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0년 慶尙道慶州府良佐洞에서 실시되었던 洞約의 洞員 명부로 총 185명을 수록
癸丑正月日 洞案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慶尙道慶州府良佐洞에서는 洞約이 실시되었었는데, 본 자료는 그 동약의 洞員 명부이다. 양좌동은 지금의 양동마을이 위치한 곳으로, 양동마을은 조선중기 이래 慶州孫氏와 驪州李氏 두 가문이 世居하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전통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집성촌이다. 아울러 두 가문은 조선시대 지역을 대표하던 사족 가문이었으며, 특히 양좌동의 여주이씨는 명실상부 경상도를 대표하던 사족 가문으로 알려져 있다. 이 두 가문은 일찍이 자신들이 거주하고 있던 양좌동 일대에서 향약을 시행하였으니, 동리의 이름을 빌어 양좌동 동약이라 불렀다. 여기서 동약은 동리 단위로 실시되던 향약을 일컫는 말이다.
양좌동에서의 공동체 조직은 여러 형태로 운영되었는데, 동약도 그 중 하나이다. 뚜렷한 결성 시기와 운영 방법 및 목적은 알 수 없으나, 양좌동에 전해지는 관련 자료로 보아 늦어도 17세기 초반에는 동약이 실시된 듯하다. 또한 開墾, 灌漑, 禁葬 및 신분 또는 계층 간 질서 유지가 동약 운영의 주된 목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양좌동에서는 동약과 성격을 달리하는 香約이라는 공동체 조직이 비슷한 시기에 운영되고 있었다. 이 조직은 동약과는 달리 장례와 상례 때의 상호부조가 주된 운영 목적이었으며, 사족인 上人과 더불어 하층민인 下人, 그리고 庶孼까지도 참여하는 공동체 조직이었음이 확인된다. 지금까지 양좌동에 전해져 오고 있는 동안은 10여 종으로 17~18세기에 작성된 것들이다. 본 자료는 그 중에서도 1750년에 작성된 동안이다.
본 동안의 작성에 있어서 가장 주목되는 점은 엄연한 嫡庶의 구분이다. 비록 동약은 적손 계열의 사족들 주도로 운영되었지만, 같은 혈손이었던 서손들도 동약에 참여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서손의 성명도 동안에 함께 기재하였다. 이러한 입록 방식은 양좌동 동안의 가장 큰 특징이며, 본 동안을 비롯하여 전후의 양좌동 동안에서도 확인되는 방식이다. 당시 적손 계열의 사족들은 동안의 기입 방식에 차이를 둠으로써 적손과 서손 간의 신분을 명확히 하였다. 이를 통해 그들 중심의 향촌질서를 명시화 하려 한 것이다. 이에 따라 동안의 좌목은 적손을 먼저 기재한 후 서손을 기재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서손은 적손에 비해 한 줄 내려 성명이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서손은 성명만 기재해 놓았지만, 적손은 字와 출생 간지를 세주로 기재하였다. 만약 과거시험에 급제한 적손이 있으면, 과거의 종류와 급제 간지도 함께 기재해 놓았다.
동안에 수록된 185명은 나이 순서대로 기재되어 있다. 좌목 가장 앞에는 孫命杰이 기재되어 있는데 甲寅(1674) 생으로 동안 작성 당시 77세였다. 적손 가장 말미에 기재된 李憲矩는 庚戌(1730) 생으로 동안 작성 당시 21세였다. 서손의 기재 순서는 확인되지 않지만 적손과 마찬가지로 나이 순서대로 기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명 아래에 세주로 기재된 과거시험 급제자는 庚午年(1750)에 文科에 급제한 후 入仕한 李憲默을 비롯하여 6명이 확인된다. 이헌묵을 제외한 나머지 과거 급제자는 모두 사마시 급제자이다. 6명 중 庚申年(1680) 사마시에 급제한 孫命說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씨로 나타난다. 동안 말미에는 경오 정월 15일이라는 날짜와 더불어 洞任의 署押이 기재되어 있다. 이날에 실제 동안이 작성된 듯하며, 당시 동임은 손씨와 이씨 각 1명씩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서압은 이씨 성을 가진 동임만 확인된다.
입록자 185명을 성씨별로 나열하면 孫氏 97명, 李氏 75명, 崔氏 5명, 鄭氏 4명, 金氏와 黃氏 각 2명 순이다. 그리고 각 성씨의 입록 비율은 손씨 52%, 이씨 41%, 기타 4개 성씨가 7% 순이다. 단연 양좌동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던 경주손씨와 여주이씨의 입록 비율이 높게 나타난다. 한편, 적손과 서손의 비율은 각각 131명 71%, 54명 29%를 차지하고 있다. 이를 다시 성씨별로 분류하면 적손은 손씨가 60명, 이씨가 71명으로 그 비율은 손씨 46%, 이씨 54%이다. 서손은 손씨 37명, 최씨 5명, 이씨와 정씨 각 4명, 김씨와 황씨 각 2명 순이다. 그 비율은 손씨가 69%, 이씨는 7%, 나머지 4개 성씨가 24%로 나타난다. 전체 입록자는 손씨가 가장 많이 확인되나 적손의 비율은 이씨가 더 높다. 반면 서손의 이씨 비율이 상대적으로 매우 낮게 나타난다. 손씨와 이씨를 제외한 기타 성씨는 4개 성씨가 확인되는데, 모두 서손으로 수록되어 있음이 주목된다.
[자료적 가치]
조선후기 동약 시행의 추이와 재지사족의 향촌지배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중기 이래 재지사족들은 성리학적 생활규범인 향약을 향촌사회에서 실시해 나갔다. 전통적인 계 조직에 향약을 접목시키고 그 시행을 주도함으로써,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 확립에 대한 성리학적 명분을 제공받으려 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반촌인 양좌동에서도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는 경주손씨와 여주이씨 두 가문의 주도로 향약이 시행되었었다. 향약이 동리 단위로 시행되었기에 동약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러한 동약은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가 확립되어 가던 17세기 이후 여러 동리에서 널리 시행되었음이 확인된다. 아울러 동약 구성원인 동원의 명부를 작성함으로 동리 내에서의 지위를 표방하기도 했다.
그런데 양좌동에서의 동약은 이를 주도하는 적손 계열의 사족 뿐 아니라 서손까지도 참여시키고 있었으며, 그들의 성명까지 동안에 함께 수록해 놓았다. 그리고 기재 방식을 달리 함으로써 적서를 확연하게 구분하였다. 양좌동의 적서가 모두 한 일족이기에 결속력 강화를 위해 동약에 참여시키지만, 동안 작성에 있어 성명의 기재를 달리 함으로써 신분 간 구분을 엄격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사족과 비사족 간의 향촌질서를 동안을 통해 간접적으로 명시화 하겠다는 의도로, 양좌동에서 작성되었던 동안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본 동안에서 가장 많은 입록자를 배출한 성씨는 손씨이다. 그러나 정작 동약을 주도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적손은 이씨가 가장 많다. 서손을 포함한 동원의 수는 손씨가 많지만, 당시 동약에 좀 더 큰 영향력을 끼쳤던 성씨는 이씨였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반에 작성되었던 다른 양좌동의 동안에 비해 적손 내 이씨의 비중은 갈수록 높아지는 경향이었다. 이는 곧 상대적으로 양좌동에서 이씨의 族勢가 강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 여주이씨의 경우 조선후기 명실상부 경상도 지역을 대표하는 명문 사족 가문으로 성장함에 따라 동약의 주도권도 점차 손씨에서 이씨 쪽으로 넘어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두 가문 간의 차이는 동안에 기재되어 있는 과거 급제자의 비중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동안 입록 자 중 적손에 수록된 자는 모두 손씨와 이씨이다. 반면, 두 성씨를 제외한 타성은 전원 서손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 역시 이전의 수록 현황과는 차이나는 부분이다. 비록 비중은 적었으나, 18세기 초반까지 작성된 동안에는 蔣氏, 朴氏, 申氏 등이 적손으로 수록되어 있었다. 이들 가문은 혼인관계를 통해 양좌동에 정착한 타성 가문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본 동안에서와 같이 적손은 손씨와 이씨 위주로 고착화된다. 이는 17세기 이후 성리학적 예제가 정착함에 따라 부계 중심의 집성촌으로 고착화되는 현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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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우,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