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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3년 경주부(慶州府) 양좌동(良佐洞) 동안(洞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4+KSM-WZ.1733.4713-20120630.Y1240606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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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계문서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작성시기 1733
형태사항 크기: 42 X 24
판본: 필사본, 복사본
장정: 선장
수량: 1책(36면)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양동 경주손씨 서백당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학로 280

안내정보

1733년 경주부(慶州府) 양좌동(良佐洞) 동안(洞案)
지금의 경상북도(慶尙北道)경주시(慶州市)에 위치한 양동(良洞)마을에서 실시되었던 동약(洞約)의 구성원 명부이다. 양동마을은 조선시대 때 형성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양반 집성촌으로 지금까지 경주손씨(慶州孫氏)와 여주이씨(驪州李氏) 두 가문이 세거해 오고 있는 마을이다. 동약은 조선시대 이래 동리를 중심으로 양반들 주도로 실시되었던 향약을 이르는 것이다. 당시 양반들은 성리학적 윤리규범으로 이루어진 동약을 거주지 일대에서 시행함으로써, 구성원 간의 결속력 강화를 도모함과 동시에 양반 중심의 향촌질서 확립에 대한 성리학적 명분을 제공받으려 했었다. 즉 동약을 통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서로 상부상조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동약 운영을 주도함으로써 각종 규정을 통해 하층민을 통제해 나갔던 것이다. 양동마을, 일명 양좌동(良佐洞)에서도 일찍이 이러한 동약이 시행되었으며, 그 구성원 명부가 작성되었던 것이다.
현재까지 양동마을에는 17~18세기 작성된 것으로 여겨지는 동안 10여 종이 전해지고 있다. 그 중에서 본 자료는 1733년에 작성된 동안으로, 모두 200명의 성명을 수록해 놓았다. 동안 입록자 200명을 성씨별로 분류하면 손씨(孫氏) 101명, 이씨(李氏) 79명, 정씨(鄭氏) 7명, 김씨(金氏), 황씨(黃氏) 각 4명, 최씨(崔氏) 3명, 황보씨(皇甫氏) 2명 순이다. 단연 경주손씨와 여주이씨의 비율이 높게 나타나고 있다. 본 동안을 비롯하여 양동마을에서 작성된 여러 동안의 가장 큰 특징은 적손(嫡孫)과 서손(庶孫)을 엄격하게 구분한 기재 방식이다. 먼저 적손을 나이 순서대로 기재한 후, 이어 서손을 한 줄 내려 후미에 기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양동마을 내에서 양반과 서얼과의 신분적 구분을 명확히 하여 전통적인 양반 중심의 향촌질서를 유지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이광우,이수환

상세정보

1733慶尙道慶州府良佐洞에서 실시되었던 洞約의 洞員 명부로 총 200명을 수록
癸丑正月日 洞案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慶尙道慶州府良佐洞에서 실시되었던 洞約의 洞員 명부이다. 洞員은 동약의 구성원을 뜻한다. 양좌동은 조선시대 경상도를 대표하던 반촌이었다. 조선중기 이후 慶州孫氏와 驪州李氏 두 가문이 차례로 정착한 후 지금까지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양좌동에서는 이 두 가문의 주도로 동리 구성원 간의 상부상조를 통한 결속력 강화, 향촌질서 확립을 위해 각종 공동체 조직을 결성하였었다. 동약도 그 중 하나이다. 동약의 운영 목적은 명확하지 않으나, 현존하는 자료로 보아 開墾, 灌漑, 禁葬 및 신분 또는 계층 간 질서 유지를 위해 운영된 듯하다. 아울러 그 구성원의 명부인 동안을 작성하였는데, 17~18세기에 작성된 10여 종의 동안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본 동안은 이상의 동안 중 1733년에 작성된 것이다. 한편, 양좌동에서는 동약과 성격을 달리하는 香約이라는 공동체 조직이 비슷한 시기에 운영되고 있었다. 香約은 동약과는 달리 장례와 상례 때의 상호부조가 주된 운영 목적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香約은 사족인 上人과 더불어 하층민인 下人, 그리고 庶孼까지도 참여하는 공동체 조직이었다.
본 동안의 작성에 있어서 가장 큰 특징은 嫡庶의 엄연한 구분이다. 다른 반촌과 마찬가지로 양좌동의 향촌질서는 경주손씨와 여주이씨 두 가문의 적손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은 전통적인 사족임을 강조하며 동약을 매개로 하층민을 통제해 나갔다. 양좌동의 서손은 이들과 같은 혈족으로 동약에 함께 참여하고 있었다. 이에 적손들은 서손들과의 신분적 구분이 필요하였다. 적서의 구별을 뚜렷이 함으로써 양좌동에서 그들 중심의 향촌질서를 유지하려 했던 것이며, 이것이 동안 작성에 반영된 것이다. 각 좌목은 적손이 먼저 기재된 후 서손을 기재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서손은 적손에 비해 한 줄 내려 성명이 기재되어 있다. 서손은 성명만 기재해 놓았지만, 적손은 字와 출생 간지를 세주로 기재하였다. 만약 과거시험에 합격한 적손이 있으면, 과거의 종류와 합격 간지도 기재하였다. 적손의 경우 나이 순서대로 동원을 수록해 놓았다. 첫 번째 좌목 가장 앞에 수록된 孫汝濟가 辛卯(1651) 생으로 당시 83세였으며, 가장 말미의 孫興杰이 己丑(1709) 생으로 당시 25세였다. 서손의 기재 순서는 확실하지 않으나, 적손과 마찬가지로 나이순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과거 시험 합격자는 己卯(1699) 司馬試에 급제한 李時中을 비롯하여 6명인데, 모두 사마시 급제자이다. 이씨가 4명이며, 손씨가 2명이다.
본 동안은 癸丑(1733) 정월 15일의 좌목과 己未(1739) 3월 24일의 追入 좌목, 乙丑(1745) 2월 초7일의 追入 좌목까지 세 편의 좌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축 정월 15일의 좌목에는 136명을 수록하였다. 입록 기록 이외에도 削籍된 흔적이 세 군데에서 확인되나 삭적 까닭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입록자들을 성씨별로 구분하면 孫氏 68명, 李氏 55명, 鄭氏 5명, 金氏 4명, 皇甫氏 2명, 崔氏와 黃氏 각 1명 순이다. 비율별로는 손씨가 50%, 이씨가 40%, 나머지 5개 성씨가 10%를 점유하고 있다. 136명 중 적손은 82명으로 60%, 서손은 54명으로 40%의 비율이다. 이를 다시 성씨별로 나열하면 적손은 손씨 36명, 이씨는 46명으로 각각 44%와 56%의 비율이며, 서손은 손씨 32명, 이씨 9명, 정씨 5명, 김씨 4명, 황보씨 2명, 최씨와 정씨 각 1명 순으로 손씨가 59%, 이씨가 17%, 나머지 5개 성씨가 24%를 점유하고 있다.
기미 3월 24일의 추입 좌목에는 63명을 수록하였는데, 여기서도 삭적된 흔적인 한 군데 확인된다. 입록자의 성씨는 손씨 33명, 이씨 23명, 황씨 3명, 정씨와 최씨 각 2명 순이다. 비율은 손씨가 52% 이씨가 37%, 나머지 3개 성씨가 11%로 나타난다. 63명의 추입자를 적서별로 구분하면 적손 41명, 서손 22명으로 각각 65%, 35%의 비율이다. 이를 다시 성씨별로 나열하면 적손은 손씨 20명, 이씨 21명으로 각각 49%, 51%이며, 서손은 손씨 13명, 황씨 3명, 이씨, 정씨, 최씨 각 2명 순으로 손씨 59%, 이씨 9%, 나머지 3개 성씨가 32%의 비율을 점유하고 있다. 마지막 을축 2월 초7일의 추입자는 단 1명인데 이씨이며 적손으로 나타난다.
이상 세 편의 좌목에 수록된 200명을 성씨별로 종합하여 분류하면, 손씨 101명, 이씨 79명, 정씨 7명, 김씨, 황씨 각 4명, 최씨 3명, 황보씨 2명 순이다. 비율은 손씨 50%, 이씨 40%, 나머지 5개 성씨가 10%인 것으로 나타난다. 적서를 구분하면 적손은 124명, 서손은 76명으로 62%와 38%를 차지한다. 이를 다시 성씨별로 분류하면 적손은 손씨가 56명으로 45%를 이씨가 68명으로 55%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서손은 손씨 45명, 이씨 11명, 정씨 7명, 김씨, 황씨 각 4명, 최씨 3명, 황보씨 2명 순이다. 비율은 손씨 59%, 이씨 15%, 나머지 5개 성씨가 26%로 나타난다.
단연 양좌동에 세거하고 있는 경주손씨와 여주이씨의 비율이 높음을 알 수 있다. 두 가문 중 전체적으로 손씨 입록자가 많은 것으로 나타나지만, 오히려 동약을 주도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적손 입록자는 이씨가 손씨보다 높게 나타난다. 반면 이씨 서손의 동안 입록 비율은 매우 낮아 기타 성씨의 점유율과 비슷하다. 손씨와 이씨를 제외한 기타 성씨는 모두 5개 성씨인데, 이 중 적손 입록자는 단 한명도 확인되지 않는다. 동약이 경주손씨와 여주이씨 적손 계열에 의해 주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각 좌목 다음에는 洞任의 성씨가 기재되어 있는데 계축의 좌목은 이씨 1명, 기미의 좌목은 손씨와 이씨 각 1명, 을축의 좌목은 손씨가 동임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아울러 추입된 좌목에는 동입의 署押도 기재되어 있다. 좌목에 서압을 한 당대의 동임을 제외한 다른 임원 역임자는 성명 아래에 역임 간지와 임원의 직명을 기재해 놓았다. 추입 좌목을 포함하여 모두 15명이 확인된다. 여기에 기재되어 있는 임원의 직명은 上有司, 公事員, 公事員有司, 下有司이다. 임명자를 성씨별로 구분하면 상유사는 乙卯(1735)에 이를 역임한 李實中 1명, 공사원은 甲寅(1734)에 이를 역임한 李德祉를 비롯하여 손씨 3명 이씨 5명이다. 공사원유사는 甲子(1744)에 이를 역임한 李開中 1명이며, 하유사는 甲寅(1734)에 이를 역임한 孫鑰을 비롯하여 손씨 3명, 김씨 1명이다.
각 임원의 명확한 임무는 확인 할 수 없으나 상유사, 공사원, 공사원유사는 적손 계열에서 임명되었으며, 하유사는 서손 계열에서 임명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동시대 양좌동에서 실시되었던 香約에서도 상유사와 하유사 체제의 임원 직명이 확인된다. 香約과 마찬가지로 상유사 이하 공사원, 공사원유사 등은 적손 사족 계열에서 임명되어 동약의 실질적인 운영을 주도하였을 것이다. 반면 하유사는 서손 계열을 대표하며 적손 주도의 동약 운영을 보조하는 임무을 띄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임원을 역임한 성씨는 상유사 이하 적손 계열의 경우 이씨가 7명이며 손씨는 3명이다. 반면 서손 계열의 하유사는 손씨와 김씨만 확인되며, 이씨의 서손은 이를 역임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자료적 가치]
18세기 동약 시행의 추이와 재지사족들의 향촌지배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시대 재지사족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향촌을 단위로 향약을 시행하였는데, 이를 동약이라 하였다. 재지사족들은 동약 시행을 통해 동리 구성원 간 상부상조와 결속력 강화를 도모하였으며, 아울러 향촌 지배에 대한 성리학적 명분을 제공받으려 했다. 16세기 이후 경상도 지역을 대표하는 반촌 양좌동에서도 이러한 동약이 시행되었었다. 지금까지 이 마을에 세거하고 있는 경주손씨와 여주이씨는 상부상조와 동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각종 공동체 조직을 구성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동약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양좌동에서의 동약은 이를 주도하는 적손 계열의 사족뿐 아니라 서손까지도 참여시키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동안에도 함께 수록하였다. 양좌동의 적서가 모두 한 일족이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신분 간 구분을 엄격히 하겠다는 의도도 반영되어 있으며, 그것이 동안에 嫡庶의 명확한 구분으로 나타났다. 그런 까닭에 본 동안은 단순히 공동체 구성원을 수록하는데 의미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동리 내에서 사족과 비사족 간의 향촌질서를 명시화 하려는 의도를 확인 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한편 본 동안에서 가장 많은 입록자를 배출한 성씨는 손씨이다. 그러나 정작 동약을 주도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적손은 이씨가 가장 많다. 본 동안은 이전에 작성되었던 다른 동안에 비해 적손 내에서 이씨의 비중이 높아지는 상황속에서 작성된 동안이다. 여주이씨가 조선후기 명실상부 경상도 지역을 대표하는 사족가문으로 성장함에 따라 적손의 동안 참여 비중이 높아지고, 점차적으로 그 주도권을 확보해 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적손 계열 임원도 이씨가 다수를 차지하는 것도 이러한 族勢가 반영된 것이다. 그리고 손씨와 이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5개 성씨가 더 확인되는데, 이들은 모두 서손으로 동안에 입록되어 있다. 즉, 동약을 주도하는 적손은 전원이 경주손씨와 여주이씨였던 것이다. 이전에 작성되었던 동안의 적손 계열 중 타성이 확인되는 것과 구분되는 점이다. 이는 17세기 이후 성리학적 예제의 정착에 따라 양좌동이 손씨와 이씨 중심의 집성촌으로 정착되어 가는 현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민음사, 1990
『良佐洞硏究』, 嶺南大學校 人文科學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判部, 1990
『民族文化論叢』15, 李樹健, 李樹煥, 鄭震英, 金容晩,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4
『嶺南學』17, 김현영,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0
이광우,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733년 경주부(慶州府) 양좌동(良佐洞) 동안(洞案)
癸丑正月日洞案
良佐洞洞案
孫汝濟【景楫辛卯
李德佑【廷弼乙未
孫是楨【邦彥壬寅
李德休【廷義甲辰
李德祚【太初乙巳
孫是郁【文若丁未
李時中【聖能丁未己卯司馬】
李德謙【士益戊申乙酉司馬】
孫是格【聖揆戊申
李英中【公著辛亥
孫是栻【敬叟辛亥
孫是橃【濟世壬子
孫命杰【天秀甲寅
李益中【謙如丁巳
李德祿【重興丁巳辛丑司馬】
李兼中【敬夫己未
孫是杺【聖文丁巳
孫命說【賚汝庚申癸巳司馬】
李寬中【栗夫庚申
孫是震【萬元庚申
李元中【善夫庚申
李一中【秀萬壬戌
孫景杰【大之壬戌辛丑司馬】
李純中【達夫癸亥
孫命來【順之癸亥
李德祉【成之甲子甲寅公事員】
孫孟杰【元之甲子乙卯公事員】
李衡中【以齊甲子丁巳公事員】
孫是林【子平甲子丙辰公事員】
孫命運【天開乙丑
孫命喆【明甫乙丑庚申公事員】
孫命新【受之丙寅
李宅中【天章丙寅
李立中【道而丙寅己未公事員】
李和中【公實戊辰辛酉公事員】
李實中【若虗戊辰乙卯上有司】
李愼中【聖徽戊辰壬戌公事員】
孫是元【壽卿戊辰
李開中【后白甲子公事員有司】
孫漢杰【景三己巳
李處中【正夫己巳
孫命遇【際甫庚午
孫三杰【兼之庚午
李存中【聖著辛未
李建中【聖極壬申
孫孝著【有源壬申
李執中【允夫壬申
孫瞻杰【師伯壬申
孫是先【執卿庚午
李相中【聖助癸酉
李精中【淑道癸酉癸丑司馬】
李憲元【觀甫癸酉
李正中【君普甲戌
孫命迪【天用甲戌
▣▣▣
孫應杰【景彙甲戌
孫命垕【周叟乙亥
孫夙大【承伯丙子
李恢中【后泰丙子
孫命祿【玄賚丙子
李憲曾【宗甫丙子
李稱中【淑平己卯
李憲翼【孝元庚辰
李懋中【聖勗庚辰
孫曾杰【道胤辛巳
李賁中【明卿辛巳
李憲河【道南辛巳
李憲周【長父辛巳
孫夙達【伯勇壬午
李述中【聖述壬午
李任中【淑行壬午
李大中【聖建壬午
孫喜曾【伯孝癸未
李憲朝【仲元癸未
李憲柱【擎天庚辰
李憲章【爾述甲申
孫喜規【圓式乙酉
李質中【文卿乙酉
孫宏杰【遠則丙戌
李憲邦【君式丙戌
孫喜朝【必華戊子
李範中【彜卿戊子
孫興杰己丑
孫偃
李德良
孫汝濂
孫鑌
鄭時錘
孫鐸
孫泰復
孫汝轍
孫鏛
孫泰後
孫泰林
李德用
李德鳳
金禹鼎
孫鈱
李德運
金禹錫
皇甫元
孫钁
黃聖賚
崔興峻
孫鑰甲寅下有司】
孫鎛
孫汝億
孫泰元
皇甫根
孫泰和乙卯下有司】
鄭瀷
李德諶
李德宗
孫鎤
孫是極
孫泰豪
孫泰寬
金季裕
孫是玄
鄭涑
▣▣▣
李德諧
孫顯升
孫舜升
孫泰老
孫濬升己巳下有司】
李德業
孫是梧
鄭淥
孫達升
孫日升
金應商壬戌下有司】
孫碩升
孫泰藎
鄭{氵+奭}
孫是棧
孫聖升
李養中
▣▣▣

癸丑正月十五日洞任李
追入
孫海杰【東叟癸酉
孫東杰【震伯丁丑
李憲成【相甫壬午
孫喜節【伯承癸未
李憲國【正甫癸未
李度中【明盈甲申
孫命逵【雲路甲申
孫命達【道彥乙酉
孫命耉【憲光戊子
孫聖曾【行盈戊子
李憲徵【獻汝己丑
孫學節【述卿己丑
孫命述【賛甫庚寅
李憲時【希座辛卯
孫喜昇【財賓辛卯
孫夙發【仲祥辛卯
李憲淵【正源辛卯
李憲紀【大一辛卯
李憲伋【思甫辛卯
孫命勗【勉汝己丑
李湜中【士澄辛丑
李憲點【敬興壬辰
李憲世【爾準壬辰
孫命沃【啓彥壬辰
李憲衡【聖玉壬辰
孫能杰【台仲癸巳
孫喜耆【英老癸巳
孫師默【愼盈癸巳
李沂中【子與甲午
李憲鐸【振甫甲午
李憲默【伯容甲午
孫萬杰【士一丙申
李命中【座受丙申
孫益節【希彥丁酉
孫夙杰【季興丁酉
孫喜矩【季方丁酉
李憲稷【堯輔戊戌
李憲烋【養伯戊戌
李憲七【汝觀戊戌
李憲規【哭汝庚子
李憲晦【希祖庚子
崔鳳瑞
孫益升
孫大升
孫善升
孫遠升
孫胤升
孫是奎
李復中
孫玄升
孫尹杰
孫是檉戊辰下有司】
崔日省
鄭相璿
黃後徵
李希大
▣▣▣
孫喆升
鄭相璣
黃日徵
孫是樀
孫命凝
黃旭徵
孫廷杰

己未三月二十四日洞任【李[署押]孫[署押]】
追入
李憲述【大式戊戌
乙丑二月初七日洞任【孫[署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