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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5년 경주부(慶州府) 양좌동(良佐洞) 동안(洞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4+KSM-WZ.1695.4713-20120630.Y1240606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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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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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사회-조직/운영-계문서
작성지역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작성시기 1695
형태사항 크기: 27 X 33
판본: 필사본, 복사본
장정: 선장
수량: 1책(22면)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경주 양동 경주손씨 서백당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학로 280

안내정보

1695년 경주부(慶州府) 양좌동(良佐洞) 동안(洞案)
조선시대 지금의 경상북도(慶尙北道)경주시(慶州市)에 위치한 양동(良洞)마을, 일명 양좌동(良佐洞)에서 시행되었던 동약(洞約)의 동원(洞員) 명부이다. 동약은 조선중기 이래 동리 단위로 시행되었던 향약을 일컬으며, 동원은 그 구성원이다. 지금까지 양동마을에 세거하고 있는 경주손씨(慶州孫氏)와 여주이씨(驪州李氏)는 이곳에 정착하고 집성촌을 이루면서, 양반 중심의 향촌질서를 확립하고 구성원 간의 상부상조와 결속력 강화를 위해 동약을 시행하며 그 명부인 동안을 작성하였었다. 현재까지 양동마을에는 17~18세기에 작성된 여러 편의 동안이 전해지고 있는데, 본 자료는 그 중에서도 1695년에 만들어진 것이며 모두 144명을 수록하였다. 입록자의 성씨는 손씨(孫氏) 83명, 이씨(李氏) 47명, 장씨(蔣氏) 3명, 도씨(都氏), 조씨(曹氏), 최씨(崔氏), 황씨(黃氏) 각 2명, 김씨(金氏), 신씨(申氏), 정씨(鄭氏) 각 1명 순으로 나타난다.
이광우,이수환

상세정보

1695慶尙道慶州府良佐洞에서 실시되었던 洞約의 洞員 명부로 총 144명을 수록
乙亥 洞案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慶尙道慶州府良佐洞에서 실시되었던 洞約의 洞案이다. 동안은 동약 구성원인 洞員의 명부로, 본 동약이 양좌동에서 실시되었기에 흔히 良佐洞洞案이라 부르기도 한다. 경주부의 대표적인 반촌인 양좌동은 조선중기 이래 慶州孫氏와 驪州李氏 두 가문이 지금까지 세거해 오고 있는 동리이다. 양좌동의 동안은 17~18세기에 걸쳐 작성된 것 10여 종이 전해지고 있는데, 본 자료는 그 중에서도 1695년의 것이다. 한편, 동약과 별도로 비슷한 시기 양좌동에서는 香約이라는 것을 시행하고 있었다. 香約은 양좌동의 上人과 下人, 그리고 서얼까지도 참여하는 동계인데, 주로 상호부조, 특히 장례와 상례 때의 부조가 주된 운영 목적이었다. 반면, 동약은 전답의 開墾, 灌漑, 禁葬, 신분 또는 계층 간 질서 유지 등을 위해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695년에 작성된 본 동안의 座目에는 모두 144명을 수록하고 있으며, 두 번의 追入 좌목이 부기되어 있다. 첫 번째 좌목에는 124명을 수록하였는데, 말미에는 丙子(1696) 정월의 것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표지에 乙亥(1695)의 동안이라 명기되어 있기에, 1695년의 좌목을 이듬해 정월 정리하여 엮은 것으로 생각된다. 성씨별로는 孫氏 75명, 李氏 41명, 蔣氏 3명, 曹氏 2명, 金氏와 申氏, 그리고 鄭氏 각 1명 순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입록자로 포함시키지 않았지만 削籍된 흔적도 한 군데 확인된다. 두 번째는 庚辰(1700) 5월의 追入 좌목으로 모두 18명을 수록하였다. 성씨별로는 孫氏 8명, 李氏 6명, 都氏와 黃氏 각 2명 순이다. 庚辰의 追入 좌목을 수록한 본 자료 말고도 1700년에 작성된 동안이 별도로 전해지고 있는데, 이는 경진년 당시의 동원 모두를 기입한 것이다. 세 번째는 辛巳(1701)의 追入 좌목으로 崔氏 2명만을 기재하고 있다. 전체 성씨별 분포는 孫錡 이하 손씨 83명, 李坫 이하 이씨 47명이며, 그 외 장씨 3명, 도씨, 조씨, 최씨, 황씨 각 2명, 김씨, 신씨, 정씨 각 1명 순이다. 입록 비율은 단연 경주손씨와 여주이씨의 비중이 높다. 이 두 가문은 각각 총 입록자 중 58%와 33%를 차지하고 있으며, 타성으로는 8개 성씨가 확인되나 이들의 비중은 10%를 넘지 않는다. 이들 기타 성씨는 위의 두 가문과 인척 관계를 통해 양좌동에 정착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양좌동이 17세기 이후 경주손씨와 여주이씨 두 가문 중심의 집성촌으로 고착되면서, 나머지 성씨들은 마을에서 점차 사라지는 추세였기에 그 비중이 적을 수밖에 없었다.
본 동안 기재 방식의 가장 큰 특징은 동약에 참여하고 있는 양좌동의 嫡庶를 모두 기입하되 그것을 구분해 놓았다는 것이다. 먼저 적손을 기재해 놓았으며, 이어서 서손을 한 줄 내려 기재하는 방식으로 구분해 놓았다. 144명 중 적손이 91명, 서손이 53명이다. 서손 가운데는 1700년에 추입된 자가 6명이며, 1701년에 추입된 자가 2명이다. 1700년에 추입된 서손 중 2명은 황씨, 2명은 도씨로 나타나며, 1701년에 추입된 서손은 최씨 2명이다. 서손 53명을 다시 성씨별로 살펴보면 손씨 35명, 이씨 6명, 도씨, 장씨, 조씨, 최씨, 황씨 각 2명, 김씨, 정씨 각 1명 순으로 나타난다. 경주손씨와 여주이씨를 제외한 대부분의 성씨가 서손인 것과 서손 대부분이 손씨임이 주목된다.
[자료적 가치]
18세기 전후 동약 시행의 추이와 재지사족들의 향촌 지배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중기 이래 재지사족들은 향촌 사회에서 동리 단위의 향약인 동약을 시행해 나감으로써 그들 중심의 향촌지배질서를 확립해 나갔다. 이러한 동약의 시행 추이는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는데, 대체적으로 사족의 세가 강한 지역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동약이 시행되었으며, 그 통제 범위가 좀 더 광범위하였다. 경상도를 대표하는 반촌인 양좌동의 경주손씨와 여주이씨 두 가문의 사족들도 이른 시기 동약을 적극적으로 시행해 나감으로써 그들 중심의 향촌지배질서 확립을 도모해 나갔던 것이다. 본 동안에서 嫡庶 구별을 명확히 해 놓은 것도 향촌지배 질서 유지와 무관하지 않다. 한편 서손의 경우 손씨의 비중이 높게 나타난다. 이는 여주이씨의 주요 庶派가 일찍이 양좌동을 떠나 인근 동리에 정착했기 때문인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민음사, 1990
『良佐洞硏究』, 嶺南大學校 人文科學硏究所 編, 嶺南大學校 出判部, 1990
『民族文化論叢』15, 李樹健, 李樹煥, 鄭震英, 金容晩,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4
『嶺南學』17, 김현영,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0
이광우,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695년 경주부(慶州府) 양좌동(良佐洞) 동안(洞案)
乙亥洞案
良佐洞洞案
孫錡
李坫
孫泰明
李埰
孫泰興
李垍
孫汝說
李墰
李圾
李增
孫汝亮
李㙾
孫汝積
孫汝沃
李㙫
李德玄
孫泰長
孫汝澤
孫泰禎
孫汝弼
李德恒
蔣興烈
孫汝義
孫汝濟
孫泰恒
李德新
李德華
孫是永
孫是構
孫是爕
李德隆
李德咸
孫泰裕
李德璋
李德佑
李德齊
孫敬升
李德凝
孫是仁
李德袤
孫德升
李誠中
孫汝智
孫是㝡
孫是楨
李德儀
孫泰慶
孫是翊
孫是義
孫是奕
孫是寬
李德言
孫是標
李德休
李德潤
李德祚
李德褒
孫是智
孫是謙
孫是郁
李時中
李德謙
孫是雍
申沆
孫是格
孫是相
李敏中
李德祺
李英中
李德素
孫是橃
孫是豪
孫是容
孫晩杰
李徵中
李益中
李德禕
孫學著
李敬中
曹應卓
孫晩
孫鑑
孫僻
孫宗直
孫宗恪
孫鏞
孫敏政
孫宗漢
孫鈺
李堢
曹夏昌
孫傅
孫佐
孫宗武
李堳
金翊漢
孫鈗
孫偃
▣▣▣
孫儀
李城
孫汝廉
孫德敬
孫億
孫鑌
孫俊
鄭時錘
孫天漢
蔣興漢
蔣興孝
李垚
孫鏻
孫鐸
孫英佐
孫汝翼
孫善佐
孫汝述
孫泰林
孫泰復
孫汝轍
孫汝徵
孫鏛
李德用
孫汝琬
孫錘

丙子正月日洞任【孫李】
追入
孫是栻
孫命昌
孫命說
李直中
李寬中
李徽中
李德禧
孫是復
李一中
孫是杺
孫雲著
孫昌杰
黃允耉
黃正耉
都夏重
都千重
李德鳳
孫鈱

庚辰五月日洞任【孫李】
追入
崔宣
崔南峻
辛巳九月日洞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