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0년 慶尙道慶州府良佐洞에서 실시되었던 洞約의 洞員 명부로 총 96명을 수록
[내용 및 특징]
17~18세기 慶尙道慶州府良佐洞에서 실시되었던 洞約의 洞員 명부이다. 경주의 대표적인 반촌인 양좌동에서 실시된 동약의 동안이기에 일명 良佐洞洞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양좌동에는 동약을 비롯하여 香約이라는 것이 시행되기도 하였다. 香約은 양좌동의 上人과 下人, 그리고 서얼까지도 참여하는 동계로써 주로 상호부조, 특히 장례와 상례 때의 부조가 주된 내용이었다. 반면, 본 동약은 전답의 開墾, 灌漑, 禁葬, 신분 및 계층 간 질서 유지 등을 위해 운영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양좌동의 동안은 지금까지 10여 종이 전해지고 있는데, 본 자료는 그 중에서도 1680년에 작성된 것이다.
1680년에 작성된 본 동안의 座目에는 모두 96명을 수록하고 있는데, 성씨별로는 孫侙 이하 孫氏 57명, 李墩 이하 李氏 31명, 蔣休 이하 蔣氏 4명, 曹應卓 이하 曹氏 2명, 朴氏 1명(朴洙) 순으로 나타난다. 양좌동을 대표하며 현재까지 이곳에 세거하고 있는 慶州孫氏와 驪州李氏 두 가문 출신이 단연 입록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두 가문 출신 인사의 비중은 본 동안에서 각각 59%와 32%이다. 타성으로 3개 성씨가 확인되나 모두 7명에 불과하다. 나머지 성씨는 인척 관계를 통해 양좌동에 정착한 계통으로 여겨지는데, 17세기 이후 양좌동이 경주손씨와 여주이씨 두 가문 중심의 집성촌으로 고착되면서 점차 사라지는 추세였다.
한편, 본 동안에는 동약에 참여하고 있는 嫡庶가 모두 수록되어 있는데, 적손들이 먼저 기재되어 있으며 이어 서손들이 한 줄을 내려서 적손 다음부터 기재되어 있다. 이를 적서별로 구별하면 적손이 71명, 서손이 25명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를 다시 성관별로 분류하면 적손은 손씨 38명, 이씨 28명, 장씨 4명, 박씨 1명 순이고, 서손은 손씨 20명, 이씨 3명, 조씨 2명 순이다. 총 입록자 중 서손 비율은 손씨가 총 57명 중 20명으로 35%, 이씨가 총 28명 중 3명으로 10%이며, 타성은 총 7명 중 2명으로 28%이다. 서손의 비율이 적손에 비해 비교적 낮게 나타나며, 서손의 대부분을 손씨가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주목된다.
좌목 다음에는 庚申(1680) 정월의 洞任으로 각각 李와 孫이 기재되어 있으며, 孫 아래에는 署押이 있다. 동약 임원의 구성은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양좌동을 대표하던 손씨와 이씨 두 가문에서 각각 1명의 동임을 선출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어 자료 말미에는 孫泰禎 이하 物件收合有司 9명이 기재되어 있다. 동약을 운영하는데 있어 공동으로 사용하는 물건을 각 동원으로부터 수합하는 일을 맡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物件收合有司의 성씨는 손씨 5명, 이씨 4명으로 나타난다.
[자료적 가치]
17세기 후반 촌락 조직의 성격과 재지사족들의 향촌 지배 양상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시대 사족들은 향촌 사회에서 동리 단위의 향약인 동약을 시행해 나감으로써 그들 중심의 향촌지배질서 확립을 도모하였다. 특히 이러한 동약에는 사족뿐만 아니라 동리의 下人들도 포함시켜 실시하는 것도 있었는데, 비록 본 동안에는 하인이 확인되지 않으나, 양좌동의 동약 역시 상인과 하인 모두가 참여하는 合契 형식의 동약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본 동약에는 嫡庶를 함께 기재하고 있으나 기입 방식을 달리하여 적서의 구분을 엄연히 하고 있음이 나타난다. 서손의 경우 손씨의 비중이 높은데, 여주이씨의 경우 家勢가 성장함에 따라 庶派가 일찍이 양좌동을 떠나 인근 동리에 정착했기 때문에, 적손에 비해 서손이 적게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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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族文化論叢』15, 李樹健, 李樹煥, 鄭震英, 金容晩,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4
『嶺南學』17, 김현영,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0
이광우,이수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