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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2년 경상도(慶尙道) 청도군(淸道郡) 향안(鄕案)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Y04+KSM-WZ.1632.4782-20120630.Y121060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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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서-기타
내용분류: 정치/행정-조직/운영-향안
작성지역 경상북도 청도군
작성시기 1632
형태사항 크기: 36 X 21
판본: 필사본, 복사본
장정: 선장
수량: 1책(8면)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청도 청도향교 /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교촌리 48 문중소개
현소장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 경상북도 경산시 대학로 280

안내정보

1632년 경상도(慶尙道) 청도군(淸道郡) 향안(鄕案)
1632년 3월 27일 지금의 경상북도(慶尙北道)청도군(淸道郡)에서 작성된 향안(鄕案)이다. 향안은 조선시대 지방자치행정기구인 유향소(留鄕所)의 구성원 명단을 일컫는 것이다. 유향소가 전국적으로 널리 설치되어 운영되기 시작한 것은 조선중기 이후로, 당시 지역을 대표하는 양반들에 의해 그 운영이 주도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지역 사회 내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견고히 유지하기 위해 향안을 작성해 나갔다. 향안에 입록되어 있다는 것은 유향소 운영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며, 유향소 운영에 참여한다는 것은 지역의 대표적인 양반 가문 출신임을 표방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각 고을의 양반들은 향안 작성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것이다.
조선시대 청도군에서도 이러한 의도 하에 향안이 작성되었다. 현재까지 청도향교(淸道鄕校)에는 9종의 향안이 전해졌었는데, 이중 가장 오래된 것이 1599년의 향안이다. 그리고 본 향안은 9종의 청도향안 중 여섯 번째로 오래된 1632년의 향안이다. 이 향안에는 모두 67명의 입록자를 수록하고 있다. 입록자를 성씨별로 분류하면, 이씨(李氏) 27명, 박씨(朴氏) 20명, 최씨(崔氏) 5명, 예씨(芮氏) 4명, 김씨(金氏) 3명, 손씨(孫氏), 곽씨(郭氏) 각 2명, 민씨(閔氏), 조씨(趙氏), 고씨(高氏), 원씨(元氏) 각 1명 순으로 나타난다. 특히 이씨와 박씨의 비중이 높은데 이들은 고성이씨(固城李氏), 밀양박씨(密陽朴氏), 재령이씨(載寧李氏) 등이며, 그 외 김해김씨(金海金氏)도 확인된다. 이들 가문은 17세기 이전 청도 지역에 정착한 유력한 양반 가문이었다. 15세기 전후 유력한 사림파(士林派) 인사와 16세기 후반 다수의 임란 의병장을 배출하기도 했었다. 이러한 사회적 지위를 활용하여 청도 지역의 유향소 운영을 주도하며, 다수의 인사를 향안에 입록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광우,이수환

상세정보

1632慶尙道淸道郡 留鄕所에서 작성된 鄕案으로 鄕員 67명을 수록
鄕案
[내용 및 특징]
崇禎 5년(1632) 3월 27일에 작성된 慶尙道淸道郡의 鄕案이다. 청도군에서의 향안 작성은 1599년부터 확인되는데, 주로 17세기 전반기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淸道鄕校에는 현재까지 9종의 청도향안이 전해져 왔었다. 본 자료는 그 중에서도 여섯 번째로 작성된 향안이다. 한편, 그간 청도에서 작성된 향안은 『淸道鄕案正名錄』에 모두 엮여져 있다. 이 책자는 1911청도향교에서 간행한 것으로, 조선중기 이래 청도 지역의 향안 작성 추이와 입록자의 현황을 파악 할 수 있는 자료이다.
1632년에 작성된 본 향안 입록자는 高崙 이하 67명이다. 削籍 기록도 두 군데 확인되나, 그 연유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67명의 입록자 수는 이전에 작성되었던 향안에 비해 가장 많은 입록 수이다. 이전 향안은 보통 30명 내외의 입록자 수를 유지하였기에, 그 증가율은 높은 편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이렇게 입록자 수가 많은 것은 향안 작성의 간격이 넓어졌기 때문이다. 이전 향안은 순서대로 1599년, 1600년, 1609년, 1610년, 1614년에 작성되었었다. 정기적이지는 않지만 그 간격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러나 본 향안은 이전 향안에 비해 18년의 차이가 나기에, 그 사이에 새로 입록된 자들의 수가 많았던 것이다.
향안의 좌목은 이전의 것처럼 입록자의 성명을 기재하고, 그 위에 해당 인물의 官職, 職役, 兵種 등을 기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록 인물은 명확하지 않으나, 나이 순서대로 배열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좌목이 만들어 진 후, 훗날 향안을 상고하면서 부기된 흔적도 있다. 먼저 성명 위에 ‘屳’이라 부기되어 있는 인물이 모두 20명이다. 훗날 어느 시점에 향안 입록자를 상고하는 과정에서 당대 사망한 鄕員을 표시하기 위해 부기한 듯하다. 그리고 성명 하단부에는 나이와 향촌에서의 직임 등을 명기해 놓았다. 그 예로 두 번째로 입록되어 있는 幼學 趙成麟을 ‘八十歲以上鄕任’으로 부기하였다. 나이로 보았을 때, 삭적된 인물을 제외하고 80세 이상은 趙成麟 1명이며, 70세 이상은 幼學 郭永錫 이하 8명, 60세 이상은 4명, 50세 이상은 7명, 40세 이상은 14명, 30세 이상 12명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연령대를 구분한 인물은 모두 48명이다. 또한 그 중에 3명은 성명 앞에 ‘屳’이라 명기되어 있다. ‘屳’ 부기 이전에 이런 부기가 먼저 이루어진 듯하다. 그러나 이것을 부기한 자와 부기하지 않은 자의 구분은 명확하지 않다. 이렇게 나이 순서대로 기재한 것은 향안을 통해, 사족들끼리의 질서를 명확히 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향촌에서의 직임은 鄕任 32명, 校任 4명, 校生과 納粟 각 2명, 進士, 訓導, 參奉 각 1명 순으로 나타난다. 향임은 청도 유향소의 座首와 別監 역임자에게 부기되었을 것이다. 한편, 본 향안 작성 당시의 향임은 좌수 1명으로 李氏, 별감은 2명으로 모두 金氏이며, 성씨 아래에는 署押이 기재되어 있다. 향임 이외에 校任과 校生이 확인되는데, 향촌사회 운영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향교 관련 인사일 것이다. 그 외 조선중기 이후 또 다른 향촌운영기구로 대두된 서원의 원생이 1명 나타나며, 관직인 훈도참봉도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納粟으로 입록되어 있는 幼學 朴東悌都事朴東貞이다. 納粟의 연유는 알 수 없지만 전란 이후 사회,경제적 변화 가운데 향촌사회에서 신분 상승의 기회를 얻은 인물이 향안에 입록되었던 것으로 생각 할 수 있다. 그 외에 타고을 移居者 3명에 대해서도 이거 사실과 이거 고을을 함께 부기해 놓았다.
향안 입록자 67명을 성씨별로 나열하면 李氏 27명, 朴氏 20명, 崔氏 5명, 芮氏 4명, 金氏 3명, 孫氏, 郭氏 각 2명, 閔氏, 趙氏, 高氏, 元氏 각 1명 순이다. 이씨와 박씨의 비중이 높은데, 이상 입록된 자들의 성관을 나열하면 固城李氏, 密陽朴氏, 載寧李氏, 金海金氏, 驪興閔氏, 咸安趙氏, 玄風郭氏, 密陽孫氏, 慶州崔氏, 原州元氏 등이다. 이 중 주요 가문은 고성이씨, 재령이씨, 김해김씨, 밀양박씨로 입록자는 고성이씨와 밀양박씨 두 가문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16세기 전후 사림파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成宗 연간 사림파의 宗匠이었던 金宗直의 문인으로 李育, 金馹孫 등이 청도 출신이었다. 이들은 각각 고성이씨와 김해김씨로 그 일족과 후손들은 청도향안에 다수의 입록자를 배출시켰다. 밀양박씨 출신의 사림파 朴河澄과 임란 의병장인 李雲龍의 재령이씨도 향안에 다수를 입록시켰던 것이다. 한편, 이상의 입록자 성관을 살펴보면 舊來의 청도 土姓 대신, 타 고을에서 이주해온 성관으로 구성되어 있음이 주목된다.
향안 입록자 67명을 官職과 職役, 그리고 사족들에게 부여되는 특수 兵種으로 구분하여 나열하면 幼學 43명, 忠義衛 15명, 縣監 2명, 都事, 同知, 奉事, 生員, 察訪, 參奉, 僉知 각 1명 순으로 나타난다. 단연 幼學의 비중이 높은데, 전체 입록자 중 64%이다. 이전에 작성되었던 향안들 보다 많은 수치의 유학 입록 비율이다. 유학의 비율이 높아진 만큼 다른 관직과 직역을 가지고 있는 인물은 줄어들었으며, 實職 역임자는 더욱 적어졌다. 이렇게 유학의 비중이 높아졌다는 것은 청도 지역 사족들의 중앙 진출이 미약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17세기 이후 재지사족의 官路가 어려워지는 추세와 맥을 같이하는데, 이 추세는 지속되어 후기로 갈수록 향안 권위의 약화로 이어지게 된다.
[자료적 가치]
조선시대 향안 작성의 추이와 17세기 전반기 청도 지역 재지사족들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조선중기 이래 재지사족들은 향촌사회에서 留鄕所 운영을 통해, 鄕論을 주도해 나갔다. 아울러 이들은 유향소 운영 규정인 鄕規에다 향약을 접목시켜 시행해 나감으로써, 그들 주도의 향촌지배질서 확립에 대한 성리학적 명분을 제공받았다. 이러한 유향소의 구성원인 鄕員의 명부가 바로 鄕案이다. 조선시대 향안에 입록되었다는 것은 곧 유향소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는 것이며, 또한 지역사회의 여론을 주도할 수 있는 유력한 사족임을 표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재지사족들은 향촌사회의 지위를 보장할 수 있는 향안 작성에 열중하였고, 이를 배타적으로 운영해 나갔다.
경상도청도의 유향소는 늦어도 16세기 중반 이전에 운영되었음이 확인된다. 15세기 후반 주요 사림파 인사가 배출되었던 만큼, 그들이 정책적으로 추진하였던 유향소 운영이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향안도 작성되었는데, 현존하는 향안 중 가장 오래된 것이 1599년의 것이다. 청도 지역의 향안은 이때의 것부터 확인되며, 그 이후에도 여러 편이 작성되었다. 이 중 대다수는 17세기 전반기에 작성되었다.
향안 입록자의 성관을 살펴보면 11개 성씨가 나타난다. 그런데 본 향안과 전후에 작성된 향안을 살펴보면, 舊來의 청도 土姓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淸道金氏만이 일부가 입록되어 있을 뿐 그 비중은 매우 미약하다. 조선시대 이후 토성의 族勢가 점차적으로 약화되는 대신, 타 고을에서 이주해 온 사족들이 조선시대 청도 지역을 대표하는 재지사족 가문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들 가문은 17세기 이전 혼인과 卜居 등을 통해 청도에 이주한 가문들로 고성이씨, 밀양박씨, 경주이씨, 재령이씨, 김해김씨, 의흥예씨 등이 여기에 속한다. 현존 청도향안 중 가장 오래전에 만들어졌던 1599년 향안 작성 이전부터, 청도에 정착한 사족 가문들인 것이다. 아울러 이들은 16세기 전후 청도 지역을 대표하는 사림파 가문으로, 후대에 향안을 주도할 만한 지역적 기반을 이른 시기에 확보했던 가문이다. 이상의 가문을 제외하고 향안에는 제주고씨나 원주원씨 등의 소수 가문이 확인되지만 전후 입록 양상은 미미하다. 17세기 이전 지역적 기반을 확고히 한 사족 가문이 본 향안을 비롯하여, 전후 향안 입록자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곧 향촌사회에서 향안이 배타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음을 반영하는 사례이다. 한편, 향안 입록자의 관직 역임자 비중은 17세기 이후 점차 줄어드는 대신, 幼學의 비중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본 향안의 유학 비중은 이전에 작성되었던, 여타 향안 보다 높게 나타나는 반면, 실직 역임자는 매우 미미하다. 17세기 이래 이러한 추세는 후기로 갈수록 심화되는 양상이었다. 인조반정 이후 중앙정권의 閥閱化가 심화됨에 따라 재지사족의 官路가 어려워져, 관직 역임자의 향안 입록이 드물게 나타나는 것이다. 유학 비중의 증가는 사회,경제적 변화와 맞물려 향안 권위의 약화로 이어졌다. 향안 권위의 약화는 입록 기준의 완화로 이어졌을 것이며, 그런 가운데 본 향안처럼 다수의 입록자가 수록된 좌목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納粟된 인물이 입록되기도 하는 것이다.
『嶠南誌』,
『淸道鄕案正名錄』, 淸道鄕校, 1911
『嶺南鄕約資料集成』, 吳世昌 外, 嶺南大學校 出版部, 1986
『조선후기향약연구』, 鄕村社會史硏究會, 민음사, 1990
『釜大史學』22, 申正熙, 嶺南大學校 大學院 博士學位論文, 1991
『慶北鄕校誌』,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慶尙北道, 1991
『慶北鄕校資料集成』(Ⅰ), 嶺南大學校 民族文化硏究所, 嶺南大學校 出判部, 1992
『釜大史學』22, 張東杓, 釜山大學校史學會, 1998
이광우,이수환

이미지

원문 텍스트

1632년 경상도(慶尙道) 청도군(淸道郡) 향안(鄕案)
鄕案
【屳】僉知高崙
幼學趙成麟【八十歲以上鄕任】
【屳】忠義衛李洙
【屳】幼學郭永鎭
幼學郭永錫【七十歲以上鄕任】
參奉朴烱【七十歲以上鄕任】
【屳】幼學芮夢辰
幼學朴馚【七十歲以上鄕任】
同知李湍【七十歲以上鄕任】
【屳】幼學芮廷馧
【屳】幼學李廷卓
奉事朴隣【七十歲以上鄕任】
【屳】忠義衛李澤
幼學李廷翼【七十歲以上鄕任】
【屳】幼學閔止孝【七十歲以上鄕任】
【屳】縣監朴瑀
忠義衛李漑【七十歲以上鄕任】
【屳】幼學朴琡
幼學孫千一【六十歲以上鄕任】
生員李瓛
【屳】幼學崔嶂
忠義衛李瑺【六十歲以上鄕任】
【屳】幼學孫績【六十歲以上鄕任】
【屳】忠義衛李玹
【屳】幼學金善慶
幼學朴希章【六十歲以上鄕任】
幼學李宗明【五十歲以上】
縣監李儼【五十歲以上】
幼學崔逈【五十歲以上鄕任】
幼學朴璣【五十歲以上】
幼學金尙輝【五十歲以上鄕任】
幼學李稑【五十歲以上鄕任】
幼學李稹【五十歲以上鄕任】
【屳】幼學李秤
幼學李穰【四十歲以上鄕任】
【屳】忠義李{王+閣}【四十歲以上鄕任】
幼學崔遠【四十歲以上訓導
幼學李重慶【四十歲以上參奉
幼學朴東秀【四十歲以上鄕任】
幼學朴賢佐【四十歲以上校任】
幼學朴東孝【四十歲以上鄕任】
忠義衛李光仁【四十歲以上校任】
幼學李重榮【移居柒谷鄕任】
■……■【四十歲以上鄕任】
【屳】幼學朴東賢
幼學崔禹敷【移居慶州
幼學芮用周【四十歲以上鄕任】
【屳】幼學芮撝謙
■……■【三十歲以上校任】
【屳】忠義衛李琬【四十歲鄕任】
忠義衛李頊【四十歲院生】
幼學金濈【三十歲以上校生】
幼學崔遠【四十歲以上鄕任】
幼學朴東悌【四十歲納粟】
幼學朴東信【三十歲以上校生】
幼學朴賢佑【三十歲以上鄕任】
忠義衛李琯【三十歲以上】
忠義衛李琛【三十歲以上】
幼學朴東欽
幼學朴由欽【三十歲以上鄕任】
忠義衛李璋【移居密陽
幼學朴東維【三十歲以上鄕任】
幼學元斗興【三十歲以上校生】
都事朴東貞【三十歲以上納粟】
忠義衛李光義【三十歲以上進士】
察訪朴東溫【三十歲以上鄕任】
【屳】幼學朴東益
忠義衛李瑜【四十歲以上鄕任】
忠義衛李珉【三十歲以上鄕任】

別監金[署押]
崇禎五年三月二十七日座首李[署押]
別監金[署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