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및 특징]
17세기 慶尙道比安縣에서 작성되었던 鄕案이다. 조선시대 자치행정기구인 留鄕所 운영을 주도하였던 비안현 品官들의 성명과 관직 및 직역 등이 명기되어 있으며, 모두 175명이 수록되어 있다. 본 향안은 한 시기의 좌목을 수록한 것이 아니라, 1623년의 修正 座目을 시작으로 시기를 달리 하는 23개의 좌목을 시간 순서대로 엮어 놓았다. 한편 이 향안은 후대에 작성된 다른 비안향안과 더불어 比安鄕校에 소장되어 왔는데, 현재 원본은 유실된 상태이다.
가장 앞에 있는 좌목은 ‘天啓三年十月日修正’ 좌목으로 1623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學諭鄭輝를 시작으로 모두 74명이 수록되어 있는데, 수록 인물들의 활동 시기는 1623년 좌목 작성 이전이다. 연배 순으로 수록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정휘의 경우 1519년 己卯士禍로 비안현에 정착했던 인물이다. 두 번째 좌목이 1599년에 만들어진 ‘己亥十二月追錄’인 것으로 보아, ‘天啓三年十月日修正’ 좌목은 임진왜란 이전 비안현에서 작성되었던 향안을 복구한 것으로 생각된다. 16세기 중엽 이전에 이미 비안현에서 향안이 작성되었으며, 이 향안은 임진왜란을 거치는 동안 소실되었던 것이다. 향안이 소실되어 74명의 정확한 입록시기를 알 수 없기에 당시 품관들의 기억이나 다른 자료를 참고하여 연배 순대로 임진왜란 이전의 입록자를 수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天啓三年十月日修正’ 좌목은 말 그대로 1623년에 수정된 좌목이다. 임란 직후에 복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좌목을 새롭게 수정한 것이다. 이때의 수정은 1623년에 일어난 仁祖反正이라는 정치적 격변에 대한 어떠한 영향력이 작용되었을 것으로 추정 할 수 있다. ‘天啓三年十月日修正’ 좌목 입록자 74명의 성씨 종류는 모두 16종으로 이 향안 가운데 가장 다양하다. 妻鄕 또는 外鄕으로의 이주와 정착이 활발했던 17세기 이전 일반적인 혼인제도의 영향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입록 성씨로는 金氏가 20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 李氏 8명, 鄭氏와 卞氏 각 7명, 朴氏 6명, 禹씨 5명, 張氏 4명이며, 그 외 宋,權,林,周,洪,曺,孫,高,趙氏가 확인된다. 입록자의 직역 및 관직 중 가장 많은 것은 단연 幼學으로 33명이다. 그 외 學諭, 兵曹佐郞, 縣令, 參奉, 奉事, 察訪, 部將 등의 문무관직 역임자 및 生進試 입격자도 다수 수록되어 있다. 사림의 정계 진출이 활발했던 17세기 이전 좌목에는 비교적 유학의 비중이 적었는데, 비안현 역시 이후의 좌목 보다는 유학 비중이 현저히 적은 편으로 전체의 50%가 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1599년의 ‘己亥十二月追錄’, 1603년의 ‘癸卯三月日追錄’, 1605년의 ‘乙巳三月日追錄’, 1611년의 ‘辛亥十二月日錄’, 1616년의 ‘丙辰四月日錄’은 임진왜란 종료 직후부터 인조반정 이전에 순차적으로 추록되었던 인물들을 기재한 것이다. 말미에 座首 張과 別監 鄭의 手決이 있는데, 이는 ‘天啓三年十月日修正’ 좌목부터 ‘丙辰四月日錄’까지의 좌목에 대한 정리가 이루어질 당시의 鄕任 것으로 생각된다. 역시 이때의 좌목도 1623년의 인조반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시기 입록자 수와 성씨는 1599년 15명(金氏 6명, 張氏 3명, 鄭氏와 李氏 각 2명, 禹,宋氏 각 1명), 1603년 2명(金,卞氏 각 1명), 1605년 3명(朴氏 2명, 金氏 1명), 1611년 1명(朴氏 1명), 1616년 3명(張氏 2명, 金氏 1명)이다. 17세기 이전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성씨의 종류가 크게 감소하였다. 이때부터 향안은 鄭,朴,金,禹,張,卞,李氏 등 몇몇 성씨에 의해 주도되는 양상이 나타난다. 17세기 이후 성리학적 예제의 정착에 따라 타성의 이주가 급격히 감소하고, 이들 위주의 동성 촌락이 비안현 일대에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1599~1616년까지의 입록자 관직 및 직역을 볼 때 幼學은 6명밖에 되지 않는다. 인조반정 이전까지 영남 지역 사림의 진출이 활발했던 까닭에 적지 않은 관직 역임자가 향안에 수록될 수 있었던 것이다.
‘甲子三月日追錄’ 좌목부터 ‘乙未新進己酉三月日追錄’ 좌목까지는 해당 시기 입록된 향중 인사들을 수록한 것으로, 각 좌목 말미에는 대부분 좌수와 별감의 수결이 기재되어 있다. 모두 17회에 걸쳐 추록이 이루어졌고 총 77명의 성명이 확인된다. 시기별 입록자 수와 성씨별 분포는 1624년 3월 ‘甲子三月日追錄’에 11명(張氏 5명, 鄭,朴,金,卞,李,權氏 각 1명), 1629년 7월 ‘己巳七月日追錄’에 3명(金氏 2명, 鄭氏 1명), 1629년 9월 ‘己巳九月日追錄’에 4명(鄭氏 2명, 張,卞氏 각 1명), 1631년 10월 ‘辛未十月日追錄’에 5명(朴氏 2명, 金,張,卞氏 각 1명), 1635년 11월 ‘乙亥十一月日追錄’에 2명(金氏 2명), 1635년 12월 ‘乙亥十二月日’에 1명(金氏 1명), 1636년 2월 ‘戊寅二月日’에 2명(朴,金氏 각 1명), 1636년 3월 ‘戊寅三月日’에 2명(禹,張氏 각 1명), 1643년 1월 ‘癸未正月日’에 5명(張,卞氏 각 2명, 鄭氏 1명), 같은 시기 1643년 1월 ‘癸未正月日’에 6명(李氏 2명, 金,鄭,朴,張氏 각 1명), 1648년 12월 1일 ‘戊子十二月初八日’에 4명(金氏 2명, 權,張氏 각 1명), 1648년 12월 14일 ‘戊子十二月十四日’에 3명(金,禹,李氏 각 1명), 연도 미기입 좌목에 3명(朴氏 3명), 1656년 1월 10일 ‘丙申正月十日’에 5명(金氏 4명, 張氏 1명), 1656년 2월 12일 ‘丙申二月十二日’에 5명(金氏 4명, 張氏 1명), 1656년 6월 9일 ‘丙申六月初九日’에 3명(金氏 2명, 禹氏 1명), 1669년의 ‘乙未新進己酉三月日追錄’에 14명(張氏 6명, 朴氏,李氏 각 3명, 鄭氏,權氏 각 1명)으로 나타난다. 마지막 좌목은 1655년의 입록 기록으로 1669년이 되어서야 향안에 추록된 것이다.
1624년 이후 입록자의 직역 및 관직을 살펴보면 절대 다수가 幼學으로 확인된다. 77명 중 유학이 아닌 인물은 12명에 불과하다. 그나마 副正, 僉知, 僉正 등의 한직이나 병종을 기재한 경우가 대부분으로, 이전처럼 요직 역임자나 生進試 합격자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는 당시의 정치적 양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 주도의 정국이 형성되고 중앙정권의 벌열화가 진행되면서 지역 사족의 중앙 진출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따라서 지방 사림의 진출이 활발했던 이전과는 달리 후기로 갈수록 幼學의 비중이 높아져 갔던 것이다.
한편, 입록자의 전체 성씨를 분석하면 金氏가 51명으로 가장 많고, 이어 張氏 29명, 朴氏 20명, 鄭氏와 卞氏 각 16명, 李氏 15명, 禹氏 9명으로 확인되며, 이들이 향안의 주요 구성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16세기부터 17세기 중반까지 지속적으로 입록자를 배출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각 좌목 말미에 기재되어 있는 좌수와 별감의 성씨도 張,金,朴,鄭,卞氏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比安邑誌』에 따르면 비안현의 주요 성씨로 密陽朴氏, 草溪卞氏, 順天張氏, 一善金氏, 延日鄭氏, 陽城李氏, 丹陽禹氏 등이 기재되어 있는데, 이들 가문에 의해 비안현의 향안이 주도되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16~17세기 향안 작성의 추이와 경상도비안 지역 재지사족의 동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향안은 조선시대 자치행정기구인 유향소의 구성원 명단이다. 조선시대 재지사족들은 향안을 배타적으로 운영하며, 향안을 통해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를 확고히 해 나갔다. 이러한 향안의 작성 추이와 입록 양상은 시기별, 지역별로 차이점이 나타난다. 비안현의 향안처럼 대체로 17세기 초반까지의 좌목에서는 중앙의 요직을 역임하거나, 당대를 대표하는 지역의 학자를 비교적 쉽게 확인 할 수 있다. 이러한 구성은 향안 입록에 대한 권위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그러나 17세기 전반부터 중앙정권의 벌열화가 고착화되면서 지방 사림의 중앙 진출이 점점 어려워지게 되며, 이와 맞물려 향안 입록자의 성분도 대부분 幼學이 차치하게 된다. 이러한 양상은 후기로 갈수록 더욱 심화되며, 이는 결국 지역 내 향안 권위의 약화로 이어지게 되었다. 비안현의 향안도 이러한 양상을 확인 할 수 있다.
한편 본 향안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중수된 향안의 흔적을 확인 할 수 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향안을 전란 이후 기억과 과거 자료를 더듬어 중수를 하고, 그것을 향안 가장 앞의 좌목으로 수록하였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 향안 중수를 통해 전란 이전과 같은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사회를 복구하려는 당시 지역 사족들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그리고 명확한 관계를 확인 할 수 없으나 첫 좌목이 1623년의 修正 좌목이라는 점, 鄕任의 수결이 있는 추록 기록이 1624년부터 기재되었다는 점에서 1623년의 인조반정이 향안 작성을 비롯한 지역 사족들의 동향에 큰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