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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2년 경주부(慶州府) 양좌동(良佐洞) 동안(洞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4+KSM-WZ.1762.4713-20120630.Y1240606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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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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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계문서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작성시기 1762
형태사항 크기: 42 X 29
판본: 필사본, 복사본
장정: 선장
수량: 1책(17면)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양동 경주손씨 서백당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학로 280

안내정보

1762년 경주부(慶州府) 양좌동(良佐洞) 동안(洞案)
경상북도(慶尙北道)경주시(慶州市)에 위치한 양동(良洞)마을에서 실시되었던 동약(洞約)의 구성원 명부이다. 양동마을양좌동(良佐洞)이라 불리기도 하였는데, 조선중기 이래 경상도 지역을 대표하는 양반 가문인 경주손씨(慶州孫氏)와 여주이씨(驪州李氏)가 세거하고 있는 양반 집성촌으로 알려져 있다. 양동마을에서는 일찍이 동리 촌민들 간 상부상조를 통한 결속력 강화를 위해 각종 공동체 조직이 운영되었으며, 그 중 하나가 바로 동약이었다. 동약은 동리 단위로 시행되던 향약(鄕約)을 일컫는 것으로, 조선시대 양반들은 동약 시행을 통해 양반 주도의 향촌질서 확립에 대한 성리학적 명분을 제공받으려 했던 것이다.
양좌동 동약의 구성원 명부인 동안은 현재까지 17~18세기에 작성된 동안 10여 종이 전해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본 자료는 1762년에 작성된 것이다. 여기에는 모두 114명의 성명을 수록해 놓았다. 성씨별로는 이씨(李氏) 56명, 손씨(孫氏) 51명, 최씨(崔氏) 4명, 정씨(鄭氏) 2명, 황씨(黃氏) 1명 순으로 나타난다. 동안의 작성 방식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적서(嫡庶)의 구분을 명확히 해 놓았다는 점이다. 먼저 적손(嫡孫)을 나이 순서대로 기재한 후, 이어 서손(庶孫)을 한 줄 내려 후미에 기재해 놓았다. 한 동리 내에서 양반과 서얼과의 신분적 구분을 명확히 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진 기재 방식이다.
이광우,이수환

상세정보

1762慶尙道慶州府良佐洞에서 실시되었던 洞約의 洞員 명부로 총 114명을 수록
壬午正月日 洞案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慶尙道慶州府良佐洞에서 실시되었던 洞約 구성원인 洞員의 명부이다. 양좌동에서의 동약은 開墾, 灌漑, 禁葬, 신분 또는 계층 간 질서 유지 등을 위해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중기 이래 양좌동에 정착한 慶州孫氏와 驪州李氏 두 가문은 지금까지 양좌동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해 오고 있는데, 이들은 일찍이 동리의 구성원 간의 상부상조와 결속력 강화를 위해 각종 공동체 조직을 결성하고 운영하였었다. 동약도 이러한 배경 하에 결성되었던 것이다. 양좌동 동약의 결성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현재 양좌동에 전해오고 있는 자료를 통해 17세기 초반 무렵부터 동약이 시행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양좌동에서는 동약과 성격을 달리하는 香約이라는 공동체 조직이 운영되고 있었다. 이 조직은 양좌동의 사족인 上人과 하층민인 下人, 그리고 庶孼까지도 참여하는 공동체 조직으로 장례와 상례 때의 상호부조가 주된 운영 목적이었다. 현재까지 양좌동의 동약 운영과 관련하여 17~18세기에 작성된 동안 10여 종이 전해지고 있다. 본 동안은 그 중에서도 1762년 정월에 작성된 것이다.
본 동안의 작성 방식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嫡庶의 명확한 구분이다. 동약 운영은 양좌동에 세거하고 있는 적손들이 주도하였으나, 같은 일족이며 한 동리에 거주하고 있는 서손들도 동약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동안에 함께 수록되었는데 신분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기에 표기 방식에서 차이를 두고 있다. 먼저 적손을 나이 순서대로 수록하였다. 가장 서두에 있는 李德祉가 甲子生(1684)으로 동안 작성 시 나이가 79세였으며, 적손의 좌목 가장 말미에 있는 李憲矩가 庚戌生(1730)으로 이때 33세였다. 기재 방식은 성명 기재 후, 그 아래에 세주로 字와 출생 간지를 기재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반면에 서손은 성명만 기재하였다. 기재 방식도 적손과 구별된다. 적손을 모두 기재한 후, 그 다음부터 서손을 기재하되 적손에 비해 줄을 한 칸 내려 명확하게 적서를 구별해 놓은 것이다. 본 동안 이전에 작성된 양좌동의 동안에서도 이러한 형태의 기재 방식은 적용되어 있다.
한편, 적손의 경우 과거 급제와 관직 관련 이력까지 함께 세주로 기재해 놓았다. 이러한 이력을 기재한 까닭은 명확하지 않으나, 크게 두 가지로 추정된다. 하나는 동안에 입록된 적손 계열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것이며, 하나는 慶事가 있을 때 相互扶助 한 시기를 명기하기 위한 것이다. 이력이 기재되어 있는 자는 모두 7명이다. 文科 급제자도 1명 있는데, 庚午(1750)에 급제하여 參判까지 역임한 李憲默이다. 나머지 6명은 司馬試 합격자이며, 이 중 관직 역임자는 2명이다.
1762년 동안에 수록된 인물은 모두 114명이다. 이들을 성씨별로 나열하면 李德祉 이하 李氏 56명, 孫三杰 이하 孫氏 51명, 崔鳳瑞 이하 崔氏 4명, 鄭涑 이하 鄭氏 2명, 黃氏 1명(黃後徵) 순이다. 성씨별 입록 비율은 이씨가 49%, 손씨가 45%이며, 나머지 3개 성씨가 6%이다. 단연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경주손씨와 여주이씨의 비중이 높게 나타난다. 다만 이전 동안과 비교한다면 여주이씨 입록자가 경주손씨 보다 많다는 것이다. 자료 말미에는 洞任 2명의 성씨와 署押이 있는데, 모두 이씨이다. 과거 급제자 7명 중 이씨가 5명, 손씨는 2명이다. 이씨 중에는 문과 급제자 1명도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부분은 18세기 후반 양좌동에서 여주이씨의 族勢가 상대적으로 손씨에 비해 강하였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아울러 이전보다 손씨와 이씨를 제외한 타성의 종류가 4종으로 크게 줄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입록자 114명을 적서별로 구분하면 적손이 86명, 서손이 28명으로 그 비율은 각각 75%와 25%이다. 성씨별로는 적손은 이씨 55명, 서손 31명으로 그 비율이 각각 64%와 36%로 나타난다. 서손은 손씨 20명, 최씨 4명, 정씨 2명, 이씨와 황씨 각 1명 순이다. 비율은 손씨가 71%, 나머지 4개 성씨가 29%로 손씨의 비중이 절대 다수임이 나타난다. 아울러 적손에서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던 이씨의 비중이 매우 적으며, 이씨와 손씨를 제외한 타성은 모두 서손임이 주목된다.
[자료적 가치]
18세기 동약 시행의 추이와 이를 통한 재지사족들의 향촌 지배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동약은 동리를 단위로 시행되는 鄕約으로 조선중기 이래 재지사족들 주도로 시행되었다. 재지사족들은 동약 시행을 통해, 그들 중심의 향촌지배질서 확립에 대한 성리학적 명분을 제공받으려 했던 것이다. 경상도의 대표적인 반촌인 양좌동은 16세기부터 경주손씨와 여주이씨 두 가문이 세거한 집성촌으로, 이곳에서도 이들 주도의 동약이 시행되었었다. 이들은 동약을 통해 일족 간의 상부상조와 결속력 강화를 도모하였지만, 일면에서는 하층민의 통제와 사족으로서의 지위 유지도 표방해 나갔다. 특히 사족으로서의 지위 유지는 동안 작성 방식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양좌동 동안의 가장 큰 특징은 좌목 작성에 있어 嫡庶를 명확히 구분해 놓았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히 공동체 구성원을 수록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리 내에서 사족과 비사족 간의 향촌질서를 명시화 하려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한편 본 동안의 경우 이씨의 입록 비중이 종전에 비해 높게 나타난다. 17세기 전후한 동안의 입록 비율은 항상 손씨가 높게 나타났으나, 이 동안에서는 이씨가 높게 나타나 양좌동 내에서의 族勢가 역전되고 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17세기 이후 여주이씨가 명실상부 경상도를 대표하는 사족 가문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입록자 중 손씨와 이씨를 제외한 타성의 비중도 줄어드는데, 특히 적손의 경우 단 1명도 확인되지 않는다. 타성은 전원이 서손이 것이다. 이는 17세기 이후 성리학적 예제의 정착에 따라 양동마을에 더 이상 타성 사족이 이거하지 않고, 손씨와 이씨 두 가문으로 고착화 되면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씨의 경우 서손 비율이 매우 낮은데 이 역시 여주이씨 族勢의 성장과 맞물려 있다. 여주이씨의 족세가 성장함에 따라 양좌동을 떠나 인근 동리에 정착한 후 자립하는 서손 계열이 등장하였기에, 양좌동에서의 서손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게 나타난다.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민음사, 1990
『良佐洞硏究』, 嶺南大學校 人文科學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判部, 1990
『民族文化論叢』15, 李樹健, 李樹煥, 鄭震英, 金容晩,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4
『嶺南學』17, 김현영,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0
이광우,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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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텍스트

1762년 경주부(慶州府) 양좌동(良佐洞) 동안(洞案)
壬午正月日洞案
良佐洞洞案
李德祉【成之甲子
李愼中【聖徵戊辰
孫三杰【兼之庚午
李建中【聖極壬申
李執中【允夫壬申
李正中【君普】
孫應杰【景彙甲戌
孫命祿【玄賚丙子
李稱中【叔乎己卯
李憲翼【季式庚辰
孫海杰【東叟癸酉
李憲河【道南辛巳
李憲周【長文辛巳
李述中【聖述壬午
李毅中【叔行壬午
李大中【聖建壬午
李憲成【相甫壬午
孫應九【伯孝癸未
李憲國【萬甫癸未
李憲朝【仲元癸未
李度中【明兼甲申
孫胤九【源甫乙酉
李憲天【堯則癸未
李憲邦【君式丙戌
孫範九【必和戊子
李範中【彜卿戊子辛酉司馬仕官至郡】
李憲徵【獻汝己丑
孫郁九【述卿己丑
孫命勗【勉汝己丑
李憲濂【景茂己丑
孫聖九【行兼戊子
孫命述【賛甫庚寅
孫夙發【仲祥辛卯
李憲淵【正源辛卯
李憲伋【思甫辛卯己卯司馬】
李湜中【士澄辛卯
孫賢九【逸兼辛卯
李憲點【景興壬辰
李憲世【爾準壬辰
孫命沃【啓彥壬辰
孫能杰【台仲癸己
孫翰九【士聞癸巳
孫命仁【士敦癸巳
李沂中【正甫甲午
李憲復【善和甲午
李憲鐸【振甫甲午
李憲默【伯容甲午庚午文科入仕官至參判
孫命堅【士厚乙未
孫雄杰【英甫丙申
孫萬杰【士一丙申
孫顯九【道兼丙申
李命中【性吾丙申
孫益九【希彥丁酉
孫夙杰【季興丁酉
李憲魯【聖淵丁酉
孫振九【季方戊戌
李憲述【大式戊戌
李憲洛【景淳戊戌甲子司馬庚辰入仕
官至衛率
李憲稷【堯輔戊戌
李憲謙【讓伯戊戌
李憲七【汝觀戊戌
孫鳳九【季心己亥庚子司馬】
李憲大【元則丁酉
李叙中【彜德己亥
李憲晦【希祖庚子
孫玄九【承彥庚子
孫憲九【達兼庚子
李憲弼【泊翼辛丑
李鼎燮【元理辛丑
李憲燾【仲穆壬寅甲戌司馬】
李憲涑【景溫壬寅
李憲夔【堯卿壬寅
孫赫九【顯卿壬寅
李憲璣【在甫癸卯
李憲說【用汝癸卯
李憲燮【仲賛甲辰
孫象九【趾彥癸卯
孫龍九【元略甲辰丁酉司馬】
孫承九【君述甲辰
李憲郁【光甫甲辰
李鼎宅【伯揆甲辰
李憲穆【伯深甲辰
李憲奭【汝宣丁未
李憲紘【大則戊申
李鼎赫【國章己酉
李憲矩【仲烈庚戌
鄭涑
孫是梧
鄭{氵+奭}
孫日升
孫聖升
崔鳳瑞
孫是奎
崔日省
孫是樀
孫廷杰
黃後徵
孫夏升
孫玄升
孫尹杰
孫是檉
李溥中
孫道著
崔垕
孫命聃
孫是昌
孫是儉
崔聖臣
孫國著
孫克升
孫是重
孫是橝
孫世九
孫是淸
壬午正月十五日洞任李[署押]李[署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