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慶尙道慶州府良佐洞에서 실시되었던 洞約의 洞員 명부이다. 洞員은 동약의 구성원을 뜻한다. 양좌동은 조선시대 경상도를 대표하던 반촌이었다. 조선중기 이후 慶州孫氏와 驪州李氏 두 가문이 차례로 정착한 후 지금까지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마을이다. 양좌동에서는 이 두 가문의 주도로 동리 구성원 간의 상부상조를 통한 결속력 강화, 향촌질서 확립을 위해 각종 공동체 조직을 결성하였었다. 동약도 그 중 하나이다. 동약의 운영 목적은 명확하지 않으나, 현존하는 자료로 보아 開墾, 灌漑, 禁葬 및 신분 또는 계층 간 질서 유지를 위해 운영된 듯하다. 아울러 그 구성원의 명부인 동안을 작성하였는데, 17~18세기에 작성된 10여 종의 동안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본 동안은 이상의 동안 중 1733년에 작성된 것이다. 한편, 양좌동에서는 동약과 성격을 달리하는 香約이라는 공동체 조직이 비슷한 시기에 운영되고 있었다. 香約은 동약과는 달리 장례와 상례 때의 상호부조가 주된 운영 목적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香約은 사족인 上人과 더불어 하층민인 下人, 그리고 庶孼까지도 참여하는 공동체 조직이었다.
본 동안의 작성에 있어서 가장 큰 특징은 嫡庶의 엄연한 구분이다. 다른 반촌과 마찬가지로 양좌동의 향촌질서는 경주손씨와 여주이씨 두 가문의 적손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들은 전통적인 사족임을 강조하며 동약을 매개로 하층민을 통제해 나갔다. 양좌동의 서손은 이들과 같은 혈족으로 동약에 함께 참여하고 있었다. 이에 적손들은 서손들과의 신분적 구분이 필요하였다. 적서의 구별을 뚜렷이 함으로써 양좌동에서 그들 중심의 향촌질서를 유지하려 했던 것이며, 이것이 동안 작성에 반영된 것이다. 각 좌목은 적손이 먼저 기재된 후 서손을 기재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서손은 적손에 비해 한 줄 내려 성명이 기재되어 있다. 서손은 성명만 기재해 놓았지만, 적손은 字와 출생 간지를 세주로 기재하였다. 만약 과거시험에 합격한 적손이 있으면, 과거의 종류와 합격 간지도 기재하였다. 적손의 경우 나이 순서대로 동원을 수록해 놓았다. 첫 번째 좌목 가장 앞에 수록된 孫汝濟가 辛卯(1651) 생으로 당시 83세였으며, 가장 말미의 孫興杰이 己丑(1709) 생으로 당시 25세였다. 서손의 기재 순서는 확실하지 않으나, 적손과 마찬가지로 나이순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과거 시험 합격자는 己卯(1699) 司馬試에 급제한 李時中을 비롯하여 6명인데, 모두 사마시 급제자이다. 이씨가 4명이며, 손씨가 2명이다.
본 동안은 癸丑(1733) 정월 15일의 좌목과 己未(1739) 3월 24일의 追入 좌목, 乙丑(1745) 2월 초7일의 追入 좌목까지 세 편의 좌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축 정월 15일의 좌목에는 136명을 수록하였다. 입록 기록 이외에도 削籍된 흔적이 세 군데에서 확인되나 삭적 까닭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입록자들을 성씨별로 구분하면 孫氏 68명, 李氏 55명, 鄭氏 5명, 金氏 4명, 皇甫氏 2명, 崔氏와 黃氏 각 1명 순이다. 비율별로는 손씨가 50%, 이씨가 40%, 나머지 5개 성씨가 10%를 점유하고 있다. 136명 중 적손은 82명으로 60%, 서손은 54명으로 40%의 비율이다. 이를 다시 성씨별로 나열하면 적손은 손씨 36명, 이씨는 46명으로 각각 44%와 56%의 비율이며, 서손은 손씨 32명, 이씨 9명, 정씨 5명, 김씨 4명, 황보씨 2명, 최씨와 정씨 각 1명 순으로 손씨가 59%, 이씨가 17%, 나머지 5개 성씨가 24%를 점유하고 있다.
기미 3월 24일의 추입 좌목에는 63명을 수록하였는데, 여기서도 삭적된 흔적인 한 군데 확인된다. 입록자의 성씨는 손씨 33명, 이씨 23명, 황씨 3명, 정씨와 최씨 각 2명 순이다. 비율은 손씨가 52% 이씨가 37%, 나머지 3개 성씨가 11%로 나타난다. 63명의 추입자를 적서별로 구분하면 적손 41명, 서손 22명으로 각각 65%, 35%의 비율이다. 이를 다시 성씨별로 나열하면 적손은 손씨 20명, 이씨 21명으로 각각 49%, 51%이며, 서손은 손씨 13명, 황씨 3명, 이씨, 정씨, 최씨 각 2명 순으로 손씨 59%, 이씨 9%, 나머지 3개 성씨가 32%의 비율을 점유하고 있다. 마지막 을축 2월 초7일의 추입자는 단 1명인데 이씨이며 적손으로 나타난다.
이상 세 편의 좌목에 수록된 200명을 성씨별로 종합하여 분류하면, 손씨 101명, 이씨 79명, 정씨 7명, 김씨, 황씨 각 4명, 최씨 3명, 황보씨 2명 순이다. 비율은 손씨 50%, 이씨 40%, 나머지 5개 성씨가 10%인 것으로 나타난다. 적서를 구분하면 적손은 124명, 서손은 76명으로 62%와 38%를 차지한다. 이를 다시 성씨별로 분류하면 적손은 손씨가 56명으로 45%를 이씨가 68명으로 55%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서손은 손씨 45명, 이씨 11명, 정씨 7명, 김씨, 황씨 각 4명, 최씨 3명, 황보씨 2명 순이다. 비율은 손씨 59%, 이씨 15%, 나머지 5개 성씨가 26%로 나타난다.
단연 양좌동에 세거하고 있는 경주손씨와 여주이씨의 비율이 높음을 알 수 있다. 두 가문 중 전체적으로 손씨 입록자가 많은 것으로 나타나지만, 오히려 동약을 주도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적손 입록자는 이씨가 손씨보다 높게 나타난다. 반면 이씨 서손의 동안 입록 비율은 매우 낮아 기타 성씨의 점유율과 비슷하다. 손씨와 이씨를 제외한 기타 성씨는 모두 5개 성씨인데, 이 중 적손 입록자는 단 한명도 확인되지 않는다. 동약이 경주손씨와 여주이씨 적손 계열에 의해 주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각 좌목 다음에는 洞任의 성씨가 기재되어 있는데 계축의 좌목은 이씨 1명, 기미의 좌목은 손씨와 이씨 각 1명, 을축의 좌목은 손씨가 동임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아울러 추입된 좌목에는 동입의 署押도 기재되어 있다. 좌목에 서압을 한 당대의 동임을 제외한 다른 임원 역임자는 성명 아래에 역임 간지와 임원의 직명을 기재해 놓았다. 추입 좌목을 포함하여 모두 15명이 확인된다. 여기에 기재되어 있는 임원의 직명은 上有司, 公事員, 公事員有司, 下有司이다. 임명자를 성씨별로 구분하면 상유사는 乙卯(1735)에 이를 역임한 李實中 1명, 공사원은 甲寅(1734)에 이를 역임한 李德祉를 비롯하여 손씨 3명 이씨 5명이다. 공사원유사는 甲子(1744)에 이를 역임한 李開中 1명이며, 하유사는 甲寅(1734)에 이를 역임한 孫鑰을 비롯하여 손씨 3명, 김씨 1명이다.
각 임원의 명확한 임무는 확인 할 수 없으나 상유사, 공사원, 공사원유사는 적손 계열에서 임명되었으며, 하유사는 서손 계열에서 임명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동시대 양좌동에서 실시되었던 香約에서도 상유사와 하유사 체제의 임원 직명이 확인된다. 香約과 마찬가지로 상유사 이하 공사원, 공사원유사 등은 적손 사족 계열에서 임명되어 동약의 실질적인 운영을 주도하였을 것이다. 반면 하유사는 서손 계열을 대표하며 적손 주도의 동약 운영을 보조하는 임무을 띄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임원을 역임한 성씨는 상유사 이하 적손 계열의 경우 이씨가 7명이며 손씨는 3명이다. 반면 서손 계열의 하유사는 손씨와 김씨만 확인되며, 이씨의 서손은 이를 역임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자료적 가치]
18세기 동약 시행의 추이와 재지사족들의 향촌지배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시대 재지사족들은 자신들이 거주하는 향촌을 단위로 향약을 시행하였는데, 이를 동약이라 하였다. 재지사족들은 동약 시행을 통해 동리 구성원 간 상부상조와 결속력 강화를 도모하였으며, 아울러 향촌 지배에 대한 성리학적 명분을 제공받으려 했다. 16세기 이후 경상도 지역을 대표하는 반촌 양좌동에서도 이러한 동약이 시행되었었다. 지금까지 이 마을에 세거하고 있는 경주손씨와 여주이씨는 상부상조와 동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각종 공동체 조직을 구성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동약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양좌동에서의 동약은 이를 주도하는 적손 계열의 사족뿐 아니라 서손까지도 참여시키고 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동안에도 함께 수록하였다. 양좌동의 적서가 모두 한 일족이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신분 간 구분을 엄격히 하겠다는 의도도 반영되어 있으며, 그것이 동안에 嫡庶의 명확한 구분으로 나타났다. 그런 까닭에 본 동안은 단순히 공동체 구성원을 수록하는데 의미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동리 내에서 사족과 비사족 간의 향촌질서를 명시화 하려는 의도를 확인 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한편 본 동안에서 가장 많은 입록자를 배출한 성씨는 손씨이다. 그러나 정작 동약을 주도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적손은 이씨가 가장 많다. 본 동안은 이전에 작성되었던 다른 동안에 비해 적손 내에서 이씨의 비중이 높아지는 상황속에서 작성된 동안이다. 여주이씨가 조선후기 명실상부 경상도 지역을 대표하는 사족가문으로 성장함에 따라 적손의 동안 참여 비중이 높아지고, 점차적으로 그 주도권을 확보해 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적손 계열 임원도 이씨가 다수를 차지하는 것도 이러한 族勢가 반영된 것이다. 그리고 손씨와 이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5개 성씨가 더 확인되는데, 이들은 모두 서손으로 동안에 입록되어 있다. 즉, 동약을 주도하는 적손은 전원이 경주손씨와 여주이씨였던 것이다. 이전에 작성되었던 동안의 적손 계열 중 타성이 확인되는 것과 구분되는 점이다. 이는 17세기 이후 성리학적 예제의 정착에 따라 양좌동이 손씨와 이씨 중심의 집성촌으로 정착되어 가는 현상에서 비롯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