해 오고 있으며, 양반 전통마을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이러한 양동마을에서는 조선중기 이래 동약을 시행해 왔었다. 동약은 동리 단위로 시행되었던 향약을 일컫는 것으로, 당시 양반들은 성리학적 생활규범이 반영된 동약을 거주지 일대에서 시행함으로써, 상부상조를 통한 구성원 간 결속력 강화와 더불어 양반 중심의 향촌지배질서 확립에 대한 성리학적 명분을 제공받으려 했었다. 동약에 제정되어 있는 생활규범의 운영을 양반들이 주도함으로써 스스로 올바른 생활 윤리를 실천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이 규정을 통해 동리의 하층민을 통제해 나가기도 했던 것이다. 양동마을에서 실시된 동약도 이러한 의도에서 시행되었으며, 이와 관련하여 그 구성원 명부인 동안을 작성하게 되었다.
현재까지 양동마을에는 17~18세기 작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10여 종의 동안이 전해지고 있다. 그 중에서 본 자료는 1763년에 작성된 동안으로, 모두 265명의 동약 구성원을 수록하였다. 여기에 수록되어 있는 인물들을 성씨별로 나열하면 이씨(李氏) 124명, 손씨(孫氏) 119명, 최씨(崔氏) 8명, 정씨(鄭氏) 6명, 김씨(金氏) 5명, 황씨(黃氏) 2명, 조씨(曹氏) 1명 순으로 나타난다. 단연 양동마을에 집성촌을 형성한 경주손씨와 여주이씨의 비율이 높다. 이렇게 작성된 양동마을 동안의 가장 큰 특징은 적손(嫡孫)과 서손(庶孫)을 엄격히 구분해 놓은 기재 방식에 있다. 먼저 적손을 나이 순서대로 기재한 후, 이어 서손을 한 줄 내려 후미에 기재하여 적손과 서손을 구별해 놓았으며, 적손의 경우 서손과는 달리 출생 연도와 자(字), 그리고 과거 급제 기록까지 기재하였다. 비록 한 혈손이지만 양동마을 내에서 양반과 서얼의 신분적인 구분을 동안을 통해 명확히 명시화 하여, 적손들이 전통적인 양반의 지위에 있음을 표방하려 한 것이다.
이광우,이수환

상세정보

1763慶尙道慶州府良佐洞에서 실시되었던 洞約의 洞員 명부로 총 265명을 수록
癸未七月日 洞案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慶尙道慶州府良佐洞에서 실시되었던 洞約 구성원인 洞員의 명부이다. 양좌동은 조선중기 이래 慶州孫氏와 驪州李氏 두 가문이 世居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전통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양반 집성촌이다. 이 두 가문은 일찍이 자신들이 거주하는 동리에서 구성원 간의 상부상조와 결속력 강화를 위해 각종 공동체 조직을 결성하였는데, 동약 역시 그 중 하나이다. 양좌동에서 동약이 언제부터 시행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현존하는 자료로 보아 늦어도 17세기 초반부터는 시행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동약 운영 목적 역시 명확하지는 않으나, 開墾, 灌漑, 禁葬 및 신분 또는 계층 간 질서 유지가 주된 목적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동리에 대소사가 있을 때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대응함과 동시에, 향약의 제 규범을 동약에 적용시킴으로써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 질서를 유지하려 했던 것이다. 한편, 양좌동에서는 동약과 성격을 달리하는 香約이라는 공동체 조직이 동약과 병행하여 실시되고 있었다. 이 조직은 동약과는 달리 장례와 상례 때의 상호부조가 주된 운영 목적이었으며, 사족인 上人과 더불어 하층민인 下人, 그리고 庶孼까지도 참여하는 공동체 조직이었다. 지금까지 양좌동에는 17~18세기에 작성된 10여 종의 동안이 전해지고 있는데, 본 자료는 그 중에서도 1763년에 작성된 동안이다.
본 동안의 작성 방식에 있어 가장 주목되는 점은 엄격한 嫡庶 구분이다. 비록 동약은 적손 계열의 사족들 주도로 운영되었지만, 같은 혈손이었던 양좌동의 서손들도 동약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함께 동안에 기재되었다. 이러한 점에 대해 당시 적손 계열의 사족들은 동안 기입 방식에 있어 서손과의 차별을 둠으로써 신분 관계를 명확히 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동안의 좌목은 적손을 먼저 기재한 후 말미에 서손을 기재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서손은 적손에 비해 한 줄 내려 성명을 기재하였다. 적손은 字와 출생 간지를 세주로 함께 기재해 놓았지만, 서손은 성명만 기재되어 있다. 적손의 경우 과거시험에 급제한 洞員이 있으면 과거의 종류와 급제한 干支도 함께 기재하였다. 좌목에 수록된 적손에게 좀 더 권위를 부여하는 형식으로 동안을 작성하여 신분 간의 구별을 확연히 했던 것이다.
동안에 수록된 265명은 나이 순서대로 기재되어 있다. 좌목 가장 서두에 기재된 李德祉는 甲子(1684) 생으로 동안 작성 당시 좌목의 최연장자인 80세였다. 아울러 李德祉는 동안이 작성되던 그 해에 大耋, 즉 壽職으로 僉知中樞府事에 올랐다고 기재되어 있다. 반면, 적손 계열 좌목 가장 말미에는 최연소자인 李鼎植이 기재되어 있는데, 丁卯(1747) 생으로 동안 작성 당시 17세였다. 서손의 기재 순서는 확인되지 않지만 적손과 마찬가지로 나이 순서대로 기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적서 간의 구분과 더불어 老少의 구분도 엄격히 하여 향촌질서를 명시화 하겠다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성명 아래에 세주로 기재된 과거시험 급제자는 모두 12명이다. 이 중 문과 급제자는 2명으로 李憲默이 庚午年(1750) 文科에, 李鼎揆가 戊子年(1768) 문과에 급제한 것으로 나타난다. 나머지 10명은 모두 司馬試 합격자인데, 이씨가 7명이고 손씨가 3명이다. 과거 급제자 중 入仕 경력을 명기한 자는 2명으로 앞서 언급한 李憲默이 문과 급제 후 入仕, 李範中이 辛酉年(1741) 사마시 급제 후 丙寅年(1746)에 入仕 했다고 기재되어 있다. 이러한 과거 급제의 기록과 入仕 경력 연도의 표기 역시 동안 내에서 적손 계열의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의도가 일정부분 반영된 것이다. 한편, 동안 말미의 좌목 작성 날짜 아래에는 당시의 洞任 성씨와 그들의 署押이 기재되어 있다. 癸未(1763) 7월 11일의 좌목과 追入된 甲申(1764) 정월 25일의 좌목에서 각각 손씨 1명, 이씨 1명의 서압이 확인된다.
동안에 수록된 좌목은 모두 2편이다. 먼저 것은 癸未 7월 11일 본 동안이 작성될 때 당시의 좌목으로 모두 264명이 수록되어 있으며, 두 번째 좌목은 갑신 정월 25일의 추입 좌목으로 적손 계열의 孫天杰 1명만 수록하였다. 이상의 입록자 265명을 성씨별로 분류하면 李德祉 이하 李氏 124명, 孫三杰 이하 孫氏 119명, 崔鳳瑞 이하 崔氏 8명, 鄭涑 이하 鄭氏 6명, 金重采 이하 金氏 5명, 黃後徵 이하 黃氏 2명, 曹氏 1명(曹命龍) 순이다. 비율별로는 이씨 47%, 손씨 45%, 나머지 5개 성씨가 22명으로 8%를 점유하고 있다. 단연 양좌동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경주손씨와 여주이씨의 비중이 높게 나타난다.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중반 이전에 작성된 양좌동의 다른 동안과 비교하여, 처음으로 이씨가 손씨에 비해 많은 수의 입록자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입록자를 적손과 서손별로 구분하면 적손이 205명으로 77%, 서손이 60명으로 23%이다. 종전에 작성되었던 다른 동안에 비해 적손과 서손의 비율 차이가 크게 벌어지고 있음이 나타난다. 이를 다시 성씨별로 분류하면 적손은 이씨 120명, 손씨 85명으로 각각 59%와 41%이다. 그리고 서손은 손씨 34명, 최씨 8명, 정씨 6명, 김씨 5명, 이씨 4명, 황씨 2명, 조씨 1명 순이며, 이들의 입록 비율은 손씨 57%, 이씨 7%, 기타 5개 성씨가 36%로 나타난다. 전체 입록자 가운데 이씨가 가장 많이 확인되고, 적손 역시 이씨의 비중이 높으나 상대적으로 서손의 이씨 비율이 매우 낮다. 그리고 손씨와 이씨를 제외한 나머지 5개 성씨는 모두 서손으로 수록되어 있음이 주목된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동약 시행의 추이와 재지사족의 향촌지배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중기 이래 재지사족들은 성리학적 생활규범인 향약을 향촌사회에서 실시해 나갔다. 이중에서도 동약은 재지사족들이 거주하며 실질적인 지배력이 미치는 동리 단위로 시행된 것이다. 그리고 그 구성원은 부계를 바탕으로 단일 성씨의 혈족이 중심이 되었다. 재지사족들은 향약의 생활규범이 적용되어 있는 동약 시행을 통해 그들 중심의 향촌지배질서에 대한 성리학적 명분을 제공받으려 했던 것이다. 이에 조선시대 대표적인 반촌인 양좌동에서도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경주손씨와 여주이씨 두 가문 주도로 본 동약이 시행되었다. 이러한 동약은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가 확립되어 가던 17세기 이후 여러 동리에서 널리 시행되었던 것인데, 사족들은 동약 구성원 명부인 洞案을 작성함으로써 일족 간의 결속력을 명시화하고 동리 내에서의 지위를 표방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양좌동에서 실시된 동약은 적손 계열의 사족뿐 아니라 서손도 참여시키고 있으며, 그들의 성명을 함께 동안에 수록하되, 적손과 서손을 뚜렷이 구분해 놓았다는 특징이 있다. 기재 방식을 달리 함으로써 적서의 구분을 명확히 한 것이다. 이러한 기재 방식은 양좌동에서 작성된 여러 동안에서도 확인된다. 양좌동의 적서가 모두 한 일족이고 생활권을 같이 하기에 상부상조와 일족 간 결속력 강화를 명분으로 동약에 참여시키지만, 동안의 기재 방식을 달리하여 신분 간 구분을 엄격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사족과 비사족 간의 향촌질서를 동안을 통해 간접적으로 명시화 한 것으로, 조선후기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 사족 중심의 향촌질서를 더욱 공고히 하겠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한편 본 동안에서 가장 많은 입록자를 배출한 성씨는 이씨로 나타난다. 현존하는 양좌동의 동안 가운데 본 동안 이전의 것이 8종이지만 모두 손씨 입록자가 많았었다. 두 가문의 이러한 비율은 18세기 이후 점차 좁아져 1763년의 동안에서는 이씨의 비중이 높게 나타난 것이다. 양좌동 내에서 이씨의 족세가 상대적으로 손씨에 비해 높아졌으며, 결국 동약도 이씨 주도로 전환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 양좌동의 여주이씨는 조선후기 명실상부 경상도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 사족가문으로 성장하였기에, 그것이 좌목의 입록 비율로 반영된 것이다. 이러한 두 가문 간의 族勢 차이는 동안에 기재되어 있는 과거 급제자의 비중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동안 입록 자 중 적손에 수록된 자는 모두 손씨와 이씨이다. 반면, 두 성씨를 제외한 타성은 전원 서손으로 확인된다. 이 역시 18세기 중반 이전의 수록 현황과는 차이나는 부분이다. 18세기 초반까지 작성된 동안에는 蔣氏, 朴氏, 申氏 등이 비록 비중은 적으나 적손으로 수록되어 있었다. 이들 가문은 혼인관계를 통해 양좌동에 정착한 타성 가문으로 여겨지는데, 후기로 갈수록 본 동안에서와 같이 적손은 모두 손씨와 이씨로 채워지게 된다. 이는 17세기 이후 성리학적 예제가 정착함에 따라 양좌동이 부계 중심의 집성촌으로 고착화되었기 때문이다.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민음사, 1990
『良佐洞硏究』, 嶺南大學校 人文科學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判部, 1990
『民族文化論叢』15, 李樹健, 李樹煥, 鄭震英, 金容晩,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4
『嶺南學』17, 김현영,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0
이광우,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763년 경주부(慶州府) 양좌동(良佐洞) 동안(洞案)
庚午正月日洞案
癸未七月日
洞案
良佐洞洞案
李德祉【成之甲子癸未大耋陞僉樞
李愼中【聖徽戊辰
孫三杰【兼之庚子
李執中【允夫壬申
孫是楳【理卿壬申
李建中【聖極壬申
李正中【君普甲戌
孫應杰【景彙甲戌
孫命祿【玄賚丙子
李稱中【叔平己卯
孫海杰【東叟癸酉
李郁中【若文庚辰
孫是樹【達卿庚辰
李憲翼【季式庚辰
李憲河【道南辛巳
李憲周【長文辛巳
李述中【聖述壬午
李毅中【叔行壬午
李碩中【斐如壬午
李承中【聖胤壬午
李大中【聖建壬午
李憲成【相甫壬午
李憲天【堯則癸未
孫應九【伯孝癸未
李憲朝【仲元癸未
李憲國【萬甫癸未
李度中【明兼甲申
李經中【聖行甲申
孫胤九【源甫乙酉
李憲淳【萬式乙酉
李憲邦【君式丙戌
孫是樀【天老丁亥
孫範九【必和戊子
李範中【彜卿戊子辛酉司馬丙寅入仕】
孫聖九【行兼戊子
李憲徵【獻汝己丑
孫郁九【述卿己丑
孫命勗【勉河己丑
李憲濂【景茂己丑
孫重杰【厚伯戊子
孫命述【賛甫庚寅
孫是橒【文卿庚寅
孫夙發【仲祥辛卯
李憲淵【正源辛卯
李憲伋【思甫辛卯己卯司馬】
李湜中【士澄辛卯
孫賢九【逸兼辛卯
李憲點【景與壬辰
李憲世【爾準壬辰
孫命沃【啓彥壬辰
李憲沉【晦叔壬辰
孫遠杰【仲運壬辰
李維中【聖振】
孫能杰【台仲癸巳
孫翰九【士聞癸巳
孫命仁【士敦癸巳
李沂中【正甫甲午
李憲復【善初甲午
李憲鐸【振甫甲午
李憲默【伯容甲午庚午文科入仕】
孫命純【士厚乙未
孫雄杰【英甫丙申
孫萬杰【士一丙申
孫顯九【通兼丙申
孫鳳杰【岐伯丙申
孫叙九【子常丙申
李命中【性吾丙申
孫益九【希彥丁酉
孫夙杰【季興丁酉
李憲大【元則丁酉
李憲魯【聖淵丁酉
孫是櫶【章卿丁酉
孫振九【季方戊戌
李憲述【大式戊戌
李憲洛【景淳戊戌甲子司馬庚辰入仕】
李憲稷【堯輔戊戌
李憲謙【讓伯戊戌
李憲七【汝觀戊戌
孫運杰【仲通戊戌
孫鳳九【季心己亥庚子司馬】
李叙中【彜叔己亥
孫憲晦【希祖庚子
孫玄九【承彥庚子
孫憲九【達兼庚子
李憲道【士由庚子
李憲履【汝安辛丑
李鼎燮【元理辛丑
李憲光【汝顯辛丑
孫崇九【興仲己亥
孫思九【仲叔辛丑
李憲燾【仲穆壬寅甲戌司馬】
李憲涑【景溫壬寅
李憲夔【景溫壬寅
孫赫九【顯卿壬寅
孫垕九【孝甫壬寅
李憲熹【子敬壬寅
李憲璣【在甫癸卯
李憲說【用汝癸卯
孫象九【甫彥癸卯
孫斗杰【季瞻癸卯
李憲燮【仲賛甲辰
孫龍九【元若甲辰丁酉庚子司馬】
孫承九【君述甲辰
李憲郁【光甫甲辰
李鼎宅【伯揆甲辰
孫晋杰【仲進辛丑
李憲穆【伯深甲辰
李鼎梅【如卿己巳
李鼎福【亨五己巳
李憲吉【惠叔丙午
孫是檉【心新丙午
孫星精【孝一丙午
李憲奎【文瞻丙午
李憲奭【汝宣丁未
李憲紘【大則戊申
孫雲九【景彥戊申
李鼎元【公燮丙午
李憲斗【七應戊申
孫增祿【而聞己酉
李鼎赫【國章己酉
李憲卨【勲卿己酉
李憲矩【仲烈庚戌
李憲常【天徑庚戌
李元述【伯仁庚戌
李鼎宇【大受辛亥癸未司馬】
李鼎洛【龜應辛亥
孫鼎九【國寶辛亥庚子司馬】
孫應龜【元休辛亥
孫增九【成如辛亥
李鼎祿【綏甫壬子
李憲相【仲輔壬子
李憲聃【耳老癸丑
李憲儒【景眞癸丑癸未司馬】
孫師杰【剛應癸丑
李憲白【汝淸癸丑
李鼎周【休仲癸丑
李鼎寏【宅而甲寅
李鼎勲【大集甲寅丙子司馬】
孫星斗【孝三甲寅
李憲聖【淸一甲寅
李憲純【文則甲寅
孫應馹【儀甫甲寅
孫應斗【季精甲寅
孫孝九【成彥甲寅
孫應駿【大如乙卯
李鼎揆【公宅乙卯戊子文科】
李憲斌【士章丙辰
李憲華【仲恊丙辰
孫星漢【孝仁丙辰
孫星震【寅叔丙辰
孫增績【景賛丙辰
李鼎弼【仲擧丙辰
李鼎莘【孟任丙辰
李鼎寅【公亮丁巳
孫儒杰【士珎丁巳
孫應樞【容甫丁巳
李鼎和【汝燮丁巳
李鼎臣【藎卿丁巳
李鼎老【仲步丁巳
孫英九【子兼丁巳
孫鳴九【大而戊午
孫容九【乃正戊午
李憲贇【士兼戊午
孫增萬【會一戊午
孫鼎杰【乃實己未
李鼎說【國叟己未
李增烈【孟溫己未
李憲參【宗應己未
李鼎漢【星應己未
李鼎鎭【維安庚申
孫增慶【善由庚申
李鼎調【乃燮庚申
李鼎理【乃運庚申
李鼎容【孟涵庚申
李憲勲【銘老庚申
孫應奎【推文庚申
李鼎祜【以受庚申
孫星翼【君賛庚申
李憲愚【景顏庚申
孫星東【平叔辛酉
李鼎玉【孟鍓辛酉
孫星岳【肅玉辛酉
李鼎受【夢與辛酉
李鼎猷【大允辛酉
孫克九【伯幹辛酉
李鼎鎬【聞應辛酉
孫迪九【文盖辛酉
孫咸杰【貞應壬戌
孫弘九【乃源癸未
孫星鐸【賚卿癸未
李鼎凝【命安癸未
李鼎稷【翊文癸未
李鼎興【而盛癸未
李鼎錫【重卿甲子
孫增遠【來彥甲子
孫星運【復五己未
李鼎涵【孟容甲子
李憲師【希聖甲子
李鼎泰【魯望甲子
孫星德【漢五乙丑
李鼎華【國鎭丙寅
李鼎祺【景綏甲子
孫烈九【乃承丁卯
孫星洛【明應丁卯
李鼎植【子固丁卯
崔鳳瑞
孫是枰
鄭涑
鄭{氵+奭}
孫日升
孫聖升
孫是根
孫是檀
孫是奎
崔日省
孫是樀
孫廷杰
孫玄升
黃後徵
金重采
崔日昌
孫夏升
孫是厚
孫是重
崔垕
孫尹杰
金重世
孫是儉
孫命聃
李洪中
孫龍著
鄭相宣
李溥中
孫克升
孫世九
孫道著
孫是昌
孫是橝
崔聖臣
孫國著
孫是淸
鄭相顯
曹命龍
孫命常
孫命成
孫鳳著
李憲龜
李憲龍
孫廷榦
孫昌九
孫福升
黃吉徵
鄭相運
鄭相起
金友基
崔光宙
崔聖復
崔聖時
孫命宅
孫周九
孫進升
金重祿
金聲遠
孫弘著

癸未七月十一日洞任【李[署押]孫[署押]】
追入
孫天杰【玄卿庚子
甲申正月二十五日洞任【李[署押]孫[署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