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4년 慶尙道慶州府良佐洞에서 실시되었던 洞約의 洞員 명부로 총 102명을 수록
甲子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慶尙道慶州府良佐洞에서 실시되었던 洞約의 구성원인 洞員 명부로 1684년에 작성된 자료이다. 조선중기 이래 慶州孫氏와 驪州李氏 두 가문은 지금까지 양좌동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해 오고 있다. 이들은 일찍이 동리에 거주하는 구성원 간의 상부상조와 결속력 강화를 위해 각종 공동체 조직을 결성하고 운영하였었다. 양좌동을 중심으로 開墾, 灌漑, 禁葬, 신분 또는 계층 간 질서 유지 등을 위해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洞約도 이러한 의도에서 결성된 조직이다. 양좌동에서 동약이 처음 시행된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양좌동에 전해져 오는 각종 자료를 통해 17세기 초반 무렵에는 동약이 시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동약과 별도로 비슷한 시기 양좌동에서는 香約이라는 공동체 조직이 결성되어 있었다. 이 조직에는 양좌동의 上人과 下人, 그리고 서얼까지도 참여하고 있었는데, 주로 상호부조, 특히 장례와 상례 때의 상호부조가 주된 운영 목적으로 동약과는 그 성격이 구별된다. 현재까지 양좌동의 동약 운영과 관련하여 17~18세기에 작성된 동안 10여 종이 전해지고 있다. 본 자료는 그 중에서도 1684년에 작성된 것이다.
1684년에 작성된 본 동안에 입록된 인물은 모두 102명이다. 이중 100명은 甲子(1684) 12월 정리된 좌목에 수록되어 있으며, 나머지 2명은 추입되어 있는데 추입 시기는 확인되지 않는다. 좌목에는 削籍된 흔적이 두 군데에 나타나는데, 삭적 연유는 명기되어 있지 않다. 입록자 102명을 성씨별로 분류하면 孫銑 이하 孫氏 65명, 李壃 이하 李氏 30명, 蔣休 이하 蔣氏 3명, 曹應卓 이하 曹氏 2명, 朴氏(朴洙), 鄭氏(鄭時銢) 각 1명 순이다. 손씨가 전체 입록자 중 64%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씨는 29%이다. 나머지 4개 성씨는 7%에 불과하여, 경주손씨와 여주이씨 위주로 본 동약이 운영되고 있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좌목 말미에는 작성 시기와 더불어 당시의 洞任 2명의 성씨와 서압이 기재되어 있는데, 손씨와 이씨 각 1명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본 동안 입록자에 대해서는 嫡庶의 구분이 확연하게 나타나 있다. 실제 사족의 후손인 두 가문들의 적손들이 동약을 주도하였지만 일족들이 함께 거주하는 동리였기에 서손도 참여시킨 후 함께 동안에 수록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신분 간 질서를 확연히 하기 위해 기재 방식에 차이를 두었다. 당해 좌목에서 먼저 적손을 기재한 후, 뒤이어 한 줄 내려 서손의 성명을 기재하는 방식으로 좌목이 작성된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이전과 후대에 작성된 동안에서도 확인된다. 엄중한 적서 구분은 본 동안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입록자를 다시 적서로 구분하면, 102명 중 적손은 70명으로 그 비율은 69%, 서손은 32명으로 31%의 비율로 수록되어 있는데, 말미에 수록된 추입자 2명은 모두 서손으로 손씨이다. 추입자 중 孫錘는 乙亥(1695)에 下有司를 역임하는 것으로 부기되어 있다. 삭적된 흔적 두 군데도 모두 서손의 좌목에서 확인된다. 성씨별로는 적손은 손씨 39명, 이씨 27명, 장씨 3명, 박씨 1명 순이며, 서손은 손씨 26명, 이씨 3명, 조씨 2명, 정씨 1명 순이다. 이씨의 경우 적손 비율이 39%로 전체 입록자의 이씨 비율 보다 확연히 높게 나타나지만, 서손은 불과 9% 밖에 되지 않는다.
[자료적 가치]
17세기 후반 동약 시행의 추이와 동리를 중심으로 한 재지사족들의 향촌 지배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중기 이래 재지사족들은 향촌 사회에서 동리 단위의 향약인 동약을 시행해 나갔다. 동약의 제 규정을 통해 재지사족들은 그들 중심의 향촌지배질서 확립에 대한 성리학적 명분을 제공받으려 했던 것이다. 양좌동에서 실시된 동약 역시, 이러한 차원에서 결성된 조직이다. 경주손씨와 여주이씨는 양좌동에 거주하고 있는 일족 간의 결속력을 강화함과 동시에 동안을 작성함으로써 신분 질서를 확고히 하려 했다. 본 동안 말미에 孫錘가 下有司로 명기되어 있음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양좌동에서 실시되고 있던 또 다른 공동체 조직인 香約에는 上有司와 下有司를 뚜렷이 구분하고 있다. 상유사가 상인, 즉 적손과 사족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면, 하유사는 서손 이하의 구성원을 대표하는 형태로 운영 되었던 것이다. 동약 역시 이러한 의미에서 하유사를 두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동안을 통해 적손과 서손 이하를 뚜렷이 구분함으로써 사족 중심의 향촌질서를 명시화 하려 했던 것이다.
한편 본 동안에서 이씨의 경우 적손의 전체 입록 비율에 비해 서손이 매우 낮게 나타난다. 이씨 입록자는 적손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여주이씨 家勢의 성장과 맞물려 있다. 여주이씨는 17세기 이후 명실상부 경주 지역을 대표하는 재지사족 가문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러한 가세의 성장에 따라 양좌동을 떠나 인근 동리에 정착한 후 자립하는 서손 계열이 등장하였기에, 양좌동에서의 서손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게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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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우,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