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5년 慶尙道慶州府良佐洞에서 실시되었던 洞約의 洞員 명부로 총 144명을 수록
乙亥 洞案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慶尙道慶州府良佐洞에서 실시되었던 洞約의 洞案이다. 동안은 동약 구성원인 洞員의 명부로, 본 동약이 양좌동에서 실시되었기에 흔히 良佐洞洞案이라 부르기도 한다. 경주부의 대표적인 반촌인 양좌동은 조선중기 이래 慶州孫氏와 驪州李氏 두 가문이 지금까지 세거해 오고 있는 동리이다. 양좌동의 동안은 17~18세기에 걸쳐 작성된 것 10여 종이 전해지고 있는데, 본 자료는 그 중에서도 1695년의 것이다. 한편, 동약과 별도로 비슷한 시기 양좌동에서는 香約이라는 것을 시행하고 있었다. 香約은 양좌동의 上人과 下人, 그리고 서얼까지도 참여하는 동계인데, 주로 상호부조, 특히 장례와 상례 때의 부조가 주된 운영 목적이었다. 반면, 동약은 전답의 開墾, 灌漑, 禁葬, 신분 또는 계층 간 질서 유지 등을 위해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695년에 작성된 본 동안의 座目에는 모두 144명을 수록하고 있으며, 두 번의 追入 좌목이 부기되어 있다. 첫 번째 좌목에는 124명을 수록하였는데, 말미에는 丙子(1696) 정월의 것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표지에 乙亥(1695)의 동안이라 명기되어 있기에, 1695년의 좌목을 이듬해 정월 정리하여 엮은 것으로 생각된다. 성씨별로는 孫氏 75명, 李氏 41명, 蔣氏 3명, 曹氏 2명, 金氏와 申氏, 그리고 鄭氏 각 1명 순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입록자로 포함시키지 않았지만 削籍된 흔적도 한 군데 확인된다. 두 번째는 庚辰(1700) 5월의 追入 좌목으로 모두 18명을 수록하였다. 성씨별로는 孫氏 8명, 李氏 6명, 都氏와 黃氏 각 2명 순이다. 庚辰의 追入 좌목을 수록한 본 자료 말고도 1700년에 작성된 동안이 별도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경진년 당시의 동원 모두를 기입한 것이다. 세 번째는 辛巳(1701)의 追入 좌목으로 崔氏 2명만을 기재하고 있다. 전체 성씨별 분포는 孫錡 이하 손씨 83명, 李坫 이하 이씨 47명이며, 그 외 장씨 3명, 도씨, 조씨, 최씨, 황씨 각 2명, 김씨, 신씨, 정씨 각 1명 순이다. 입록 비율은 단연 경주손씨와 여주이씨의 비중이 높다. 이 두 가문은 각각 총 입록자 중 58%와 33%를 차지하고 있으며, 타성으로는 8개 성씨가 확인되나 이들의 비중은 10%를 넘지 않는다. 이들 기타 성씨는 위의 두 가문과 인척 관계를 통해 양좌동에 정착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양좌동이 17세기 이후 경주손씨와 여주이씨 두 가문 중심의 집성촌으로 고착되면서, 나머지 성씨들은 마을에서 점차 사라지는 추세였기에 그 비중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본 동안 기재 방식의 가장 큰 특징은 동약에 참여하고 있는 양좌동의 嫡庶를 모두 기입하되 그것을 구분해 놓았다는 것이다. 먼저 적손을 기재해 놓았으며, 이어서 서손을 한 줄 내려 기재하는 방식으로 구분해 놓았다. 144명 중 적손이 91명, 서손이 53명이다. 서손 가운데는 1700년에 추입된 자가 6명이며, 1701년에 추입된 자가 2명이다. 1700년에 추입된 서손 중 2명은 황씨, 2명은 도씨로 나타나며, 1701년에 추입된 서손은 최씨 2명이다. 서손 53명을 다시 성씨별로 살펴보면 손씨 35명, 이씨 6명, 도씨, 장씨, 조씨, 최씨, 황씨 각 2명, 김씨, 정씨 각 1명 순으로 나타난다. 경주손씨와 여주이씨를 제외한 대부분의 성씨가 서손인 것과 서손 대부분이 손씨임이 주목된다.
[자료적 가치]
18세기 전후 동약 시행의 추이와 재지사족들의 향촌 지배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중기 이래 재지사족들은 향촌 사회에서 동리 단위의 향약인 동약을 시행해 나감으로써 그들 중심의 향촌지배질서를 확립해 나갔다. 이러한 동약의 시행 추이는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는데, 대체적으로 사족의 세가 강한 지역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동약이 시행되었으며, 그 통제 범위가 좀 더 광범위하였다. 경상도를 대표하는 반촌인 양좌동의 경주손씨와 여주이씨 두 가문의 사족들도 이른 시기 동약을 적극적으로 시행해 나감으로써 그들 중심의 향촌지배질서 확립을 도모해 나갔던 것이다. 본 동안에서 嫡庶 구별을 명확히 해 놓은 것도 향촌지배 질서 유지와 무관하지 않다. 한편 서손의 경우 손씨의 비중이 높게 나타난다. 이는 여주이씨의 주요 庶派가 일찍이 양좌동을 떠나 인근 동리에 정착했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민음사, 1990
『良佐洞硏究』, 嶺南大學校 人文科學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判部, 1990
『民族文化論叢』15, 李樹健, 李樹煥, 鄭震英, 金容晩,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4
『嶺南學』17, 김현영,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0
이광우,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