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慶尙道慶州府良佐洞에서 실시되었던 洞約 구성원인 洞員의 명부이다. 양좌동은 경상도 지방의 대표적인 반촌으로 조선중기 이후 慶州孫氏와 驪州李氏 두 가문이 세거해 오고 있는 집성촌이다. 양좌동에서는 일찍이 동리 구성원 간의 상부상조와 결속력 강화를 위해 각종 공동체 조직을 결성하고 운영해 왔었는데, 본 동약도 이러한 의도로 결성된 것이다. 양좌동에서의 동약이 언제부터 시행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곳에 전해져 오는 자료로 보아 늦어도 17세기 초반에는 시행되었음이 확인된다. 이 동약의 운영 목적은 開墾, 灌漑, 禁葬, 신분 또는 계층 간 질서 유지 등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양좌동에서는 동약과 성격을 달리하는 香約이라는 공동체 조직이 운영되었었다. 동약과 같은 시기에 병행되어 운영되었는데, 이 조직은 양좌동의 사족인 上人과 하층민인 下人, 그리고 庶孼까지도 참여하는 공동체 조직이었다. 향약은 장례와 상례 때의 상호부조가 주된 운영 목적이었다. 현재까지 양좌동에는 본 동약과 관련하여 17~18세기에 작성된 동안 10여 종이 전해지고 있으며, 본 자료는 그 중에서도 1717년 정월에 작성된 것이다.
본 동안의 가장 특징적인 점은 명확한 嫡庶의 구분이다. 적손 주도로 양좌동의 동약이 운영되고 향안이 작성되었지만, 서손들도 참여하고 있었다. 동안에는 적서 모두의 성명을 수록하였는데 기재 방식에는 차이를 두고 있다. 먼저 적손을 나이 순서대로 수록하였다. 첫 번째 좌목의 적손 중 가장 서두에 있는 孫汝澤이 戊子(1648) 生인 70세로 가장 나이가 많았으며, 李恢中은 丙子(1696) 生인 22세로 가장 어렸다. 그리고 성명 아래에는 세주로 字와 출생 간지를 기재하였다. 반면 서손의 경우 적손에 비해 한 줄 내려 성명만 기재해 놓았는데, 적손과 마찬가지로 나이순으로 기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본 동안을 비롯하여 다른 시기에 작성된 동안에서도 이러한 형태의 기재 방식은 적용되어 있다. 사족 중심의 향촌질서를 확고히 하려는 당대 적손들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한편, 적손의 경우 과거 급제의 이력이 있으면 출생 간지 아래에 합격 간지와 시험 종류도 기재해 놓았다. 甲子年(1684)의 文科에 급제한 孫德升을 비롯하여 武科 급제자 1명, 司馬試 급제자 6명 등 모두 8명이 확인된다. 성씨별로는 손씨가 5명, 이씨가 3명이다.
1717년 정월에 작성된 본 동안은 모두 3편의 좌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丁酉 正月의 것으로 표제되어 있지만 수록된 좌목은 丁酉(1717) 2월, 戊申(1728) 정월, 戊申 9월 15일 좌목 세 편이다. 첫 번째 정유 정월의 좌목에는 180명을 수록하였다. 성명이 확인되는 180명 이외에도 削籍 흔적인 다섯 군데에서 확인되나 까닭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들을 성씨별로 분류하면 孫氏 99명, 李氏 56명, 皇甫氏 6명, 金氏 5명, 都氏, 黃氏 각 4명, 鄭氏, 崔氏 각 2명, 申氏, 曹氏 각 1명 순이다. 비율로는 손씨 55%, 이씨 31%이며, 기타 성씨가 14%이다. 두 번째 무신 정월의 좌목에는 모두 38명을 수록하였다. 이들을 성씨별로 분류하면 이씨 20명, 손씨 13명, 정씨 3명, 김씨 2명 순이다. 비율은 이씨가 53%, 손씨가 34%, 기타 성씨가 13%이다. 세 번째 무신 9월 15일 좌목에 수록된 인물은 모두 6명인데, 전원 손씨이다. 이상의 입록자를 다시 성씨별로 종합하면 손씨 118명, 이씨 76명, 김씨 7명, 황보씨 6명, 정씨 5명, 도씨, 황씨 각 4명, 최씨 2명, 신씨, 조씨 각 1명 순이다. 비율별로는 손씨 53%, 이씨 34%, 기타 성씨 13% 순이다. 단연 양좌동의 대표 가문인 경주손씨와 여주이씨의 비중이 높게 나타난다.
입록자를 적서별로 구분하면 첫 번째 좌목의 180명 중 적손은 102명으로 57%, 서손은 78명으로 43%이다. 적손의 성씨는 손씨 55명, 이씨, 46명, 신씨 1명 순이며, 서손의 성씨는 손씨 44명, 이씨 10명, 황보씨 6명, 김씨 5명, 도씨, 황씨 각 4명, 정씨, 최씨 각 2명, 조씨 1명 순이다. 두 번째 좌목은 적손 24명으로 63%, 서손 14명으로 37%이다. 적손의 성씨는 이씨 18명, 손씨 6명이며, 서손의 성씨는 손씨 7명, 정씨 3명, 김씨, 이씨 각 2명 순이다. 마지막 좌목의 입록자는 6명인데 모두 서손이며 손씨이다. 3편의 좌목 입록자 모두를 적서별로 종합하여 구분하면 224명의 입록자 중 적손은 126명으로 56%이며, 서손은 98명으로 44%이다. 성씨별로는 적손의 경우 손씨가 61명으로 48%, 이씨가 64명으로 51명이며, 나머지 1명은 신씨이다. 서손의 성씨는 손씨 57명으로 58%, 이씨는 12명으로 12%, 기타 7개 성씨가 29명으로 30%를 차지하고 있다. 적손에 비해 서손의 타성 입록 비율이 높으며, 전체 입록자의 비율에 비해 이씨의 서손이 매우 적음이 주목된다.
한편, 입록자 가운데 上有司나 下有司를 역임한 자는 입록 간지와 함께 표시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孫銢과 孫是楫이 각각 己酉年(1729)과 庚戌年(1730)에 하유사를 역임하였으며, 무신 정월에 追入된 李衡中이 己酉年(1729)에 상유사를 역임한 것으로 나타난다. 상유사와 하유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임명되고 운영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각각 적손과 서손 계열을 대표하는 유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각 좌목의 말미에는 당대 洞任의 성씨와 署押이 기재되어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좌목에는 손씨와 이씨 각각 1명씩 동임을 맡고 있으며, 마지막 좌목에서는 동임 2명 모두 손씨인 것으로 나타난다.
[자료적 가치]
18세기 동약 시행의 추이를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동약은 동리를 단위로 시행되는 향약으로, 조선중기 이래 재지사족들은 향촌사회에 동약을 시행함으로써 그들 중심의 향촌지배질서 확립에 대한 성리학적 명분을 제공받으려 했다. 아울러 제 규정을 통해 상하 질서를 확립하고, 대소사가 있을 때 상부상조함으로써 구성원 간 결속력을 강화해 나갔다. 경상도의 대표적인 반촌인 양좌동은 16세기부터 경주손씨와 여주이씨 두 가문이 세거한 집성촌으로, 이곳에서도 동약이 시행되었었다. 이들은 동약을 통해 일족 간 상부상조와 결속력 강화를 도모하였지만, 한편으로는 하층민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삼으며 사족으로서의 지위를 표방하였다. 이러한 사족으로서의 지위 유지 양상은 양좌동의 동안 작성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좌목에서 嫡庶의 구분을 명확히 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공동체 구성원을 수록하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동리 내에서 사족과 비사족 간의 향촌질서를 명시화 하려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적손과 서손을 각각 대표하는 상유사와 하유사를 별도로 임명한 것도 이러한 의도였다.
한편 본 동안에서 적손 전체 입록자의 비율에 비해 이씨의 경우 서손이 매우 낮게 나타난다. 이씨 입록자가 적손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여주이씨 族勢의 성장과 맞물려 있다. 여주이씨는 17세기 이후 명실상부 경주 지역을 대표하는 재지사족 가문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러한 가세의 성장에 따라 양좌동을 떠나 인근 동리에 정착한 후 자립하는 서손 계열이 등장하였기에, 양좌동에서의 서손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게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적손의 경우 이씨와 손씨 이외의 성씨는 신씨 단 1명만 있다. 반면 서손은 손씨와 이씨 이외에도 6개 성씨가 더 확인되며 이들의 비율도 적손에 비해 높다. 17세기 이후 성리학적 예제의 정착에 따라 양좌동이 손씨와 이씨 중심의 집성촌으로 정착되어 가는 현상이 반영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