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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1년 경상도(慶尙道) 청도군(淸道郡) 향안(鄕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4+KSM-WZ.1651.4782-20120630.Y121060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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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정치/행정-조직/운영-향안
작성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작성시기 1651
형태사항 크기: 31 X 28
판본: 필사본, 복사본
장정: 선장
수량: 1책(8면)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청도 청도향교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교촌리 48 문중소개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학로 280

안내정보

1651년 경상도(慶尙道) 청도군(淸道郡) 향안(鄕案)
1651년 지금의 경상북도(慶尙北道)청도군(淸道郡)에서 작성된 향안(鄕案)이다. 향안은 조선시대 지방자치행정기구인 유향소의 구성원 명단을 일컫는 것이다. 조선시대 각 고을의 유력한 양반들은 유향소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대변하며, 지역 여론을 주도해 나갔었다. 그리고 유향소 참여를 통해 지역 내에서의 지위를 견고히 하기 위한 방편으로 향안을 작성하였다. 향안 입록을 통해 유향소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 받음과 동시에, 지역 사회를 대표하는 유력한 양반임을 표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양반들은 향안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다분히 노력하였던 것이다. 청도 지역의 향안도 이러한 추세 속에 작성되었다. 현재까지 청도 지역에서 작성된 향안은 대략 9종이 전해지는데, 그 중에서도 본 자료는 1651년의 향안이다. 향안 입록자 56명을 성씨별로 분류하면 이씨(李氏) 27명, 박씨(朴氏) 21명, 김씨(金氏), 예씨(芮氏) 각 2명, 최씨(崔氏), 반씨(潘氏), 손씨(孫氏), 원씨(元氏) 각 1명 순으로 나타난다. 이들의 성관은 고성이씨(固城李氏), 밀양박씨(密陽朴氏), 재령이씨(載寧李氏), 김해김씨(金海金氏), 의흥예씨(義興芮氏), 경주최씨(慶州崔氏), 밀양손씨(密陽孫氏), 원주원씨(原州元氏), 기성반씨(岐城潘氏) 등이다. 이 중에서도 밀양박씨, 고성이씨 김해김씨 등은 청도 지역에서 작성된 향안에 꾸준히 많은 입록자를 배출하며, 조선중기 이래 청도 지역의 여론을 주도했던 가문이다.
이광우,이수환

상세정보

1651慶尙道淸道郡 留鄕所에서 작성된 鄕案으로 鄕員 56명을 수록
鄕案
[내용 및 특징]
1651년 정월 초3일 작성된 慶尙道淸道郡의 鄕案이다. 향안은 留鄕所 구성원인 鄕員의 명부이다. 청도에서의 유향소는 16세기 중반 이전부터 운영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시기에 그 구성원 명부인 향안이 작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나,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청도향안은 1599년의 향안이다. 이 향안을 비롯하여 현재까지 淸道鄕校에는 향안 9종이 전해져 오고 있는데, 본 자료는 그 중에서도 1651년에 작성되었으며, 9종 중 일곱 번째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전까지 작성되었던 여섯 종의 향안은 1599년을 필두로 모두 17세기 초반에 집중적으로 작성된 것이기에, 본 향안과 비교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편, 16~17세기에 작성된 현존 청도향안의 입록자 현황은 『淸道鄕案正名錄』에서 확인된다. 이 책자는 1911청도향교에서 간행한 것으로, 조선중기 이래 청도 지역의 향안 작성 추이와 입록자 현황을 파악 할 수 있는 자료이다.
본 향안에는 朴烱 이하 총 56명이 수록되어 있다. 이 향안에 바로 앞서 작성된 것이 1632년의 향안인데, 그때에 비해 입록자 수는 9명이 적다. 하지만 1599~1614년에 작성되었던 다섯 종의 향안 입록자 수 보다는 두 배 정도 많은 수치이다. 향안 座目의 작성 방식은 이전 향안과 동일하다. 입록자의 성명을 기재한 뒤, 그 위에 官職 또는 職役, 그리고 사족들에게 부여되는 특수 兵種을 기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입록 순서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전 향안의 입록 순서와 비교한다면 나이 순서대로 기재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입록자 성명 위에 ‘屳’이라고 부기한 곳이 모두 열다섯 군데이다. 이는 훗날 어느 시점에 향안 입록자를 상고하는 과정에서, 당시 사망한 鄕員을 표시하기 위해 부기한 듯하다.
입록자 56명을 성씨별로 나열하면 李氏 27명, 朴氏 21명, 金氏, 芮氏 각 2명, 崔氏, 潘氏, 孫氏, 元氏 각 1명 순이다. 이씨와 박씨의 비중이 여전히 높아 전체 입록자의 86%를 차지하고 있으며, 1632년의 향안과 비교하여 새로 입록된 성씨도 이씨와 박씨 위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두 성씨의 입록이 꾸준하게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전 향안에 수록되지 않았던 潘氏도 이번 향안부터 새롭게 확인된다. 좌목의 말미에는 향안 작성 당시 향임인 座首와 別監의 성명과 그들의 署押이 기재되어 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좌수는 1인, 별감은 2인인데, 1651년 정월 초3일의 좌수는 朴東維, 별감은 朴東貞李珉으로 나타난다. 3명 모두 좌목에서 확인되는 인물들인데, 좌수와 별감 모두 입록자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이씨와 박씨였다. 이상 입록된 자들의 성관을 나열하면 固城李氏, 密陽朴氏, 載寧李氏, 金海金氏, 義興芮氏, 慶州崔氏, 密陽孫氏, 原州元氏, 岐城潘氏 등이다. 그런데 이들의 성관을 살펴보면 舊來의 청도 土姓 대신, 타 고을에서 이주해온 성관 위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고성이씨, 밀양박씨, 재령이씨, 김해김씨의 비중이 높게 나타난다. 이들 가문은 17세기 이전에 청도 지역을 대표하는 사족 가문으로 자리 잡은 성관 출신들이다. 15세기 후반 사림파의 종장이었던 金宗直의 문인 李冑金馹孫이 각각 청도의 고성이씨와 김해김씨 출신이며, 16세기 중반 사림파 계열의 유학자 朴河澄청도의 밀양박씨 출신이다. 그리고 청도 지역의 대표적인 임란 의병장으로 宣武功臣 3등에 錄勳된 李雲龍은 재령이씨 출신이다. 이렇게 형성된 사회적 명망을 바탕으로 이들의 후손들과 일족들은 청도향안 입록자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향안 작성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상의 입록자를 다시 官職이나 職役, 兵種 등으로 분류하면 幼學 30명, 忠義衛 16명, 察訪 2명, 都事, 同知, 僉知, 縣監, 訓導 각 1명 순으로 나타난다. 단연 幼學의 비중이 높아 54%를 차지하며, 병종인 충의위는 29%이다. 1632년에 나타나는 유학의 비중 보다는 다소 낮지만, 충의위는 약간 높게 나타난다. 그 외의 관직 역임자 중에서도 實職을 제수 받은 자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비록 고위 관직 역임자는 없었지만 17세기 초반의 향안에 비하여 유학의 비중이 크게 늘었으며, 관직 역임자의 비중이 크게 줄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전 향안에 입록되었었던 임란 의병장 같은 명망 있는 인사도 그리 많지가 않다. 향안 입록자 가운데 관직 역임자가 적다는 것은 대외적인 향안 권위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17세기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 이러한 부분은 점점 누적되어 가는 추세였기에, 청도 지역에서의 향안 작성이 어느 시기 사실상 廢置되어 18세기 이후에는 확인되지 않는 것이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향안 작성의 추이와 17세기 중반 경상도청도 지역 재지사족들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중기 이래 재지사족들은 향촌사회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표방할 수 있는 각종 조직을 운영해 나갔는데, 그 중 하나가 留鄕所였다. 유향소는 조선시대 사족 중심의 지방자치행정기구로 15세기 후반부터 사림파들에 의한 활발한 운영이 시도되었었다. 그리고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향촌사회에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 鄕約을 유향소의 제 규정인 鄕規와 접목시켜 실시해 나갔다. 이를 통해 그들 중심의 향촌지배절서 확립에 대한 성리학적 명분을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 아울러 유향소 鄕員의 명부인 향안을 배타적으로 작성하였다. 향안에 입록되었다는 것은 곧 유향소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는 것이며, 지역사회의 여론을 주도할 수 있는 유력한 사족임을 표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재지사족들은 향촌사회의 지위를 보장할 수 있는 향안 작성에 열중하였고, 이를 배타적으로 운영해 나간 것이다.
경상도청도 지역에서도 이러한 추세 속에 향안이 작성되었다. 金馹孫李冑 등 16세기 전후 사림파를 대표했던 인사들이 배출된 곳이기에, 비교적 이른 시기에 유향소 운영이 시도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이와 비슷한 시기에 향안이 작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청도향안은 1599년 향안이다. 현재까지 청도향교에 소장되었던 청도향안 9종이 전해지고 있는데, 대부분 1599년과 17세기 전반기에 집중적으로 작성된 것이다. 전란 직후 피폐해진 향촌사회 복구 사업과 맞물려 진행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본 향안은 1651년의 것으로 17세기 중반에 작성된 것이다. 하지만 이전 향안과의 작성 간격이 17년 차이가 나고, 입록자의 성격이 이전과는 차이가 있기에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 향안 작성의 추이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 가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본 향안의 입록자를 성관별로 살펴보면, 청도 舊來의 토성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청도의 토성으로는 申, 金, 白, 李, 曺氏가 있지만, 전후에 작성된 청도향안에서 확인되는 토성은 청도김씨 밖에 없으며, 그나마 입록 비중이 매우 미미한 편이다. 이와는 달리 17세기 이전 혼인과 卜居 등을 통해 청도에 이주한 가문 출신의 인사들이 입록자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중 주요 가문은 고성이씨, 밀양박씨, 재령이씨, 경주이씨 김해김씨, 의흥예씨 등이다. 특히 본 향안에서는 고성이씨와 밀양박씨의 비중이 높게 나타나, 이 두 가문에서만 입록자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비록 본 향안부터는 기성반씨라는 새로운 가문이 등장하고, 전후 향안에서 새로운 성씨가 한 두 가문씩 확인되나 역시 그 비중은 미약하다. 반면 밀양박씨, 고성이씨처럼 일찍이 청도 지역의 대표적인 가문으로 자리 잡은 성관들은 그 입록 비중이 갈수록 높아지게 된다. 17세기 전후 유향소를 중심으로 지역 내 지위를 확보한 가문들이 이후, 향안을 배타적으로 운영해 나감으로써 그 지위를 지속시키려 했기 때문에, 향안 입록 성씨가 고착화되었던 것이다. 한편, 입록자의 관직 역임자는 17세기 전반기의 향안 입록자와 비교해 매우 낮은 수치이다. 이는 인조반정 이후 중앙정권의 閥閱化가 심화됨에 따라 재지사족의 官路가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관직, 그 중에서도 실직 역임자가 줄고 유학의 비중이 높아지는 추세는 사회,경제적 변화와 맞물려 향안 권위의 약화로 이어지게 된다.
『嶠南誌』,
『淸道鄕案正名錄』, 淸道鄕校, 1911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민음사, 1990
『釜大史學』22, 申正熙, 嶺南大學校 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991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判部, 1992
『釜大史學』22, 張東杓, 釜山大學校史學會, 1998
이광우,이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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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1년 경상도(慶尙道) 청도군(淸道郡) 향안(鄕案)
鄕案
【屳】參奉朴烱
【屳】幼學朴馚
【屳】同知李湍
【屳】僉知李漑
【屳】幼學朴希章
【屳】縣監李儼
幼學朴璣
【屳】幼學李稹
幼學李稑
訓導崔建
幼學金胤先
幼學李穰
【屳】幼學潘潤
【屳】幼學朴東秀
參奉李重慶
幼學朴東徽
幼學朴東信
幼學朴東老
幼學朴東欽
【屳】忠義衛李光宇
幼學朴東維
忠義衛李琛
都事朴東貞
忠義衛李珉
察訪朴東溫
幼學朴東耈
幼學朴東緯
幼學元斗興
參奉李光義
幼學金鐵堅
【屳】忠義衛李琰
忠義衛李光元
【屳】忠義衛李光弼
忠義衛李珩
忠義衛李光禮
幼學朴之成
忠義衛李球
忠義衛李璈
【屳】幼學朴東稷
忠義衛李光祖
幼學李處毅
幼學朴之慶
【屳】忠義衛李玏
幼學李重毅
幼學孫樹䉨
幼學朴東契
忠義衛李珠
察訪朴東柱
幼學李尙毅
忠義衛李瑢
【屳】忠義衛李光世
幼學朴東傅
幼學芮俊民
忠義衛李光斗
幼學朴明善
幼學芮碩藩

辛卯正月初三日
座首朴東維[署押]
別監朴東貞[署押]
李珉[署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